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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자 Sep 05. 2020

무의식 자판기

속는 셈 치고 해보게 된다.


예전에 한 심리학자에게서 들은 내용. 본인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특정한 손동작을 하라는 것이다. 대신 이 동작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퇴근하고 집에 들어설 때,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행복을 느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아이를 꼭 껴안으면서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손동작을 한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느낄 때마다 그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그다음부터는 기분이 우울할 때마다 그 손동작을 통해 거꾸로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파블로프의 개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거 있으면 한 번씩 다 따라 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 그래서 한동안 와이프랑 행복한 기분이 들 때마다 열심히 네 번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비벼 댔다. 그런데 몇 번 안 했을 때 갑자기 우울한 순간이 찾아왔고, 학습이 덜 된 상태에서 그 동작을 몇 번 반복하였다. 나중에는 그 손동작을 할 때마다 행복하기는커녕 예전의 우울했던 기분이 생각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일종의 해프닝으로 지나갔는데,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본 계기가 있었다. 회의나 높은 사람들을 만날 때 긴장하지 않는 방법을 다른 심리학자에게 듣게 되었을 때다. 하버드의 에이미 커디 교수의 이른바 원더우먼 자세. 직장인에게 적용하면, 높은 사람을 만나거나, 회의에 앞서 위축이 될 때는 직전에 한껏 거만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거만한 자세를 취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거만한 상황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바로 이어지는 회의나 미팅에서 심리적으로 덜 위축된다는 논리. 그래서 또 한동안 본부장 만나러 가는 길에는 일부러 한 손 주머니에 넣고 보폭을 크게 하면서 걷곤 했다.


우리의 감정도 조건반사라면?


어느 날 집에서 숭늉을 먹다가 문득 깨달음이 왔다.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그저 단순한 조건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복잡 미묘한 감정이라는 것도 사실은 개가 흘리는 침처럼 그저 무의식의 습관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숭늉이 구수한 것도 어릴 때부터 그것을 먹으면서 학습된 결과이듯 말이다. 미국 사람이 숭늉을 먹으면서 구수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위의 두 가지 사례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행동과 감정 사이의 습관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이런 경우들이 많았다. 예전부터 어떤 사람의 인상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곤 했는데, 이것도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들을 통해 학습된 결과였던 것 같다. 나에게 우호적인 친구들의 표정이나 얼굴은 좋은 감정을, 화가 나거나 불만이 많은 표정은 나의 불안을 불러와 이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이다. 이후 비슷한 표정을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호불호를 느끼게 되는 원리. 내가 느끼는 감정이 사실은 단순한 조건반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허무해졌다.

한편으로는 그저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마음이 조금은 단순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버튼이 수백 개 있는 자판기가 생각났다. 어떤 버튼이 눌리냐에 따라 수많은 감정이 나오는 복잡한 기계 같지만, 그 내부의 원리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특정 버튼을 누르면 특정 감정이 나오는 간단한 수식이 그저 무수히 많이 입력된 것일 뿐, 우리 마음은 흔히 생각하는 고차원 방정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이것도 고차원 방정식에 대해 나의 거부감이 학습된 결과인가.


내 감정도 버튼 하나로 조절하고 싶다.


마음도 일종의 습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버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그저 과거의 학습에 의한 조건 반사라면, 매 순간 감정에 깊이 매몰될 필요가 없어진다. 그냥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버튼을 재빨리 눌러버리면 된다. 앞에서 심리학자가 말한 그 손동작도 이런 관점에서 매우 유용한 방법인 것이다. 조용히 거실에서 음악을 듣거나, 자전거 혹은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는 것도 나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버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같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 환경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자판기는 어떤 버튼을 누르든 좋은 감정이 나올 확률이 높다. 반면 부정적인 사람들은 어떤 것을 눌러도 나쁜 감정이 나오는 자판기가 된다. 외부의 조건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지만, 그 조건에 어떤 감정을 습관화할 것인가는 내가 정할 수 있다. 지금 나는 부정적 습관이 잔뜩 들어서 뭘 눌러도 부정적인 감정이 잔뜩 나오는 자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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