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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Jan 13. 2022

검사받지 않아도 되는 독서감상문

소피 카르캥의 "글 쓰는 딸들"을 읽고




뒤라스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연인>과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에 드러나 있는 그녀의 가족사는 평범하지 않다. 엄마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아편과 도박, 폭력으로 찌들인 큰 오빠, 젊은 나이에 죽는 작은 오빠, 베트남 식민지 공무원에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고 남편까지 잃자 가난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엄마, 그들 속에서 뒤라스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공간을 만들었다. 나중에 가족이야기를 쓰면서 감정을 소거했다. 두 책에서 나오지 않는 뒤라스의 유년 시절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애잔해서 책을 덮었다. 이 아픔을 견디면서 글을 쓴다고 치유가 될까 싶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 오로지 사랑을 갈구했다. 유년 시절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은 커다란 슬픔 구멍과도 같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도나디외는 남편의 빈자리를 큰 아들에게 찾지만 채워지지 않자 딸에게 의지를 하는 듯 하지만 그 모습은 역할 전도의 모습이다. 아이는 더욱 불안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엄마는 모순이자 배반이다. 사랑과 증오와 부당함이 얽혀 있는 그물이다.


" 이별과 죽음 앞에서 이따금 달아나버리는 말들, 그 언어들을 되찾아 글로 쓰게 되리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어머니 프랑수와즈는 엄격했다.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상류층 귀부인으로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한 그녀는 딸들도 통제하였다. 수영도 자전거도 배우지 못하게 하고 육체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했다. 집에서는 모든 문을 열어놓고 공부를 해야했다. 당시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집불통 자의식이 강한 보부아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거부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고 명석한 그녀는 스물한 살에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교수자격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수석은 그녀의 진정한 친구인 샤르트르이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것을 철학에서 찾는다. 자신을 가두기에 바쁜 어머니와 멀어지면서 권위의 대항으로 유년을 청산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는 회한에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 역시 한 시대의 희생자임을 알게 된다.


" 우리는 어디에도,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았다. 장소, 국가, 계층, 직업, 세대, 그 무엇으로든 우리를 분류할 수 없었다. 우리의 진실을 다른 데 있었다."






콜레트의 어머니 시드는 폭력적인 전남편과 헤어지고 싶어하던 중 잘생기고 다정한 콜레트 대위와 애정을 나누며 아들 아실을 낳는다. 전남편은 뇌졸증으로 죽는다. 대위와 재혼하여 딸 콜레트를 낳는다. 어머니는 콜레트에게 사물과 세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글쓰기란 두 존재가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과 바라보고 감탄하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콜레트는 관찰하라는 명령에 지쳐간다. 사춘기를 맞은 딸은 더더욱 어머니에게 벗어나려는 생살을 베어내는 고통을 겪는다. 어머니 시드는 표면을 꿰뚫어 노란 수선화의 마음을 읽어내고 애벌레들의 왈츠를 해석하고 닫힌 문 너머를 투시하는 시선을 가졌다. 신과도 같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져 지참금이 없어진 콜레트는 윌리와 결혼을 하여 독립을 꿈꾸었으나 본인의 글을 낚아채는 비정한 남편과 행복할 수 없었다. 콜레트는 미시와 동성연애를 한다.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콜레트의 이런 다양한 일의 시도는 독립을 향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오로지 대호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콜레트의 글쓰기는 어머니와 딸의 융합된 사랑을 다시 글쓰기를 통해 꽃피우려고 한 문학적 신화가 된다. 콜레트는 왜 어머니를 저버린 것일까 후회를 하며 죽음을 향한 길목에서 다시 어머니 따뜻한 품속으로 가는 편안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당신이 시인으로서 포착했다가 놓아버린 것을 계속 추적할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콜레트는 어머니가 넘겨준 것을 글로 써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때는 그림책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그림책 읽어주기가 붐이었고 좋은 그림책이 많았다. 엄마와 나의 틈을 그림책이 채운다. 나에게 읽어주지 않은 그림책을 엄마는 나의 아이들에게 읽어주셨다. 갑자기 생각 난 그림책 "천둥케이크." 제법 글밥도 많은 그림책이었다. 아이들은 이 책을 좋아해서 읽어달라고 조른다. 엄마는 내가 피곤할까 대신 읽어주신다. 엄마의 목소리는 무슨 색깔이었나? 대문 밖에서도 항상 엄마 목소리가 들렸고 엄마랑 전화기로 통화할 때에는 10센티 띄어서 말했다. 그런 큰 목소리는 아니다. 조금 부피를 줄인 목소리로 무척 진지하게 리듬감 없이 읽는다. 그래도 아이들의 눈은 빛난다. 다 읽으시고 너무 재미있다며 본인이 더 즐거워하신다. 엄마도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셨다. 엄마는 중학교만 나오셨다. 그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은 지금의 대학교나 마찬가지이고 그 시절은 여자아이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책을 가까이 하시는 습관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 중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아빠 오시면 물어보라는 답을 자주 듣고 어느 순간부터는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는 그림책 내용을 이야기하신다. "그러니까 이 할머니가 손녀가 천둥을 무서워하니까 지혜를 쓴 거지?" " 이 방법 괜찮네" " 우리도 케이크 만들어볼까?" 엄마는 쾌활하고 영리하신 분이었다. 비록 고등 교육이라는 정규 교육은 받지 않으셨지만 엄마 말은 뭐든지 맞다는 느낌을 받고 살았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그런 엄마는 공부를 시키지 않고 외삼촌만 공부를 시키셨다. 할머니를 원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가끔 내가 공부했다면 국회의원이 됐을 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조금 아쉬운 미소를 지으셨다. 그 점이 나랑 다르다. 나는 엄마 원망을 많이 하고 살았다. 아들과 차별한다고 미워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자랑스런 딸이 되어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 글 쓰는 딸들" 책을 읽으면서 뒤라스가 느낀 불안과 외로움, 보부아르가 느낀 절망과 회한, 콜레트가 느낀 슬픔과 반항심 모두 공감했다. 그녀들도 엄마에게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사랑을 받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마지막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느낀다. 모두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 모습이었다. 나도 너무나 정서적으로 멀어진 엄마를 보면서 한편으로 용서를 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보면서 늘 괴로웠다. 강물처럼 흘렀던 우리의 인연이 또다시 그림책이라는 추억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제쯤 이 감정을 말끔히 털어낼 수 있을까? 엄마를 허망하게 보내고 3년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글을 썼다. 꿈에서 나온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알았다. 보부아르처럼 사회가 만든 엄마의 모습을. 우리가 여자라는 울타리안에서 서로 오해를 낳고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은 정말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회가 만든 시스템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더욱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모습과 목소리가 생생해지고 다시 그녀들의 글이 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추억 안에는 아직도 그 시절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는 있다. 눈물은 아직도 메마르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직도 글을 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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