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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Sep 05. 2020

폐소 공포증

갑자기 찾아온 공황, 원인은 불안장애였다.


이것도 벌써 1년 반이나 지났다. 작년 2월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당시 기억으로는 지옥문을 열고 살짝 지옥을 엿보았다가, 너무 무서워서 황급히 문을 닫아버린 정도. 그 뒤로 한동안 다시 그 문이 열릴까 봐 무서워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상담도 받고 스스로 돌아보면서 많이 좋아졌는데,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정도의 PTSD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불편함은 폐소 공포증. 사실 비행기에서 겪은 공포 자체가 불안장애로 인한 폐소 공포증이었기 때문에 이 증상이 가장 오래, 그리고 크게 남아있는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해서, 순간적으로 도망칠 수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 어렵다. 몸에서 땀이 나고 숨을 쉬기 어렵고, 마치 그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본 지옥을 다시 볼 것 같은 공포가 든다.

작년의 비행기 사건 이후로 가장 크게 위험했던 순간은 지하철 9호선이었다. 퇴근하고 합정 가는 길이었는데, 급행을 타면 빠르기도 하니까 생각 없이 탄 것이 화근이었다. 역 두어 개를 지나고 나니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덕분에 앉아 있음에도 엄청나게 갑갑함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이걸 다 걷어차고 내릴 수 없다는 기분이 들자 괴로움이 찾아왔다. 다행히 몇 분마다 정차한다는 점을 계속 되뇌면서 어떻게 극복하기는 했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애당초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하니 크게 불편한 것은 없지만, 사회생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할 때가 간혹 있다. 3열 승합차의 맨 뒷자리에 탄다던가, 회식 때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에서 벽을 등지고 한가운데 앉아야 한다던가 하는 상황에서는 온몸이 땀이 나고 경직되는 등 불편함이 크다. 처음엔 남들에게 이런 걸 일일이 이해를 구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남사스럽기도 해서 그냥 참아도 보고 했는데, 이제는 그냥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다.

불안의 원인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길게 쓰면 한없이 긴 이야기지만, 이런 폐소 공포증의 원인은 불안장애. 그리고 그 불안장애의 가장 큰 핵심은 부정적인 사고.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의 이면에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다. 유년기 한없이 자상하면서 동시에 한없이 엄격했던 부모님 사이를 오가며 형성된 자아가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를 그만 좀 괴롭히라고 몸과 마음이 SOS를 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잠이 참 많았다. 아무리 흔들어 깨우고 소리를 질러도 나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깨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그저 내 책상에 부모님이 앉아서 책장의 책들을 뒤적거리거나 서랍을 열어보는 것이었다. 그럼 마치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보이는 것 마냥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잠이 달아났다. 정제되지 않은 내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극도의 긴장과 불안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자취하던 오피스텔을 내어놓았는데, 한 번은 근무 중에 집을 보러 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마침 그날 아침에 재채기를 하고 코 푼 휴지를 책상 위에 그냥 두고 온 것이 기억났다. 그날 하루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뒤적거리던 내 책 속의 낙서도 어쩌면 코 푼 휴지 정도의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불안과 긴장을 유발했다.

몇 차례의 상담과 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손에 쥐고, 뜨겁다고 소리치고 있는 모양새. 뜨거우면 내려놓으면 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걸 계속 쥐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무의식적인 자아, 그리고 습관이 그걸 계속 쥐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환상


맞다, 대충 살아도 된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마치 대충 살면 내 존재가 부정당할 것 같은 무서운 마음이 든다. 남보다 못하면 존재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만 내 존재가 살아남을 것 같은, 목숨을 건 외줄 타기와 같은 간당간당한 순간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조금의 실수로 인해 내 존재가 송두리 채 사라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늘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어린 시절 학교마다 있던 씨름판에서 하던 게임이 떠올랐다. 모래로 성을 쌓고 가운데 나무 작대기를 하나 꽂은 다음, 순서대로 흙을 조금씩 덜어내어 제일 마지막에 나무 작대기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게임. 마치 요즘 나의 모습도 그런 게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래사장에 누구보다 높게 흙을 쌓고 깃발을 꽂은 다음, 남들에게 칭찬을 받고 우월한 내 모습을 확인하면서 살아온 지난날의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조금씩 덜어내려고 하는 지금의 나. 그럼에도 정작 그 나무 작대기를 무너뜨리는 것이 무서워서 찔끔찔끔 흙을 퍼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 스스로 짠할 때가 있다. 누가 와서 확 발로 차 줬으면.

요즘 상담 센터를 종종 이용하고 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게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래사장 비유를 들자 상담 선생님이 따뜻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모래사장 전부가 당신이에요.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모든 것은 환상이다. 내가 만들어 낸. 남들보다 우월한 적도 없었고, 특별한 적도 없었다. 되려 못난 적도 많았다. 모래사장은 세 살짜리 아이가 환상을 그려내는, 그냥 나의 큰 놀이터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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