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시티
뜻밖의 상황에 기대하지 않은 풍경과 상황을 마주칠 때 느끼는 설레임과 두근거림은 여행이 주는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지난 남인도 여행이 그랬고 카자흐스탄 알마티 여행이 그랬다. 그러나 가끔은 유명 관광지나 영화에 소개된 풍경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기대를 잔뜩 안고 무턱대고 여행지를 찾게되는 것도 여행자들의 숙명일 것이다. 기대했던 풍경 그 이상을 만나게 될 수도 반대로 잔뜩 실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 매번 당하면서 매번 기대 하나만으로 홀린듯이 떠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여행중독자다.
뭄바이에서 라자스탄주의 주도 자이푸르(Jaipur)로 향하면서 나는 김종욱 찾기의 촬영지 블루시티를 상상하며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건물들이 온통 핑크색이라서 핑크시티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곳 자이푸르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해가 지기전에 부리나케 향한 곳은 바로 어느 언덕이었다.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공유와 임수정이 블루시티의 언덕 위 카페에서 선셋을 배경으로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언덕 밑으로는 파스텔톤의 파아란 건물무리가 펼쳐진다. 이 로맨틱한 한 장면이 내가 라자스탄주를 찾은 유일한 이유였다.
블루시티가 아닌 핑크시티 언덕에는 로맨틱함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 언덕으로 향하는 돌길의 초입에는 원숭이떼의 습격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표지판 뒤로는 정말로 열마리 남짓한 원숭이떼가 성벽에 앉아서 바나나를 까먹으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녀석들이 바로 지나가는 관광객의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훔쳐가는 장본인이었다. 나는 나무막대기와 짱돌로 무장을 하고 원숭이떼를 향해 단호한 눈빛을 보내며 언덕을 올랐다.
원숭이떼를 피해 무사히 산 중턱에 다달았을 때 선셋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위가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덕을 오르는 도중에 하산하는 팀을 몇 팀 만났을 뿐이다. 모두들 "지금 이시간에 거기를 왜 올라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한번씩 쳐다봤다. 진짜 올라가도 되는건가? 슬슬 무서워지기 작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자이푸르 근처 유령도시 반가라 마을이라는 곳은 기괴한 풍경으로 '세계 3대 마경'으로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
블루시티가 아닌 핑크시티의 성벽 위에서 바라본 이 곳 풍경은 김종욱 찾기에서 표현된 낭만적인 그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핑크시티의 매력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도시풍경은 이 곳 자이푸르가 왜 라자스탄주의 주도인지 몸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북인도 라자스탄에서 첫 신고식을 단단히 치루었다.
자이푸르는 옛 수도 델리 그리고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와 함께 인도의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만큼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멋진 건축물과 유적들로 가득했다. 나는 무턱대고 발 닿는 대로 시내를 걸었다. 걷다가 힘이들면 버스를 타고 금새 내려서 또 다시 걸었다.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보는 것 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2014년 겨울의 걸음걸이와 2020년 지금의 내 걸음거리는 조금 다르다. 그 때 나는 왜 그렇게 걸었을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의 걸음은 2020년 현재의 나의 걸음보다 가볍고 희망차며 조금은 서툴었다는 것이다. 2015년 부터 시작될 첫 직장 생활의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하고 그동안의 대학시절을 추억하며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의 새로운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삶의 쓴 맛과 단 맛 무거움과 가벼움을 맛 보고 있는 2020년 나의 걸음에는 어딘지 모를 묵직함과 덤덤함이 더해져있다.
걷다보니 바람의 궁전이라 불리는 하와 마할(Hawa Mahal)을 만날 수 있었다. 먼 옛날 이 곳의 마하라자(Maharaja)가 지었다고 하는 이 건물은 밖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궁전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옛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런 구조로 지어졌다고 하니 여자들이 느꼈을 답답함과 불편함이 나에게도 전이되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유명한 앰버성은 마치 게임 페르시아 왕자에 나올 듯 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본격적으로 머리에 터번을 두른 이슬람 풍의 비주얼이 어울리는 웅장한 건물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한달간의 인도 종단여행의 끝을 맞이할 북인도가 왜 이제 왔냐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조금은 아쉬움을 머금은 표정으로 미소지으며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