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모두를 병들게 한다

잠들지 못해도 새벽은 온다

by 해리

우울은 침식이다.

침윤되고, 침체된다.

나를 갉아먹고, 내리누르다, 끝내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오래된 우울증, 그리고 불면.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까지,

그것들은 차례차례 나를 짓눌렀다.


어느 날은 숨을 쉬었고,

어느 날은 숨을 죽였다.

흉측한 그것들은 단 하루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이 더 깊이 스며들지 않게 ‘척’을 해야 했다.


즐거운 척,

걱정 없는 척,

잘 살아가는 척,

누구보다 행복한 척.


그 척들이 오히려 나를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척하니,

입가엔 억지웃음만 비스듬히 걸렸다.

그 병은 나뿐만 아니라,

내 곁의 사람들까지 고이고, 썩어가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오빠가 등산을 가자고 며칠 동안 연락을 해왔다.

평소 같았으면 가볍게 무시했을 말이었지만,

며칠 전 공황을 겪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기대어보자.

이번엔, 한 번만.


초입부터 펼쳐진 하얀 자작나무숲.

잎은 다 떨어졌는데도, 그 설렘은 숨 막힐 만큼 장관이었다.


20년 만의 산행이라, 쉽지 않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개는 바닥을 향했고,

돌부리와 낙엽을 피하느라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험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앞서 가던 오빠와 언니는 평탄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바닥만 보느라 그 길을 벗어나,

혼자 험한 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 순간, 생각들이 스쳐갔다.


아—

바닥만 보고 걸으니까

주변을 볼 수가 없었구나.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거구나.


정상은 같은 곳인데

누군가는 곧장 평탄한 길로 가고,

나는 굳이 돌아 돌아 어려운 길로만 가고 있었다.


쓴웃음이 났다.

그래.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를 혹사했고,

나를 밀어붙여 ‘어려운 길’로만 데려갔다.


생은 한 번뿐인데—

목적지는 결국 같은데—

나는 무엇을 얻으려 그리도 아등바등 걸어왔을까.


숨차고 힘들면 멈춰서

주변을 둘러봐도 되었는데,

나는 내 고집대로 살겠다고 외치며

그런 여유조차 모두 잊고 살았다.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며,

정작 내 우울을 내 사람들에게 전가하고,

나는 피해자인 척 모두를 병들게 했다.


한심했고, 어리석었다.


오빠가 그토록 나를 산으로 데려오고 싶어 한 이유는

아마 나를 살리고 싶어서였겠다.

구멍만 파고 있던 나에게

고개를 들고 걸어보라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끝까지 바라보라고.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

빌딩숲들이 그저 작은 블록 같았다.

나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먼지 같았다.

나 없이도 돌아가는 장난감 같은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몸부림쳤을까.


그제야 깊게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조금 편안하게 느껴졌다.


행복하지 않으면 어때.

즐겁지 않으면 어때.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고,

나라는 존재가 태어난지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뿐인데.


나는 왜,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애썼을까.

나는 나대로,

그저 주어진 생에 맡기며 살아가면 되었던 건데.


잠들지 못해도, 새벽은 온다.

긴긴 새벽 끝에, 아침은 온다.

끝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밤도,

숨 막히는 고통이 들이닥치는 순간도,

살아만 있다면 — 다음은 있다.


조금 더 느려도 되고,

조금 더 멈춰도 된다.

나는 그저 살아 있는 몸으로

오늘을 통과해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불현듯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별이 떠오르던 새벽,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

오늘의 마음을 조용히 적어내려 갔다.




무작정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을 타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도착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그 사이, 막혀 있던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늘 고개를 숙인 채 걸어야 했던 곳을 벗어나,

이제는 그의 옆에서 웃으며 걸을 수 있었다.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가로수길.

우리는 천천히 걷다가, 오래된 책 냄새가 풍기는 헌책방에 들어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서로에게 어울릴 법한 책을 골랐다.


인적 드문 골목의 작은 카페 구석에 앉아선,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작은 입맞춤 하나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해가 기울 즈음, 강가 둔치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페달을 밟아 달려 나가는 그의 등이 눈앞에 있었다.

노을빛이 강물에 부서지고,

그 옆에서 웃던 그가—

바람을 가르며 흩날리는 푸른 셔츠 사이로,

햇살을 품은 듯 환히 웃고 있었다.


그 등을 따라 달리며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웃음소리가 퍼저나 가는 이 순간,

세상은 마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가도, 그래도 된다고.




옆에 놓인 따스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온기가 손끝까지 스미듯 퍼져나가자, 작은 웃음이 맴돌았다.


그날의 작고 조용한 숨이, 오늘의 나를 다시 살린다.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