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잔디를 심었다고 합시다. 조금만 방심하면 잡초가 올라온다고 합니다. 잡초를 뽑는 것도 일입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잡초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까? 잡초가 죄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잡초는 자연의 질서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는 것입니다. 애초에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고 보기 좋은 잔디만 심은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그러므로 잔디밭에 난 잡초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묵묵히 잡초를 뽑거나, 잔디 가꾸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몇 달을 기다린 여행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날에 지진이 나서 여행지에 큰 피해가 닥쳤습니다. 예약한 숙소는 모두 영업 중지가 되었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라 사전에 납부한 예약금액도 환불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행도 취소되고, 금전적 손해도 보았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지진을 유발한 지구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진은 자연의 질서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는 것입니다. 애초에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손해를 감수하거나, 위험한 지역에는 여행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형편없는 후배 직원이 있습니다. 일을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해오지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보고는 엉망이 되었고, 납기를 놓쳐서 상사에게 큰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나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화가 납니다. 보고를 망친 후배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후배는 본인이 원해서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고 자라서 컸을 뿐입니다. 애초에 회사가 원하는 기준에 맞지 않은 사람을 채용한 것, 그리고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업무를 지시한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그러니 채용 기준을 강화하거나, 업무 지시를 조정하는 것이 할 일입니다.
저는 직장에서 화낼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한 번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 여러 댓글들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화를 내는 것이 나에게나 상대방에게나, 조직에게나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그저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비열한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애초에 화를 낼 일조차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형편없는 후배의 경우는 고민이 됩니다. 같은 말을 수 없이 반복해도 이해를 못 하고, 되려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작정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시당하는 기분까지 듭니다. 이럴 때 화를 내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화를 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잡초나 지진처럼, 타인의 생각과 행동은 화를 낼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쌓여서 나타난 결과이며, 자연스러운 원인과 결과 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형편없는 후배라고 하더라도, 화를 내는 것은 마치 잡초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이 허무한 일입니다.
그 후배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선 정말로 후배가 형편없는 역량을 갖췄다고 전제합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만) 그 친구가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능은 상당 부분 유전에 의해 결정되고, 학업 성취는 이미 부모의 소득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친구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끈기라는 것도 일종의 유전적인 재능이고, 이 역시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친구도 명문 대학을 나와서 누가 봐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의 능력자가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친구가 왜 나와 일하고 있는 지도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변수입니다. 회사가 채용을 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직원들과 동일한 채용 Process를 거쳤다면, 그건 회사의 채용 Proces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 또한 이 친구의 잘못은 아닙니다. 되려 이 친구는 본인 역량에 비해 더 우수한 회사에 입사한 것이니 축하할 일이겠지요. 그리고 그 정도로 부실한 채용 Process를 보유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나 역시 떳떳한 입장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 친구를 거를 정도의 엄격한 기준을 가진 회사였다면 나도 입사가 꽤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 의해 낙하산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런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회사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회사의 일부입니다.
네,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공격적인 이야기인지요. 하지만 우리는 늘 타인과 나를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소위 말하는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은 형편이 없고, 나는 정상인, 논리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 냉정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형편없는 직원은 생각보다 큰 잘못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 했고, 그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형편없는 역량으로 살아남느라 더 고군분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채용한 직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 이기적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형편없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개인에게 형편없는 직원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틀렸다는 평가와 함께 화를 낼까요? 그리고 이것을 정당화할까요?
그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는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준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성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성실보다는 성과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개인에게는 같은 월급을 받고 최소한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되려 그들에게 옳은 일, 바람직한 일 일수도 있습니다.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때문이지요. 이 경우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도 사실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월급에 대한 의무 수준을 타인에게도 적용합니다. 내가 잔디와 잡초를 구분하듯 말이죠.
두 번째는 타인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절대 바꾸지 않으면서 우리는 타인을 늘 바꾸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이 부분에서 앞서 잡초와 지진의 예가 적절치 않다고 느끼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인에 의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향은 오랜 시간 자연의 이치에 의해서 쌓아져 온 것입니다. 설령타인의 강압에 의해 변화했다 하더라도 이는 단기적이고, 즉흥적이고, 가역적입니다. 그리고 곧 반발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변한 시늉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늘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변화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변화합니다. 그리고 타인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참고할 무언가가 될 수는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사람이 변했다고 해도, 그 변화는 그 변화한 사람이 결정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준비가 이미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말 한마디에 변한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그 역시 오랜 시간의 자연스러운 축적에 의한 변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가 단 기간에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타인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바뀌지 않으면 내 말이 무시당한 것이라고 여기고 화를 냅니다. 이는 잡초가 잔디로 바뀌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과 동일합니다.
오늘도 회사에서는 수 없는 고성과 폭언이 오갑니다. 고성과 폭언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타인을 바꾸려고 하는 오만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고성과 폭언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그 사람의 인생, 자라난 환경,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처들이 쌓이면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인 시대라고 합니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무려 2%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2,30대의 우울증 환자 비중은 날로 늘어서 이 연령대의 우울증 환자 비중은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과거의 사회에서 월급을 받는 대가에는 이런 자기부정의 아픔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최저 시급이 올라가듯,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기준은 날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돈을 받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일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도 고성과 폭언을 일삼는 선배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의 고성과 폭언으로 인해 누군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것이 회사를 위한 공익적 행동이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실 겁니까? 당신의 고성과 폭언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실 겁니까?
일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는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내 기준에서 일을 못하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해서 죽는 세상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직장에서 오가는 고성과 폭언, 괄시처럼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는 이제 그만 근절되었으면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이치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경영진으로부터 시작된 폭언과 욕설, 강압적 분위기, 개개인의 무능을 질책하는 문화는 조직 전체를 썩게 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이 필연적으로 뒤 따릅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