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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Mar 11. 2022

해바라기와 크리스천 부디스트

천주교와 불교의 콜라보레이션 

집에 그림을 몇 점 걸어둘 요량으로 온라인 사이트 여러 곳에서 검색을 했다. 그때마다 나오는 것은 어김없이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해바라기 그림을 걸면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설마 싶어서 인사동으로 향했는데, 거기서도 가게 전체가 해바라기 그림으로 뒤덮인 곳을 몇 군데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 인사동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그림은 해바라기 그림이 아닌가 싶다. 해바라기 그림을 집에 걸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빈 손으로 돌아왔는데, 그러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을 걸고 싶어서 시작된 검색이었는데,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뭐라도 걸려 있는 집이 있어 보여서 시작한 검색이었는데, 마음이 혹하는 것이었다. 걸면 돈이 들어온다니 나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닌가. 해바라기 그림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걸어놓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이 없으니 하나 사볼까 싶기도 했다. 사실 지갑에 넣어두고 다니는 부적과 뭣이 다른가. 그러고 보니 무늬만 천주교 신자인 나는 집에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십자가상과 성모상을 두었는데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돈을 바라고 해바라기 그림을 거는 이유가 풍수지리에 있건, 혹은 샤머니즘과 같은 종교적 성격이건, 중요한 것은 복을 비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기복적인 요소가 다분한 행위다. 실제 그것으로 인해서 돈이 들어오는 지를 차치하고, 어쨌든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그런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효과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해바라기 그림을 거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해바라기 그림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요즘 복을 빈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회의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종교적인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소위 말하는 냉담자의 위치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바꾸거나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런 종교적 사고를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어린 시절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내 생애에서 바꾸기에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에게 종교란 인과응보의 종교였다.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 신이란 그런 공평무사한 존재로써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 그러니까 매우 일차원적인 사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종교를 이 이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매우 불행하게도 나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무서운 성격의 아이였다. 그래서 징벌적 종교관을 한동안 안고 살았고, 이는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나에게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부담을 주었다. 


더불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신은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항상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기도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이런 것들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졌으나, 여전히 중요한 순간에는 늘 성당을 찾고 기도를 하곤 했다. 간절히 원하면 신은 들어준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이런 기복적인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다. 


어린 시절 형성된 종교관과 또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자아는 늘 충돌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신은 늘 나를 감시하는 무서운 존재였고, 신이 바라보기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늘 불안에 떨게 했다.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기도를 하면서도, 늘 내가 지은 죄가 원인이 되어 나의 기도를 신이 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과 후회만이 남았다. 인과응보와 기복의 신앙 사이의 악순환, 혹은 윤회 속에서 마음은 어두워져 성당을 더 멀리하게 되었고, 종교는 나에게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이성적으로 이런 생각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그래도 마음의 작동은 쉽게 바뀌지가 않는다. 여전히 내가 지은 죄를 두려워하고 그럴수록 더 복을 비는 이 부정적인 생각의 순환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 불교적 가르침을 더욱 가까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른바 크리스천 부디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김치 얹은 페스추리 같은 이 황당한 단어가 생각보다 꽤 효과가 있다. 내가 그동안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왜곡된 시각을 보정해주고 새롭게 종교를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징벌적 종교관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모순 덩어리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만들었다면서 왜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는가. 그러니 신이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신은 인간을 벌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되려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일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신해 그 죄를 대속한 존재다. 그러니 신의 사랑을 협박처럼 묘사한 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됐다. 신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벌하는 존재가 아니다. 벌은 그 잘못된 행위의 결과일 뿐 신의 의도가 아니다. 신은 그저 그런 섭리를 만든 존재일 뿐이다. 


기복적인 신앙은 더더욱 모순 덩어리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신과 같이 공평무사한 존재가 나라는 개인의 손을 들어줄 이유가 만무하다. 게다가 무엇이 이로운 것인가를 나 따위가 알 수 있을 리도 없다. 당장의 이득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되는 가는 인간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나의 좁은 시각에서 나에게 이로운 것을 비는 것조차가 어리석은 일이고, 게다가 신이 그것을 들어줄 것이라 믿는 것 자체도 어리석은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 그리고 일체유심조를 따라가다 보면 되려 새로운 모습의 신이 보인다. 그 신은 나는 벌하기 위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주는 신도 아니다. 신은 그냥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의 의도이고, 우리는 지금 그의 의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런 섭리 속에서 움직이고, 그 안에서 나의 선택이 곧 결과가 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없고, 불안해할 것도 없다. 내 주변을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매 순간을 진실되게 살아가면 된다.


불교에서는 신의 존재는 믿음의 영역으로 친다. 불교는 이 우주의 원리를 인정하되,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탐구하기보다는, 그 원리 안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삶의 관점과 마음의 자세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 섭리의 근원이 신에 있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맡긴다. 그렇게 믿음으로서 그 우주의 섭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도 이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크리스천 부디스트라는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의외로 내 삶에는 큰 도움이 된다. 


처음 크리스천 부디스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깨달음에 머리가 얻어맞은 기분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어떤 종교, 어떤 가르침이건 그 결과가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성찰, 그리고 삶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희생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 신이 정말 있다면 부처도 불교도 신이 만든 것이다. 한 가지 가르침으로 포섭하지 못하는 나같이 의심 많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버전의 학습지를 작성한 셈 아닌가.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한 스님의 법문에서였다. 


해바라기 그림을 포기한 것은 여전히 복을 비는 나의 습관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신이 되었건 해바라기 그림이 되었건 나의 부를 위해서 애써줄 존재란 이 우주에 없다. 이 우주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나는 선택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서 온전한 책임을 진다. '내 믿음 하에서는' 이 섭리를 만든 것은 신이고, 그 섭리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다. 그것을 믿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빌어도 오지 않던 평화가 마음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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