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오늘 아침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는데 문득 그대로 철로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은 음식을 먹어도 아무 맛이 안나. 어젯밤에는 퇴근길 지하철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종점까지 가버렸지 뭐야. ”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대사같이 들리지만 이것은 놀랍게도 컨설팅펌 2년 차 시절 입사 후배 T군이 나와 입사동기들에게 실제로 털어놓았던 고민이다. 다행히도 그는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내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파트너와 면담을 반복한 끝에 그는 몇 달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도쿄를 떠났다. 지금은 홍콩에서 프리랜서로 원하는 일을 하며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앞에서 말한 후배의 번아웃 케이스가 한국이 아닌 일본의 사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적과 업계를 막론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번아웃 증후군을 겪어봤거나 적어도 그 비슷한 것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필자도 직장인 2년 차 시절 지독한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린 끝에 “이 길이 정말 내 길일까?”, “엑셀과 씨름하다 내일 아침 변사체로 발견되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회사 밖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라는 답 없는 질문들에 압도되었던 경험이 있다.
결국 이직 후 꾸역꾸역 직장생활을 이어오던 4년 차 시절 번아웃 증후군이 또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사람이 문제였다. 처음 경험해보는 매니저라는 포지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인적 스트레스'를 선물했고,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직장 생활의 본질에 대한 의문만 남긴 채 완전한 퇴사를 감행했다. 인생과 일에 대한 진짜 고민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번아웃 증후군은 더 이상 참지 말고 쉬라는 우리 몸이 보내는 위험신호다. 도대체 번아웃 증후군이란 무엇이고 왜 찾아오는 것일까? 과연 번아웃 증후군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 구직 플랫폼의 설문 조사 결과 요즘 신입사원 10명 중 3명은 1년 이내에 조기퇴사를 한다고 한다. 입사 후 3년 이내 퇴사하는 신입사원의 수는 절반을 훌쩍 넘는다. MZ세대에게는 애초에 장기근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자료출처 : 사람인)
재미있는 사실은 신입사원들이 퇴사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항목이 ‘개인의 만족이 훨씬 중요한 시대라서’,‘이전 세대보다 참을성이 부족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짧아진 근속연수가 개인의 만족이나 참을성 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한 이유에 의한 것일까?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평균적으로 일생 동안 12.3회 이직을 한다고 한다. 코로나 팬더믹 이후 미국인의 절반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며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프리랜서로의 전향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근속연수의 감소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 이상 조기퇴사를 개인이나 요즘 세대만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는 것은 당신이 적응을 못해서도 끈기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기술의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로 일자리의 수 자체가 줄어들고 일자리의 주기가 짧아지는 것은 패러다임 시프 드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우리 대부분이 겪게 될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회사생활은 끝날 것이다. 따라서 명확한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회사에 있는 기간 동안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간) 얻어갈 것과 회사에 기여할 것을 명확히 해두자. 곧 맞이하게 될 퇴사가 큰 계획의 일부라는 생각은 생산성 향상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은 투자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며 실천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로 한 가지 프로젝트에만 몰빵 하는 회사는 없다. 수익성이 좋은 캐시카우 프로젝트부터 미래의 먹거리를 발굴하는 스타 프로젝트까지 기업은 다양한 종류의 프로젝트에 베팅한다.
저자 다이앤 멀케이는 그의 저서 ‘긱 이코노미 : 정규직의 종말과 자기 고용의 10가지 원칙’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여러 카테고리의 ‘긱’(뉴욕 재즈 클럽의 단기 연주를 뜻하던 말로 임시적인 일을 뜻함)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관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 당장 생계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캐시카우가 될 만한 ‘긱’의 역량을 키우는 것부터, 돈과는 무관하지만 평소에 관심 있던 카페에서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재능기부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는 것까지 모두 미래를 위한 좋은 투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취미로 가볍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나중에 자신의 ‘인생 긱’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죽음’에서 ‘누가, 왜 자신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던 가브리엘 웰즈는 죽음과 사후세계를 경험한 뒤에 의미심장한 말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죽었는지가 아니라 왜 태어났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인생을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한 기나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태어났는지를 아는 것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하며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고 실천하는 일은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멜키 세덱이 ‘여행하는 양치기’라는 자아의 신화를 버리고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팝콘 장수’가 되어버린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존중과 경애를 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번아웃 증후군이 올 때까지 자신을 혹사시켜서도, 회사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