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바트로스 Oct 23. 2023

10년 묵은 여권을 떠나보내며

​30개국을 여행한 지구별 여행자

10년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긴 시간인 동시에 절대적으로도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경계에 있는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득히 길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에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좋은 시간. 나에게 있어서 그 10년이라는 지난 시절을 추억할 기회는 발리 입국비자를 받으려면 나흘 안에 10년 묵은 여권을 갱신해야 한다는 날벼락같은 소식과 함께 찾아왔다.


지난 10년을 나와 함께해 준 여권은 도쿄 롯폰기 근처 아자부쥬방(麻布十番) 한편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 총영사관에서 인쇄됐다. 그때도 미국 가족방문을 앞두고 만료 직전에 지금처럼 허겁지겁 달려가 만들었는데, 아자부쥬방은 도쿄에서 신오쿠보와 함께 한국요리와 한국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그때 영사관 직원분이 군대 갔다 왔냐고 묻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2014년의 나는 대학 졸업까지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고, 졸업 여행으로 홀로 인도를 횡단하며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주 활동 무대는 일본 도쿄 신주쿠와 시부야 언저리 었고, 그 나이 때의 여느 대학생이 그렇듯이 혈기왕성했다. 일본에 꽤 오랜 시간 살았지만 원피스 같은 애니메이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남들은 다 한 번쯤 가볼 만한 아키하바라의 오타쿠스러운 것들은 질색했던 좀 특이한 유학생이었던 것 같다.


기억은 대부분 아련한 인상으로 남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인상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충실도에 따라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하고, 때로는 후회로 남기도 한다. 20대 초중반이라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나도 어렸던 그 나이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참 많이 달랐다. 걱정이 없었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지금보다 더 신기하고 신선하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내 주위에 영원히 머무를 것 같던 사람들과 익숙한 풍경은 이제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나는 한국에서도 별로 연고가 없는 낯선 도시로 출퇴근을 하며, 생각해 본 적 없는 풍경들을 마주하며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목표와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거기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10년 사이에 여권에는 30개 나라의 입출국 도장이 찍혔다. 이탈리아, 인도, 에스토니아, 터키, 캄보디아, 캐나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등. 참 많은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을 느꼈고, 하나의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내 세계는 넓어졌고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완전히 달라졌던 것 같다.


출처 : pixabay


10년 후의 나는 또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 여권을 갱신하고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인생이 그래서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인생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고 영원할 것 같은 인생은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 그 시간의 흔적들을 이야기해 줄 기억의 파편들과 기록들만 남을 뿐이다.


이제 자신의 임무를 다한 10년 묵은 여권은 내가 직장인이기전에, 작가이기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기전에 본질적으로 지구별을 여행하는 여행자이자 유목민임을 다시 한번 잊지 않게 해 주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걱정은 10년 후에는 분명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일상과 사람들에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게 웃어주자. 그런다면 현재는 어렴풋한 기억 속 좋은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는 좋은 과거이자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제적 자유라는 환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