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답도 없는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책 속에서 찾아 헤맸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어도 인생은 늘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책을 읽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나는 책을 던져버렸다.
그러나 한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서 지적 갈증과 허무주의가 찾아왔다. 더 이상 읽고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나의 정신은 유튜브 알고리즘과 광고 그리고 여러 방송매체에 잠식당해가고 있었다. 책을 읽지 않게 되자 때때로 원인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장 슬픈 것은 아름답게 보이던 것들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곳곳의 흥미로운 신화나 세상을 탐구하려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사라지면서 인생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나의 정신은 평범한 내 또래의 사람들의 것이 그러하듯 돈, 비트코인, 경제적 자유, 파이어족 같은 것들로 채워져 갔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역사 속에서 왕과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은 일반 사람들이 문자를 배우고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높은 문맹률은 분명 계층 간의 이동을 억제하는 수단이다. 도대체 텍스트에 어떤 힘이 있기에 지배층은 일반 대중들이 읽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정보수집, 간접경험, 공부 등 제각각의 이유로 책을 읽는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은 영상매체를 통해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매우 불완전하다. 같은 내용을 읽더라도 전혀 다른 해석과 오해를 낳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의 불완전성은 반대로 다른 매체가 가지지 못한 극강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텍스트가 가진 불완전성 덕분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소설 속의 상황 묘사를 읽더라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은 수천만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텍스트가 수 만 가지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말과도 같다.
마찬가지로 텍스트가 가진 불완전성 덕분에 읽는다는 행위는 보고 듣는 행위보다 훨씬 능동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문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받아들일지 여부를 판단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영상매체에 비해 독자의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의 시선에서 소화된 텍스트는 뇌의 사고 회로를 바꿀 정도로 깊게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의 해석은 그 자체로 오롯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 된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을 상상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과 상상은 모든 위대한 것들의 출발이다. 유발 하라리 역시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큰 차이점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믿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그 자체로 사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