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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Aug 04. 2021

엄마에게 쓰는 편지

삐쭉거림

엄마, 내 안에는 수 백개의 가시가 있어요. 가시들은 참으로 날카로워서 마치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칼 같죠. 그 가시를 품고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에요. 잔뜩 얽힌 가시 덩굴은 잠깐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났죠. 물론 그 가시들은 나를 보호하는데 쓰이기도 했어요. 작은 뒤틀림에도 쉽게 상대를 향해 가시를 휘둘렀죠.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 가시에 찔리는 것은 언제나 나였어요.


항상 피 흘리면서 사는 기분이었어요. 이유도 몰랐죠. 그저 내 안에 흐르는 피를 어떨 때는 술처럼 마시고, 어떨 때는 장마철 넘치는 빗물처럼 퍼내기도 했어요. 잠깐이지만 피가 멎고 상처가 가라앉을 때에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윽고 다시 피를 흘리면 무거운 좌절감에 눌리기도 했죠.


견딜만한 고통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상처가 찾아왔을 때, 고통 속에서 문득 그런 궁금증이 생겼죠. 이 가시는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내 안에서 자라게 된 것인지. 늘 상처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만 하던 제가 처음으로 이 상처 너머에 눈을 돌리게 된 순간이라고 할까요.

 

퇴근길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집 근처에 있는 카페였어요. 종이와 연필 하나를 들고, 마치 수험생처럼 정신없이 나의 상처에 대해서 적어나갔죠.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가시가  어떻게 나를 찔렀는지, 그 가시는 또 어떻게 생겼는지, 가시가 자란 줄기를 하나씩 더듬으면서 그렇게 과거로 과거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답니다.


다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하나씩 더듬는 것은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늘 고통받는 환자에서 상처를 연구하는 학자가 된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죠. 내 안을 살펴본다는 것은 놀라웠어요. 내 마음의 살점 곳곳에 파묻혀 있는 가시들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마치 차트를 휘날리는 의사처럼 정신없이 단어들을 적어 내려 갔죠.


그 순간만큼은 정말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프지 않았어요. 내 안에 있던 가시들이 그저 지나온 발자국처럼 느껴졌죠. 그 가시들이 자라났던 이유도, 그 가시가 상처를 냈던 이유도, 그리고 바보 같이 피만 흘리고 있던 이유도 그냥 이해가 됐어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인데, 앞 뒤 사정을 듣고 나면 이해가 되는 것처럼, 내 상처들도 이해가 됐어요.  


처음이었죠. 원인과 결과로 바라본 상처에는 감정이 개입하지 않았어요. 억울함과 분노, 화, 외로움, 두려움 들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처음으로 감정에서 벗어나니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복잡하게만 보이던 가시덩굴이 시작된 곳이었죠. 뒤죽박죽 엉켜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디에선가부터 시작하고 있었어요.


손으로 가시들을 더듬으며 쫓아가면서 저는 그 가시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죠. 처음 나를 아프게 했던 가시는 사실 내 것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가시였죠.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어요. 불과 어제 겪은 상처보다 더 컸고 여전히 많은 피가 흐고 있었죠. 러자 또 다른 상처가 떠올랐어요. 그렇게 한참을 오래되었지만 결코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찾아다녔죠.


카페를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한 편으로는 몹시 무겁기도 했죠. 원망 때문이냐고요? 전혀요. 원망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기분이었어요. 엄마, 아빠 안에도 이 많은 가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 상처들을 찾아서 보듬어 주고 싶다. 그런 마음뿐이었죠. 


그 뒤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감정보다 이성이 아주 약간 앞서게 됐죠,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아주 조금, 왜 아픈지를 알게 되니 납득이 되었죠. 그냥 왜 아픈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병이 조금 나은 것 같은 기분 있잖아요. 근데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또 하나는 사람을 바라보는 자세였죠.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상처를 보게 되었어요. 내가 그랬듯 남을 향해 휘두르는 날카로운 가시들은 사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깊게 박힌 덩굴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죠. 그 덩굴도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그 사람에게 자리 잡은 것일 테죠. 그 들의 상처를 치료해줄 그릇은 안되지만 적어도 조금은 이해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런데 정작 엄마는 이런 저의 변화를 못 마땅해하시는 거 같아요. 저의 어설픈 학자 노릇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해요.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모든 것은 다 부모의 잘못처럼 표현되곤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꼭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사실 이 몸 전체가 다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 걸요. 그래도 표현을 조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속의 가시들의 많은 부분은 사실 저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랐죠. 그걸 온전히 부모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저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죠. 그러면서 조금은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마치 엄마의 가시들도 엄마의 잘못이 아니듯 말이에요. 쩌면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표현이기도 했죠.


그냥 저는 이 가시들이 수백, 수천 년을 지나면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저의 아이에게도 이어져 내려가겠죠. 강 가의 작은 돌들은 제 나름대로 물살을 이겨내지만 결국 강이 흘러가는 것 막을 수는 없듯이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걸 지켜보는 것은 꽤 슬픈 일일 것 같아요.


섬세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가시가 많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대신 작은 가시에 찔린 아픔도 크게, 오래 동안 느낀다는 것이겠죠. 100세를 산다는 요즘, 저는 조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남들보다 조금 섬세해서 별 것 아닌 가시덩굴들에게 붙잡혀 꽤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것 같긴 하네요.


물려받은 게 가시뿐이겠어요? 가시 덩굴은 제 마음의 숲에서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죠. 비록 지금은 이게 전부인 양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지만, 저도 알고 있어요. 저에게는 크고 푸르는 나무도 많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가 저를 바라보는 눈에 비친 탐스럽게 반짝이는 열매들도요. 언젠가 자유롭게 그 숲을 뛰어다니는 날이 올거에요.  


가끔 이렇게 편지드릴게요.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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