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어제보단 조금 더 나를 사랑해 보기로 했다

by 해리

나는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 미움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으려 애쓰는 나를 외면했다.


수면제를 먹은 지 어느덧 1년이 가까워왔다.

약을 줄여 버티면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용량을 늘리면 어지러움 속에서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이 모양이지.”

나는 매일같이 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날은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저번 달은 어떠셨어요?”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전히 잠을 잘 못 자요. 새벽 두세 시면 눈이 떠지고…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억울했다.

나는 나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루 두 시간씩 운동하고,

인스턴트 음식과 카페인을 끊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햇볕도 꾸준히 쬐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잠을 거부했다.

그 사실이 서러워서 속이 턱 막혔다.


“용량을 조금 늘려야겠어요.”


그 말은 실망감에 가슴 한복판을 철렁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을 줄일 수는 없을까요?

평생 이렇게 약에 의지해야만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약을 늘리는 게 불편하신가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말했다.

“네. 매달 이렇게 와서 결국 ‘약을 늘리자’는 말을 들으면…

저는 저한테 진 기분이 들어요.”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왜 지는 걸까요?

이건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살리기 위한 약이에요.”


그 말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렸다.

꼭 오래 닫아두었던 창문이 조금 열린 것처럼.


그러다 선생님이 문득 물었다.

“커피 좋아하세요?”


“네? 카페인은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좋아하던 걸 다 끊으면,

그게 더 스트레스 아닌가요?”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전엔 디카페인부터 드셔보세요.

그날 잠을 잘 주무셨다면, 다음엔 진한 커피도 마셔보세요.

안 맞으면 또 줄이면 되고요.

그렇게 조절하면 돼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머물렀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며 버텼던 것 같다.

잠을 못 자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행복은 늘 나중으로 미뤘다.


그런데 —

행복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걸 조금 더 해도 괜찮았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좋아하던 커피를 다시 마시고,

달콤한 케이크 한 입에 웃어도 괜찮았다.


“잠을 못 자면, 그다음 날 커피를 줄이면 되잖아요.”


그녀의 단순한 말이 나를 살렸다.

아무도 몰래, 작은 숨 하나가 몸 안에서 다시 피어났다.


오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를 사랑해 보기로 했다.

아주 작게, 조심스럽게.

그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은 내 혼을 담는 그릇이다.

금이 가 있을 수도, 조금은 깨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조차 나의 모양이니까.


내 그릇을 다시 채워보기로 했다.

커피 한 잔, 조용한 오후,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나로.


행복해질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오늘을 버텨낸 나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해주는 것.


그리고 떠오른 문장들을 나는 오늘도 기록했다.




귓가에 살며시 내려앉은 누군가의 멜로디.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앞엔 여전히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늘 같은 모습으로.


피아노.

그토록 오랜 시간, 그것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를 기꺼이 내던졌다.

그 시간들은 마치— 등불로 달려들어 모든 걸 태워버린 작은 날벌레 같았다.


문득 웃음이 올라왔다.

나는 무엇 때문에, 대체 왜.

익숙함을 넘어선, 막연한 의문이 가슴을 찔렀다.


피아노.

그게 대체 뭐길래.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잠시, 조용히 머리를 떨군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익숙한 동작으로 자세를 고치고, 페달을 밟고,

건반 위에 손을 얹으려던 순간——


옆방에서 흘러들어오는 쇼팽의 녹턴.

부드럽고, 정제되고, 감정의 골을 타고 흐르는 선율.


너무나 투명한 음색.

다채롭게 겹쳐지는 감정.

그리고——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그 깊이.


그 순간,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아니. 어쩌면 너무도 분명한 이유로.


그래.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방금 전까진 피아노 따위가 뭐냐며 비웃었는데—

이제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피아노는 변하지 않았다.

흔들린 건, 언제나 나였다.


나는 손끝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살아왔고, 이 손으로 무너졌고— 그럼에도 다시 여기에 서 있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믿자. 지금까지 해온 나를 믿자.

그래야 버틸 수 있어.’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보단 조금 더 나를 사랑해보려고 한다.

그 작은 걸음이 언젠가의 나를 살려내 줄 거라 믿는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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