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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Mar 22. 2022

오늘도 회사에서 싸우는 나에게

인도가 나를 인도하는 순간

인도 여행을 갔을 때였다. 가자마자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사기란 사기는 모조리 당했던 것 같다. 정확히 3일째 되던 날. 나는 그만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20살. 철없던 어린 청년에게 인도란 너무 가혹한 장소였다. 눈물은 계속 볼을 타고 흘렀지만 차마 돌아 눕지도 못했다. 침대에는 벌레들이 가득했고 간절기 침낭 속에 정자세로 누워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생각보다 너무 추운 날씨에 나는 숙소 앞의 한 가게에 들러 두툼한 모자를 하나 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걱정이었다. 이 모자는 또 얼마나 비싸게 받아먹을 것인가. 말도 안 되는 가격 흥정을 할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마침 현지인들이 꽤 모여 있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심지어 종이 상자를 찢어서 가격도 적어 두었다. 정찰제라니! 나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현금을 주고 모자를 낚아챘다. 혹시나 딴 소리를 할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모자를 써보지도 못하고 샀으니 그것도 참 문제였다. 인도인들은 대부분 나보다 머리가 작았다. 간신히 머리에 모자를 씌우니 들어가기는 하는데 영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추위를 견딜 수 있으니, 그리고 바가지를 당하지 않았으니 이게 어딘가 하는 마음으로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고개를 숙여 이리저리 내 모습을 살펴볼 때였다. "모자가 참 잘 어울리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외국인인 나에게 듣기 좋은 칭찬으로 말을 건다? 역시나 사기꾼들 밖에 없다. 잔뜩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못하게 쏘아붙일 생각이었다.


고개를 돌렸는데, 생각과 너무 다른 인상에 순간 놀랬다. 너무나 푸근하고 어진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관상을 믿지는 않지만 이런 인상과 웃음을 가진 사람이 사기꾼 일리는 없다. 순간 내가 조금 누그러진 틈을 타서 그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신도 한국에 오래 있었고, 경주라는 도시를 좋아하며, 소주를 즐겨 마셨다고도 했다. 내 지갑을 노리지 않는 첫 인도인과의 대화. 지난 3일간의 고생으로 인한 설움이 물 밀듯이 쏟아졌다. 나는 인자한 미소의 할아버지에게 인도에 대한 불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인도란 나라는 너무나 혼란스럽다. 이 길을 봐라.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없다.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하지도 않고, 달리는 버스에 뛰어오르거나 내리는 것이 일상이다. 물건 값은 부르기 나름이고 어제 내가 탄 택시는 원래 요금의 열 배를 주고 내렸다. 폭동이 나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동네는 너무나 평온했고, 본인이 커미션을 받는 숙소를 거부하자, 택시기사는 정이 넘은 시간에 나를 그냥 길거리에 내려놓고 도망쳤다. 아이를 안은 엄마는 우유를 사달라며 구걸을 했지만, 정작 내가 사준 우유를 현금으로 바꿨다. 아이는 그저 구걸의 도구였다. 든 인도인들이 다 사기꾼이다.


분에 받쳐서 한 참을 쏟아내는 나를 그저 지긋이 웃으면서 바라보던 그 할아버지는, 이윽고 나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이봐 친구, 인도란 나라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것이 아냐. 너의 머릿속이 그런 거지. 우리는 여기서 몇천 년을 살았어. 너는 3일 전에 여기에 왔지. 니 인도라는 나라를 받아들여." 순간 머리가 울리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랬다. 들은 이곳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살고 있었다. 불편함도 크게 없을 것이었다. 이 큰 나라에서 불편하고 힘든 것은 나였다. 그것도 고작 두 달여를 머물다 가는 이방인 아닌가. 지금에 비하면 매우 어렸던 나였지만 그 당시에 울림이 꽤 컸었다.


할아버지는 쿨하게 나의 등을 몇 번 치더니,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근처 주 정부의 관광안내사무소를 가고 있던 길이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자기를 따라오라면서 나를 데리고 몇 블록을 걸어갔다. 나는 인도에도 좋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며 그렇게 할아버지를 따라서 골목골목을 누볐다. 그리고 도착한 건물.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 서서 들어오라고 연신 손짓을 했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은 주 정부의 관광안내사무소가 아니라, 어떤 사설 여행사의 사무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배신감에  배의 화가 치솟았다. 결국 나는 또 분노했다. 할아버지에게 연신 소리를 질렀다. 혈기 왕성했던 시절이라 나의 분노도 엄청났을 터였다.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당신도 똑같아!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야! 인도라는 나라가 그래!" 나의 고함에도 할아버지는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확인까지 했다. 주변 사람들은 한패인 양 할아버지에게 동조했다. 집단 사기꾼들이 틀림없었다. 할아버지는 이내 애처로운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소연을 했다. "나중에 후회할 짓은 하지 말게." 그러나 나는 힘없이 축 늘어져서 할아버지를 보냈다. 더 화낼 기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결국 나를 떠나갔고, 나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종이로 된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정도 헤맨 끝에 다시 그 사설 여행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사설 여행사에 가서 정보를 얻을 셈으로 건물을 들어서자 놀랄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설 여행사의 간판과 사설 여행사의 사무실 옆으로 아주 작은 복도가 있었고 그 복도 깊숙한 곳에 믿기지 않게도 주정부 관광안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미 그 할아버지는 가버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관광안내사무소의 추천을 받아 그 근처의 잔딸 만딸이라는 천문대를 찾았다. 경주의 첨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인도인들은 유구한 시간을 거쳐 지금의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다. 그것이 내가 살고 있던 사회와, 혹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동 떨어져 있다고 해서, 고작 20년의 나이인 내가 그 수천 년의 시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인도라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 규범, 관습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그 경험은 나를 실제로 바꾸어 놓았다. 옳고 그름은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인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차츰 인도라는 나라에 스며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여행은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그들에게서 배울 것들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또 나의 분노를 일깨우는 사건들은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처음 그 3일간의 분노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달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여행은 나의 인생에서 큰 계기가 되었다. '인도'여행에서의 깨달음은 그 뒤로도 한 번씩 떠올라서 나의 생각의 방향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산다는 것이 그렇지만, 특히 회사를 다니면서 정말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악당과도 같은 사람도 있다. 이들과 날을 세우고 대립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는, 인도에서의 이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된다. 그 사람의 이면에는 마치 인도라는 나라가 그러했듯, 오래된 시간과 배경이 존재한다. 그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 받아 온 교육의 수준, 부모의 성격,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부모의 성격이 형성된 배경까지, 따지고 올라가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들과 싸우려는 마음이 불쑥 들 때면 나는 또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고작 몇십 년을 살아오면서 가진 편협한 나의 기준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어난 일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원인과 결과를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에게 가지는 분노는 그래서 허무하다. 그 분노는 그 사람이 아니라, 결국 내가 가지는 편협한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너무나 가슴을 치는 말이다.


연히 범죄를 용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폭력, 폭언은 범죄이고, 이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벌해야 될 대상이다. 그러니 회사에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당연히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범죄를 처벌하는 것과, 그 대상에 대해서 분노라는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것이다. 인도라는 나라의 사회 질서를 세우는 것은 이로운 일이나, 현재의 어지러움에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말이다. 러니 회의 내내 이어지는 본부장의 폭언도, 하루 종일 스피커 폰으로 떠드는 팀장의 개인적인 통화도 사실 화낼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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