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일 차 : 아기를 키우며 느끼는 소소한 감정들
요즘은 정신이 없다. 육아 일기를 틈틈이 쓰고 싶은데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나중에 꼭 기억하고 싶은 몇 가지 소소한 감정들을 기록하는 식으로 육아일기를 대체하고자 한다.
1. 100일의 기적은 100일의 기절이었다.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통잠을 자기 시작하는 게 100일 즈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들이 밤새 통잠을 자게 되면 엄마들이 새벽 수유를 안 해도 되니 신체적으로 피로가 덜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아기는 100일 즈음해서 소위 말하는 원더윅스를 겪으면서 짜증과 울음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100일의 기적 대신 100일의 기절에 당첨되었다. 게다가 통잠도 하루 이틀 정도 자긴 했으나 엄마가 쪽쪽이를 물려 연장을 해주어야 했기에 그다지 기적스럽지도 않았다.
2. 원더윅스는 무섭다
아이들은 매일 무럭무럭 자라지만 그 와중에도 급격하게 성장하는 급성장기가 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소위 4개월 차에 오는 원더윅스가 가장 강력한 녀석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리고 우리 아기는 100일 즈음해서 4개월 원더윅스에 당첨이 되었다. 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이 늘어나고, 자지러지게 울면서 짜증을 내었다. 게다가 안아서 달래는 와중에도 울어재끼니까 처음에는 정말 멘붕이었다. 이런 시간이 한 이주 넘게 계속되다 보니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되어서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원더윅스나 재접근기 같이 아이들이 특정 시기에 여러 이유로 특정한 행동 패턴을 보이는 경향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꽤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런 용어들은 아주 단편적으로 해석되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다양한 특성을 담는 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꽤나 장점이라 여겼던 부분은 부모의 멘탈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아이가 왜 이러지? 하는 혼돈에서 아, 원더윅스겠구나 하는 식으로 마음 관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특별한 것을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 사실 모르는 게 더 약이긴 하다.
3. 옹알이에 눈물이 났다.
아이가 120일 즈음되니 얼굴 표정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고 옹알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울어재끼는 것이 아이가 만드는 소리의 전부였는데, 꽤나 사람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생명체에서 인간이라는 범주로 확 들어온 느낌이랄까. 이 작은 아이에게서 나오는 사람 같은 소리가, 아이와 나의 거리를 만 분의 일 정도로 단축시켰고 나는 그 순간 아이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의미를 알 수 없는 옹알이였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이 아이가 자라서 어린이집을 가고 학교를 가서 겪은 일들을 조잘조잘 아빠에게 털어놓는 그 순간이 펼쳐졌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존재감도 커졌다. 눈에 보아야 아이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울어야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종알종알 옹알이를 하게 되니 이제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아이가 집에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와이프와 둘만 있던 집이 셋이 되었다는 것이 더 와닿는 순간이었고, 집이 보다 활기차고 풍성한 곳이 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4. 아이의 표정에서 영화 한 편을 본다.
아이는 안아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일상인양, 아빠만 보면 두 팔을 벌리고 발을 바둥거리면서 안아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재미있다. 우선 웃는다. 웃으면 엄마 아빠가 좋아한다는 것을 학습한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는 안기고 싶다는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아빠가 반응하지 않으면 아빠를 재촉하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넘어간다. 가만히 보기만 하면 슬슬 짜증이 나는 표정으로 넘어간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무언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아마도 아빠가 안아주면 난 이 정도로 감격스러울 거야를 표현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결국 짜증과 울음으로 귀결된다.
짧은 순간 아이의 표정과 감정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동시에 내 안에도 똑같이 수많은 감정의 변화가 요동친다. 어떤 영화의 감정 소용돌이 보다도 훨씬 감동스럽고 드라마틱하다. 아이의 목과 엉덩이를 받치고 어깨로 안아 올리는 순간 슬쩍 보이는 아이의 얼굴 표정은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나를 원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아이가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5. 아빠의 디너쇼
보통 아기는 7시 반에 저녁을 먹고, 8시에 침대로 간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감각기관이 발달해서 그런가 밥을 먹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배가 어느 정도 차기 시작하면 밥을 먹는 것보다 젖병을 입에 물고 놀기 때문이다. 낮에는 분유를 적게 먹거나 오래 먹어도 크게 상관은 없는데 저녁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오래 먹다 보면 수면패턴이 깨질 수도 있고, 그렇다고 조금만 먹이자니 새벽에 배고파서 금세 깨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빠의 디너쇼.
아빠가 춤추고 노래를 불러주면 아이들은 티브이를 보는 것처럼 아빠에게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서 무의식 중에 분유를 꿀떡꿀떡 먹게 된다. 아빠의 춤과 노래가 자기 전에 감상하기에는 너무 자극적인 것은 단점이지만, 어쨌든 분유를 조금이라도 많이 먹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거의 매일 디너쇼를 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몸치였던 아빠의 댄스가 조금씩 늘고 있다. 가끔 거실 CCTV로 돌려보곤 하는데 손과 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비밀.
6. 아기의 호불호
아기들도 호불호가 명확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 아기는 우선 물에 들어가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데 옷을 벗는 것을 좋아한다. 옷만 벗으면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그런데 반대로 옷을 입히는 것은 죽을 듯이 싫어한다. 그리고 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한다. 머리 만지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목욕을 시킬 때마다 재밌는 상황이 연출된다.
우선 목욕을 위해 옷을 벗기면 아이는 난리가 난다. 얼굴 표정부터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안고 아기 욕조로 가서 머리를 감기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갑자기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무시하고 후다닥 머리를 감기고 나서 욕조에 몸을 넣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몸을 씻기고 나서 수건을 물기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히면 다시 전쟁이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운다. 목욕 한 번을 하는데 울고 웃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옆집에는 우리 아기보다 4개월 정도 빠른 아이가 있다. 우리 아기가 2개월쯤 되었을 때 집을 나서다가 옆집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아기의 울음소리에 비해서 너무 크고 강력한 울음이라 놀랐었다. 당시 나는 역시 남자 아기들은 다르구나 정도로 생각했고, 우리 아기는 순해서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4개월 차에 들어선 우리 집 아기의 울음소리는 이미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저 깊은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소리는 하현우의 샤우팅 급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육아는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