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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Aug 08. 2022

너에게도 흐르는 유럽의 피

아빠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긴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여러 불편을 가지고 살았단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머리를 부딪치곤 했지. 탈모도 이 영향일 거 같기도 하다. 한 번은 버스에서 내릴 때 머리를 크게 부딪쳐서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아팠던지 뒷문에서 내려 인도 위에 한참을 누워 있었단다. 그때 버스에는 여고생들이 수십 명이 타고 있었는데 글쎄 버스 기사님이 출발을 하질 않는 거야. 아빠는 너무 민망해서 버스가 가고 나면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기사님이 굳이 앞문을 열고 괜찮냐고 물어보시더구나. 그때의 민망함이란.


사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말이다, 몸이 길면 여러 가지 불편이 많단다. 우선 아빠에게 맞는 의자와 책상에 앉아본 적이 없어. 늘 모든 의자는 작았고, 덕분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앉아야만 했지. 의자를 높이면 반대로 책상이 낮아지고, 책상에 맞추면 의자가 낮아지고!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허벅지는 늘 의자에서 떠있었고, 엉덩이 뼈의 뾰족한 부분으로 몸을 지탱해야 했단다. 지금도 아빠는 몸에 맞는 의자에 앉는 만족감을 느껴보고 싶다. 자동차 시트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 오래 운전하면 힘들단다. 외제차를 타면 나으려나? (엄마 보고 있나?) 의자만 그렇겠니, 허리에 맞추면 다리는 짧고, 다리에 맞추면 허리가 커서 아빠의 바지는 언제나 어설펐고, 팔 소매는 늘 짧았단다. 그런 아빠가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 곳은 유럽이었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였는데 옷가게에 들어가니 글쎄, 아빠 체형에 딱 맞는 옷들만 걸려 있는 거 아니겠니? 옷을 입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지. 게다가 버스며 지하철이며 머리를 부딪칠 일도 없었고, 앉는 의자마다 높이가 적당했단다. 엉덩이가 착 들어맞는 그 만족감과 함께 아빠는 유럽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생각해보니 아빠는 전형적인 유럽인 체형이었던 셈이야. 큰 키와 긴 팔과 다리, 그리고 양옆으로 굉장히 좁고, 앞뒤로 긴 두상까지. 게다가 햇볕에 쬐면 나타나는 피부 반응부터도 유럽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가까운 조상 중에서 유럽 출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내심 추측만 했단다.

 

우스갯소리지만, 사실 이것이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야. 세종실록에 따르면 1418년 세종대왕 즉위식에 회회 송축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지금의 무슬림들이 이슬람 경전인 낭송과 기도를 통해 세종대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행사였다고 해. 그때만 해도 조선에서 큰 군락을 이루고 살던 무슬림들은 1427년에 세종대왕께서 무슬림 특유의 종교의식과 복장을 금지하면서 빠르게 조선인으로 동화되어 갔던 거지.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일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 조금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이야. 그 외에도 고려 시대에 귀화한 터키계 장순룡의 경우 덕수 장 씨의 시조가 되어서 문과 급제자를 14명이나 배출했다고 하지. 신라시대 처용가의 처용이 무슬림이라는 것도 유력한 설이라고 해. 그러니 뭐 유럽인 피가 흐른다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편한 일이기도 하지만 또 경제적으로 불리한 일이기도 해. 대량 생산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평균에 가까울수록 가격경쟁력이 올라가게 되지. 그래서 더 저렴해져. 반대로 남들과 다른 제품, 수요가 더 적은 제품으로 갈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단다. 그래서 아빠처럼 경제적인 따릉이는 안장이 낮아서 오래 탈 수가 없고, 높이가 맞는 자전거는 해외에서 수입을 해야 하는 사람은 같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몇 배로 비싸지는 거지. 그뿐이겠니. 의자나 소파, 옷도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가 없으니 남들보다 더 비싼 돈을 들여서 해외 브랜드의 제품을 구입해야 된다. 그러니 항상 뭔가 조금 애매한 불편을 겪게 되는 거야.

 

아빠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다. 너도 알겠지만 지난 주말에 병원에 가서 아빠와 네가 영상 통화를 했잖니.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너의 신체 사이즈를 정밀하게 측정하여 주셨어. 그런데 말이야 너의 신체 사이즈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어. 그러니까 너에게도 유럽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는 말이야. 너의 두상을 봤는데... 폭이 굉장히 좁고, 앞뒤로 엄청나게 긴, 전형적인 유럽인의 두상이었어. 엄마 말로는 아빠의 거푸집이 너에게도 사용된 것 같다고 하는구나. 게다가 짧아서 걱정이었던 허벅지도 엄청나게 길어졌고, 아빠를 쏙 빼닮은 옆모습까지. 엄마와 함께 한참을 웃었더랬다. 네가 딸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너무 많이는 크지 말거라. 아빠는 옛날 사람이라 국산품 장려운동 시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에헴.


장난처럼 말했지만 남들과 다른 것은 사실 좋은 일이야. 다른 덕분에 나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덕분에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지.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 같아 보이는 사람들 역시 사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말이야.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존중할 수도 있는 일이야. 사실 세상엔 실제로 똑같은 사람은 없거든. 물론 가끔 힘든 순간도 있을 거야. 불편한 것보다는 나의 불편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특히 그렇지. 그럴 때는 조금 크게 생각하자. 이런 아빠도 유럽에 가면 평균 신체 사이즈를 가진 사람이 되듯, 네가 속한 사회를 조금 더 크게 그려보면, 결국 모두 같은 사람이니까 말이야. 앞뒤로 긴 두상은 긴 머리카락으로 어떻게든 가려보고.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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