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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바트로스 Sep 06. 2021

1년동안 11번 이사를 다니며 느낀 점

3개국 7개 도시 11개 숙소

약 280만 년 전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265만 년 동안이나 인류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산과 바다 그리고 동굴을 수개월 단위로 오가며 살아가던 인류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정착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고작 15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즉 유목민은 몽골의 초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원래 드넓은 지구를 내 집 삼아 살아가던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차박과 캠핑을 좋아하며 정기적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수백만 년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농업혁명 이후 전체 인류 역사의 5%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정착생활 기간 동안 사람들은 한 군데에 메여있는 삶에 그럭저럭 잘 적응한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서 목숨을 걸고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한 가지 장소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에서 안락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 집 마련에 집착하며 서울에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 방 하나 마련하는 것이 평생의 꿈인 세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여행은 떠나면 즐겁지만 피곤하고 고된 여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태고의 본능에 충실하며 여러 장소를 떠돌아다니면서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한 가지 장소에 머무르면서 안락함을 느끼지 못하고 고인 물이 썩어가는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아직 현생인류로 진화가 덜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3개국 7개 도시를 옮겨 다니며 11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발리에 반 년동안 살면서 나와 여자 친구는 점점 북쪽으로 이동하며 바다가 있는 스미냑에서 정글 우붓으로 그리고 또다시 산이 있는 킨타마니로 올라갔다. 허름한 빌라에서부터 정글의 5성급 호텔까지 발리에서 머물렀던 숙소의 종류도 다양했다. 쾌적함과 서비스에서 5성급 호텔에 비할바가 못되었지만 허름했던 산 위의 숙소도 나름의 낭만과 운치가 있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2 정도 크기의 유럽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에서 세 달 살기를 하면서도 우리는 한 가지 도시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수도 탈린에서 대학도시 타르투를 거쳐 발트해의 외딴섬 사아레마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서울 생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삼역 근처의 작은 원룸, 종로의 허름한 고시원, 왕십리의 넓은 복층 집, 여의도의 깔끔하고 아담한 에어비엔비, 이태원의 셰어하우스 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국경과 도시를 넘나들며 1년 동안 11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공간도 누군가에게는 얼마든지 특별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머물렀던 숙소의 방 크기나 가격대 그리고 서비스는 제각각이지만 머물렀던 장소에는 저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낭만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무료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새로운 공간의 기억들로 채워 넣었다.


발리 우붓의 작은 빌라에서 호스트와 가족처럼 지내며 보냈던 시간은 5성급 초호와 풀빌라에서 보냈던 시간만큼이나 소중하다. 북유럽의 외딴섬에서 호스트와 함께 사우나를 하고 눈에 파묻히던 특별한 기억은 중세시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느꼈던 감동만큼이나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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