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과거
오늘 아침은 큰맘 먹고 캄캄한 새벽 6시에 출발했다. 어제 일찍 잠들기도 했고 오늘 로그로뇨까지 27.9km를 걸어야 하니까 서둘렀다. 그런데 길 위에 아무도 없다. 길 위의 조개 표시를 따라가다가 여러 번 다른 길로 빠지기도 했다. 이제 길의 가로등이 끝났다. 캄캄한 시골길이다. 머리에 쓴 헤드랜턴을 처음으로 켰다. 스마트폰에 있는 플래시보다 멀리 비춘다. 그래도 헤드랜턴이 보여주는 좁은 반경의 길을 따라가자니 겁이 났다. ‘다시 알베르게로 천천히 돌아갈까?’,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오면 같이 갈까?’ 망설였다. 나는 무엇이 무서운가, 큰 개가 나타날까 봐? 개는 야행성이 아니다. 고양이? 오히려 고양이는 수줍음이 많아서 도망간다. 그럼 늑대? 멧돼지? 뱀? 박쥐? 산에 살기 때문에 나올 확률이 낮다. 그럼 사람인가? 설마 스페인 사람들이 순례자 돈을 뜯기 위해 새벽에 나올까, 그럴 리 없다. 나는 용기 내어 걸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걸어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주기도문 송을 부르며 한 발 한 발 씩씩하게 걸었다. 여전히 정적만이 흐른다.
누구 뒤따라오는 사람은 없을까 하며 뒤돌아본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평평한 지평선 까만 땅 위에 빨간빛이 조그맣게 물들어 있었다. (순례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라 해는 항상 등 뒤에 있다.) 지평선을 기준으로 반구 모양으로 오로라처럼 빨간 물이 드는 대기 위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나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풍경은 사진으로 담아지지 않았다. 오래 기억하려고 한참을 서서 눈으로 담았다. 다시 뒤돌아 앞으로 걸어가는데 헤드랜턴 빛이 약해진다. 새벽이 오고 있다. 다시 돌아보니 붉은빛은 층이 나누어져 하늘로 올라간다. 나는 그 빛을 등으로 맞으며 헤드랜턴 불을 끄고 걸었다. 내가 지나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아침 빛의 소리를 조심히 들으며 걸었다. 이제는 눈에 모든 것이 보인다. 옆에는 밀이 자라고 있다. 저 멀리 산솔 마을도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눈물이 흘렀다. 마치 뒤에 따라오는 풍경은 나의 과거 같았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과거, 남편을 만나 아들, 딸을 낳고 이만큼 살아온 나의 과거는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아침 빛처럼 아름다웠다. 그 과거가 있기에 나는 지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과거를 이겨냈기에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다. 과거가 나를 걸어가는 힘을 주고 있다. 최진영의 소설 <홈 스위트 홈>처럼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딸에게서 미래를 보고, 딸은 할머니에게서 과거를 본다.)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늘 내 뒤에 있다. 과거가 있기에 언제나 뒤돌아볼 수 있다. 현재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래는 저기서 수줍게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오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생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후회와 그리움만 가득했던 부모님과의 과거도 나는 이제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은 여전히 나의 뒤에 계신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용기 내어 걷지 않았으면 몰랐을 뜻밖의 선물이다.
나는 이날 사진으로 담아지지 않는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종이 위에 물과 물감을 칠하면 한참 후 물방울이 사라지고 흔적이 남는다. 그것은 물이 충만하게 놀다가 남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지금 내 느낌과 닮았다. 물감은 서로에게 다가가 섞이면서 다른 빛을 만든다. 색은 이웃한 색을 만나 다양해진다. 색은 감정이다. 하늘의 빛처럼 연결과 조화를 배우게 된다. 붉은 빛을 보고 내쉬는 나의 숨도 붉어진다. 물감은 숨소리까지 붉게 그려낸다. 물이 남긴 다채로운 흔적은 기억이 될 것이다.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추억이 될 것이다. 오늘의 느낌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배낭에 넣었다가 뺀 어반스케치용 작은 팔레트와 붓이 생각나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침 빛은 조용하게 빛나며 나에게 또 다른 예술을 소개한다.
저녁에는 홀로 알베르게 침대에 누워 부모님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옅은 그리움으로 실컷 울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더 아름다운 미래를 같이 만들자며 문자를 보냈다. 가족이 무척 보고 싶다.
붉은 포도밭과 푸른 올리브밭이 계속 이어진다. 한때 프랑스 와인이 경작하기가 좋지 않을 때 대체지를 찾은 곳이 이곳 북부 지역이다. 스페인은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라 리오하 지방에서 만든 리오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구 월 말에 리오하 와인 수확 축제가 열린다. 가을에는 로그로뇨 광장의 분수에서 와인이 나온다고 한다. 다음에는 가을에 순례길에 오고 싶다. 이시오스 양조장은 가우디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만들었다고 한다.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피에드라 다리를 만들면서 도시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한 해 삼백만 명이 찾는 관광도시이다. 성 마리아 라 레돈다 대성당 안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십자가의 길" 그림이 있다. 서북쪽에는 산티아고 레알 성당이, 동북쪽에 산 바르톨로메 성당이 둘러싸고 있다. 관광하기 좋은 대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