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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Nov 04. 2021

순댓국 한 그릇

회사에 들어와서 한 동안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작고 소중한 월급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도 누리게 되었다. 혼자 살던 시절이라 주로 대부분의 식사는 회사에서 해결을 했고, 주말에는 슬리퍼 신고 나와서 집 근처 국밥집까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순댓국 한 그릇 하는 것으로 하루 식사를 시작하고는 했다. 그마저 당시 집 근처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드물어서 늘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도 벌써 꽤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었는데,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평소 같은 주말 오전, 평소 같은 순댓국집인데, 그 순간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순댓국 한 그릇을 뜨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은 그 뒤로 종종 식사를 할 때 찾아오곤 했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무섭고 외롭고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말로 표현하기는 굉장히 힘든.


몇 번 그런 기분을 겪고 나니 나름 그 기분에는 익숙해졌지만, 정확하게 그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는 선명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심리 상담을 하는 중간에 그런 이야기가 덜컥 나왔고, 핵심을 정확하게 짚지 못하고 빙글빙글 맴도는 나의 장황한 설명에 상담 선생님께서 명쾌하게 답변을 내려주셨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겪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내가 느낀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우선 순댓국의 가격이 거슬렸다. 한 그릇에 7천 원. 그 7천 원의 순댓국을 내가 먹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월급에 비하면 그리 비싼 음식은 아니었음에도 순댓국 한 숟갈을 입에 넣는 것이 너무도 무겁고 두렵고 나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 음식을 스스로 번 월급으로 사 먹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버거운 느낌이 든 셈이다.


그다음으로 든 기분은 외로움이었다. 고독했다. 순댓국과 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땐 그랬다. 작은 식당의 테이블이 망망대해의 작은 섬과 같이 느껴졌다. 이런 기분들은 그 뒤로도 종종 나를 찾아왔다. 비싸지도 않은 음식의 가격이 비싸게 느껴지고, 이것을 먹는 행위가 위태롭게 느껴지면서, 외롭고 고독한 기분으로 이어지는 패턴이었다. 사실 글로 설명하려니 어떻게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이걸로도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그건 책임감 아닐까요?라고 묻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순간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그것은 이제, 내 인생을 나 스스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였다. 누구도 나를 책임져주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순댓국 한 그릇에서 느꼈던 것이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위태롭고, 외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삶의 책임감이 무겁고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생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정해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그저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고 도리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살았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삶이었으나, 학생이고, 회사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생명체로써 생존을 위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키우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즘 가끔 한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 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전기와 인터넷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유식한 척 하지만 실상은 무지한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다. 들판에 내 던져져도 풀뿌리 캐 먹으며 제 한 몸을 건사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생존일 텐데, 나는 그런 부분에서는 정말 너무도 경험이 일천하다. 어쩌면 그래서 복잡하고 치열한 회사 회의실에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하고 단순한 순댓국 뚝배기 한 그릇에서 생존의 무거움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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