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를 건너서 숲으로,4월의 산티아고

바람 부는 날

by 홍지현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온다. 오전 11시, 12시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하니 차라리 판초 우의를 입고 떠나는 것이 덜 귀찮을 것 같다. 29.6km를 걷는 날이니 배낭 배달 서비스를 맡겼다. 다음 알베르게를 정해야 배달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알베르게에는 배달 서비스 봉투가 있다. 거기에 도착할 곳의 주소를 적고 자신의 연락처를 적은 후 3~5유로를 넣으면 배달 서비스 업체가 와서 다음 날 배낭을 배달해 준다.) 며칠 동안 예약하지 않고 발 닿는 곳을 숙소로 정하는 낭만을 즐겼다. 오늘은 숙소를 정했으니 늦게 도착해도 되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배낭 없이 걸으면 확실히 가뿐하다. (그런데 배낭이 코어 중심을 잡았는지 배낭 없이 걸으면 허리가 좀 아프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 어제 연박을 하고 충분히 쉬어서인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나는 매일 걷는다. 반면 사람들은 매일 일한다. 각자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올리브 나무도 알게 되고, 아몬드 나무도 알게 되고, 포도나무의 민낯도 알게 되었다. 올리브 나무는 무척 아름답다. 왜 그리스 신화가 생겼는지 이해가 된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해 보고 나만의 스토리를 상상해 본다. 아몬드도 돌로 깨서 먹어본다. 처음에는 원숭이가 먹었나 싶을 정도로 야무지게 먹고 남은 껍질을 보고 놀랐다. 눅눅한 아몬드 맛인데 맛있다. 포도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줄 알았다. 가을이 되면 이 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마트에 있는, 예쁘고 깨끗하게 포장된 식재료를 먹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나무에서 자라는지 궁금했다. 이 정보를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다. 아니다. 정말 몰라도 되는 것일까. 봄에는 이런 모습으로 씨앗을 품고 있다가 열정적인 바람을 맞고 지중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묵묵히 자란 포도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과정이 생략된 빠른 삶을 살고 있다. 알아야 하고 몰라야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만 알고 살면 되는가. 궁금해서 찾아보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온전한 이해의 단계에 들어갈 것 같다. 나는 걸으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사회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바닥에는 역대급으로 달팽이들이 많이 나와 있다. 한마디로 달팽이 주의보이다. 만약 모르고 달팽이를 밟는다면 그 찝찝한 죄책감을 어쩔 것이냐. 스틱도 쓰지 않고 바닥만 보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걷는다. 달팽이의 기다란 몸은 연두색과 황토색이 섞여 있다. 가지고 다니는 집은 생각보다 작다. 마치 우리의 배낭 같다. 몸을 길게 빼고 느리게 느리게 육지의 수분을 흡수하는 것일까. 논, 밭에 있는 달팽이라서 연두색이 보호색인가 보다. 색이 참 예쁘다. 나무에도 달팽이가 매달려있다. 아까 본 아이들보다는 조금 작다. 초목에 엄청 많은 달팽이가 숨어있는데 이번에는 몸 색이 나무색에 가깝다. 사방에 들꽃이 피어있다. 개망초, 서양민들레, 제비꽃, 붓꽃이 있다. 그동안 못 보던 하얀 동그란 꽃이 수줍게 피어있다. 어머나, 자세히 보니 달팽이들이다. 손톱보다도 작은 동그란 달팽이들이 마치 꽃인 양 줄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깜빡 속을 뻔했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동글동글 작은 달팽이 꽃이 피어 있다. 나는 동그란 모양이 “흥”이라는 글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난 흥이 넘치는, 우쿨렐레를 매달고 다닌 사람이 떠오른다.


예쁜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치고 이 층 창문에 수건을 걸어놓고 햇살이 차분하게 비추고 있는 봄의 마을을 바라본다.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알베르게 뒤에는 작은 바위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바람이 분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스페인은 나무 창문이 대부분이고 추위를 피하고자 덧댄 나무판자가 이중으로 되어 분리된다. 바람은 이중문을 자꾸 연다.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나는 바람이 만드는 그림자의 물결이 그의 이야기인 듯싶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수많은 바람을 만났다. 친절하게 포근한 바람, 거칠고 열정적인 바람, 외투 벗기기 놀이를 하는 바람, 그리움을 담고 있는 바람, 물보다 시원한 바람, 울음을 품은 바람, 나는 바람에도 성격이 있음을 배우고 있다. 파도에 씻긴 돌멩이처럼 나는 반들반들해졌다. 심장 박동 소리를 닮은 바람이 부는 날은 마음이 깨끗이 씻기고 마음도 동글동글해졌다. (나는 바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목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이번에는 바람이 나를 궁금해한다. 창문을 열어달라고 커튼을 흔드는 바람이 나에게 말한다. 흥이 들어온다. 나에게 필요한 감정의 얼굴이다.




로마 시대에 건설한 나헤라는 중세 부르고스와 팜플로나 사이의 중요한 도시였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다. '나헤라'는 이슬람어로 '바위 사이의 마을'이라는 뜻인 '나사라'에서 유래했다. 삼십여 명의 나바라 왕실 가족이 묻혀 있는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은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1세기에는 중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장려되면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산타 마리아 데 레알 수도원은 산초 3세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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