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국을 여행한 지구별 여행자
10년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긴 시간인 동시에 절대적으로도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경계에 있는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득히 길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좋은 시간. 나에게 있어서 그 10년이라는 지난 시절을 추억할 기회는 발리 입국비자를 받으려면 나흘 안에 10년 묵은 여권을 갱신해야 한다는 날벼락같은 소식과 함께 찾아왔다.
지난 10년을 나와 함께해 준 여권은 도쿄 롯폰기 근처 아자부쥬방(麻布十番) 한편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 총영사관에서 인쇄됐다. 그때도 미국 가족방문을 앞두고 만료 직전에 지금처럼 허겁지겁 달려가 만들었는데, 아자부쥬방은 도쿄에서 신오쿠보와 함께 한국요리와 한국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그때 영사관 직원분이 군대 갔다 왔냐고 묻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2014년의 나는 대학 졸업까지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고, 졸업 여행으로 홀로 인도를 횡단하며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주 활동 무대는 일본 도쿄 신주쿠와 시부야 언저리 었고, 그 나이 때의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이 혈기왕성했다. 일본에 꽤 오랜 시간 살았지만 원피스 같은 애니메이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남들은 다 한 번쯤 가볼 만한 아키하바라의 오타쿠스러운 것들은 질색했던 좀 특이한 유학생이었던 것 같다.
기억은 대부분 아련한 인상으로 남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인상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충실도에 따라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하고, 때로는 후회로 남기도 한다. 20대 초중반이라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어렸던 그 나이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참 많이 달랐다. 걱정이 없었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지금보다 더 신기하고 신선하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내 주위에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사람들과 익숙한 풍경은 이제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나는 한국에서도 별로 연고가 없는 낯선 도시로 출퇴근을 하며, 생각해 본 적 없는 풍경들을 마주하며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목표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거기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10년 사이에 내 여권에는 30개 나라의 입출국 도장이 찍혔다. 이탈리아, 인도, 에스토니아, 터키, 캄보디아, 캐나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등. 참 많은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을 느꼈고, 하나의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내 세계는 넓어졌고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완전히 달라졌던 것 같다.
10년 후의 나는 또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 여권을 갱신하고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이 그래서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인생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고 영원할 것 같은 인생은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의 흔적들을 이야기해 줄 기억의 파편들과 기록들만 남을 뿐이다.
이제 자신의 임무를 다한 10년 묵은 여권은 내가 직장인이기전에, 작가이기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기전에 본질적으로 지구별을 여행하는 여행자이자 유목민임을 다시 한번 잊지 않게 해 주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걱정은 10년 후에는 분명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상과 사람들에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게 웃어주자. 그런다면 현재는 어렴풋한 기억 속 좋은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과거이자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