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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Apr 06. 2022

검사받지 않아도 되는 어른의 독서감상문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그림책을 읽고





무척 좋아했던 책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가지고 그림책 모임을 했다. 한 장씩 번갈아 가면서 읽은 후 각자 질문을 냈다. "엄마는 그동안 어디에 간 것일까?" 재미있는 질문이 나왔다. 사실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서면 갈 곳이 없다. 대부분의 딸들은 친정집은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가지 않는다. 친구들도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는데 느닷없이 방문하기도 좀 그렇다. 한 바퀴 동네를 돌거나 카페에 가거나 쇼핑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어둑어둑해지면 또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집에 들어간다. 한 분이 우스개 소리로 집에서 나올 때는 "나 나간다 " 하지 말고 " 나 갔다 올게 "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가출은 쉽지 않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왜 이리 힘들까.



우선 책 속의 엄마의 가출은 의미심장한 것 같다. 그녀는 과감하게 집을 나가 며칠동안 집안이 엉망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동안 여행을 간 것인지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스스로 수리한다. 엄마는 그동안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혼자 드라이브하기는 재미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혼자라는 사실을 차 속에 숨길 수도 있고 나만의 공간이 되어 편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힘든 이유는 남의 시선에 스스로 자신을 가둔 것이 아닌가 싶다.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여행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가 더 큰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집안일도 식구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여자들이 스스로 다 해 놓고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는 면도 있다. 아이들에게도 중요한 공부보다 더 중요한 집안일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 빠르다는 이유, 식구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유, 싸우지 않고 내가 하는 것이 맘 편하다는 이유 모두 스스로가 만든 덫이다. 엄마가 돌아오자 아빠, 두 아들은 무릎을 꿇고 싹싹 빈다. 이 장면이 전에는 통쾌했는데 지금은 좀 불편했다. 젠더 싸움이 이기고 지는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다. 서로 이해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그동안 "금기"라는 소재로 글을 쓰고 싶었다. 나에게 금기된 일들은 많았다. 여자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가장 많았고 학생, 젊은 사람, 엄마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타인에 의해 나의 한계를 짓는 것이었다. 금기된 모든 일을 폭로하는 것은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습된 나는 스스로를 금기시키는 부분도 많았다. 최근에는 나이로 스스로 제한을 두는 행동을 많이 한다.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고민과 의심이 많아졌다. 금기가 일상이 된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무기력한 억울함이라는 씨앗이 있다. 억울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몰라 만만한 상대를 만나면 비슷한 상황으로 누르기도 하고 편한 상대를 만나면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참고 덮었다.



요즘 날이 좋아 퇴근할 때 학원 창문을 열고 나간다. 창문에는 화분이 가득 있다. 출근해보면 모두 달빛과 새벽향과 아침바람을 받아 하룻밤 사이 몰라보게 예뻐져 있다. 새순이 핑크빛으로 올라온 싹을 본다. 나의 억울한 싹이 이렇게 예쁜 색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마지막 여행에서 엄마에게 용서의 말을 전했다. 내가 주어다. 내가 엄마를 용서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억울한 싹은 모질고 무뚝뚝하고 건조하게 전했다. 여전히 오빠만을 편애하는 엄마에게 지쳐가고 둘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은 나는 여행길에서 돌아와보니, 지금 3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부드러운 싹으로 변함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말을 꺼낸 자체가 벌써 나는 엄마를 용서한 것이고 엄마가 묵묵히 듣고만 있는 모습 또한 사과를 한 것이다. 그동안 엄마는 나에게 "사랑한다 딸" 이라는 신호를 수없이 보냈다. 내가 받지 않았을 뿐이다. 갑자기 딸이라는 단어에 집착한 엄마였다. 내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간과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 우린 엇갈렸다. 이제 나는 더욱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억울함은 어떻게 사라지게 된 것일까. 누가 나의 마음을 다독였을까.



나는 예민하지만 예민함을 표현하지 않고 살았다. 표현하는 것도 금기였기 때문이다. 무던하게 시키는 일을 토달지 않고 하는 행동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칭찬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서서히 예민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독립을 했고, 나와 닮은 딸을 보며 거울의 나를 느끼고,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가족과 친구가 늘 곁에 있다. 글이라는 매체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옹졸함에 내가 스스로 놀라는 자각은 그 무엇보다도 큰 울림이었다. 이러다 내가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모두 충분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해 못해도 상관없다. 귀기울여 주었으니. 엄마는 너를 위해서 용서해라 짧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의 대화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같은 시간으로 향하는 중이었나보다. 아름답고 젊은 엄마 또한 어떻게 억울함을 풀어야 하는지 몰라 배운 대로 살았고 나를 통해 엄마를 보는 시간을 보내며 다시 나의 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늘 억울하다고 징징대는 나를 보며 아파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애달파서 아프다. 부드러운 엄마의 품이 유독 그리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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