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

by 홍지현



어린 시절 본 <톰 소여의 모험> 속 오두막집을 동경했다. 나도 저기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에 만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모도 없이 외롭게 혼자 사는 허크의 오두막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자 언제든지 놀러 갈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인 듯싶었다. 그곳은 해야 할 일이 있지도 않고 간섭이나 통제가 없는 곳이다. 커다란 나무 위에 누가 집을 지었는지 분명 위험해 보이고 화려하지 않은 곳,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인 그곳이 많은 사람들의 로망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향과 같은 향수와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숨는 은밀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나무 위의 집은 먼 곳에서도 눈에 띈다. 시점을 달리하여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먼 곳에 누가 있는지 보이는 전지적 시점의 장소이다. 계절마다 다른 바람의 소리를 듣고 진정한 땀을 흘릴 수 있고 이름 모를 산새와 다람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그곳은 한 번도 그런 곳에서 자라지 못한 도시의 아이였던 내가 유독 동경하는 듯하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서울에서 보냈다. 그 집에서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았다. 나의 집은 큰 집이어서 명절에는 친척들이 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이름으로 딸, 손녀, 조카, 학생이었다. “몇 학년이지? 공부는 잘하니? 키 많이 컸네” 질문을 받고 관심을 끄는 존재였다. 우리 집의 수저와 젓가락이 몇 개인지 아는 친척과 이웃이 주위에 있었다. 하나의 단단한 뿌리는 나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결혼을 하고 나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부산으로 다시 경기도로,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나는 친척집을 찾아간다. 나의 이름은 희미해지고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역할이 다양해졌다. 아내, 엄마, 며느리, 숙모, 고모, 학부모, 소비자이다. 이렇게 주변적이고 불안정한 공간에 놓여 있다. 나는 왜 이사를 다녔나?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범위 안에서, 또는 직장의 거처에 따라,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자꾸 보금자리를 바꾸었다. 집을 보러 다니고 결정하고 전기, 전화, 도시가스를 끊고 다시 연결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별하고 다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익숙한 사무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나’처럼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끝까지 찾아내려고 하는 집착성이 사라졌다. ‘나’가 학교를 옮겨 다니듯 나도 집을 옮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식구들 모두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엄마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시고 자식들도 덩달아 돌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한다. 마음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어릴 적 서울의 모습이 사라진다. 정착할 거라는 기대와 욕심을 버리고 나는 어느새 경계 밖으로 나간 사람이 되었다.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영화 속의 아빠처럼 나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묶어 줄 뿌리는 있는 것인가? 2년마다 내가 뿌린 민들레 홀씨는 여러 곳에서 작은 뿌리를 내리고 나에게 인사를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이었던 나는 별 모양의 잔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제 나에게 추억이 찾아온다. 과거의 삶 속에서 지혜를 찾아내는 힘이 생기고 과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들의 변하지 않는 몸짓을 나의 몸에 새기고 있다. 나의 희미해진 이름은 튼튼한 시간을 토대로 이렇게 되돌아와서 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공간에 나는 출근을 한다. 처음으로 독립한 나만의 장소이다. 여기에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는 소상공인, 논술 선생님이다. 이제는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생산자가 되어 나의 새로운 꿈을 실현 중이다. 초록 식물에 물을 주고, 공간에 의미를 담은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의 글을 전시하며 오늘도 나의 공간에 행복을 가득 담고 있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속에 구절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처럼 나만의 공간인 이곳이 바로 어린 시절 동경하던 톰의 오두막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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