4월 6일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지친 몸이 침대에 눕는 순간, 쉽게 잠이 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발과 다리를 마사지하고 몇 가지 알고 있는 요가 자세를 취하지만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 밀리의 서재에서 김애란의 소설을 들어본다. 어,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이었는데 다르게 느껴진다.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새 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 것인가. 겨우 이 주일 외국에 있다고 사람이 이렇게 가벼운 갈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김애란은 특히 한국에서 젊은 세대들이 겪는 실질적인 이야기를 화두로 던진다. 나도 겪었고 가슴 아파서 눈물도 흘린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왜일까. 나는 공감은 한다. 공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선택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껏 나는 공감하지 않으면서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공감한 척 선택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공감은 하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뭔가 힘이 생겼다.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또 무엇인가.
나는 미니멀리즘이 되었다. 친정 엄마, 아빠가 계시지 않으니 내가 가진 가족이 미니멀리즘이 되었다. 엄마를 통해 전해 듣고 만나던 이모, 외삼촌 가족의 이야기를 잘 모른다. 아빠를 통해 늘 만나던 작은 아빠들과 고모의 소식을 띄엄띄엄 알게 된다. 형제자매들도 예전만큼 만나 지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꾸린 남편, 아들, 딸 가족의 구성원만이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어떤 친구는 부러워한다. 그 말을 듣고 황당했다. 친정식구조차 복잡한 인간관계로 힘든 경우가 많은가 보다. 그래도 그런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외로움이다. 고명딸로 언니, 여동생이 없어 늘 외로웠다. 남동생이 언제까지 인형놀이, 소꿉놀이를 해줄 수는 없다. 나도 필사적으로 오빠, 남동생을 따라다니며 놀았다. 내가 지금 체력이 좋은 건 그 덕분이라 짐작한다. 그래도 여자남자 성향이 다르다. 점점 그들과 멀어지면서 나는 단짝 친구가 꼭 있었다. 전교생이 다 아는 우리, 초등학생 때는 선주, 중학생 때는 미경, 고등학생 때는 정은. 지금은 갈 길이 달라진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단짝과 헤어지면서 외로움과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영원한 인연은 없다는 걸 배웠는지 대학생 이후부터는 사람을 아주 깊게는 사귀지 못한다. 배려가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만 많다. 인간 관계도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나에게 힘을 준 모양이다. 자연을 보라. 흙, 돌, 나무, 풀, 태양, 달, 바람으로 이루어졌지만 다양한 색과 날씨를 만든다. 자연은 미니멀리즘이지만 다채롭다.
그리고 스스로 해결한다. 죽음과 이별을 알게 된 나는 무엇이 욕심인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 나의 배낭에도 옷, 우의, 약, 세면도구, 배터리와 핸드폰으로 미니멀하다. 그래도 충분하다. 더 욕심을 가지면 내 어깨가 아플 뿐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사회의 문제에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들이 다 하는 길을 따라가지 않음으로써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가 걷는 길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약자의 이야기를, 그러나 약자가 이겨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아픔에 공감하지만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