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루치라팔리

남인도 이야기

by 알바트로스

티루치라팔리의 유적들


결국 고민하다 북인도로 가는 기차표를 끊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그냥 가기 아쉬워서 도시를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급한대로 호텔에서 나눠준 지도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아침공기는 상쾌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2km정도를 걸어 전통시장을 지나니 웅장한 사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쳤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나왔다.


티루치라팔리 북부의 Ranganathaswamy 사원


'미쳤다!'라는 감탄사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단순히 웅장하거나 멋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그런 감탄사가 아니다. 그 말에는 마치 이세상 것이 아닌 것을 보았을 때, 상식을 뒤집는 어떤 희안한 것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런 신기함과 두려움이 담겨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약 70m 높이의 웅장한 목탑 주위를 힌두교 신을 모티브로 한 조각상들이 감싸고 있었다. 조각상 하나하나가 표정과 얼굴 그리고 색깔이 모두 다르다. 푸른색 얼굴을 하고 있는 신들의 모습은 정말 괴이함 그 자체였다.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을 연상시키는 비주얼이었다. 팔이 여덟개나 달린 여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 얼굴에 사람 몸을 하고있는 가네샤도 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힌두교 사원은 경건함 보다는 신기함과 오싹함으로 다가왔다.


이 사원의 정체는 티루치라팔리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 Sri Ranganatha Swamy 이었다. 힌두교의 랑가나타 신에게 바쳐진 사원이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사원은 인도와 네팔 전역에 퍼져있는 108개의 Divya Desam(성스러운 곳)중 하나라고 한다. 4세기 드라비아 양식으로 1300년경 지어져 수차례의 침략을 견뎌내며 살아남은 사원이라고 하니 수십차례 왕조가 바뀌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인도의 다이나믹한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한참동안 첨탑들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으니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벌써 정오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과의 만남으로 내 여행계획은 대폭 수정되었다. 북인도행 기차 그리고 갠지스강과 타지마할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다.


바위 위의 요새 Rock Fort


지도를 대충 보며 발닿는대로 걸으니 거대한 바위위에 요새같은 것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락포트(Rock Fort)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락 포트는 바위 위에 지어진 요새이자 힌두교 신전이다. 10~13세기 인도 남부를 지배했던 다양한 왕조들의 흥망성쇄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었다.이 요새는 83 미터나 되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힌두교 신전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도 닮아 있다.


락포트 내부 힌두교 사원에서


나는 한참동안 가파른 바위를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요새에서 내려보는 티루치라팔리 시내의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다. 잘 정돈되고 계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이 도시에는 1840년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카톨릭 성당(Church of Lady Lourdes)과 힌두교 사원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티루치라팔리 시내 한복판의 성당, Church of Lady Lourdes


성당안의 힌두교도와 크리스챤


내려오자마자 락 포트 위에서 보았던 카톨릭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내부는 어딘가 친숙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가 신부님에게 처음으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듣고 고뇌에 빠지던 바로 그 성당같았다. 나는 성당 의자에 걸터앉아 현지인들 사이에 뒤섞여서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했다. 종교와 인종 그리고 문화를 초월한 이 곳은 진정한 멜팅팟이었다. 반나절만에 나는 이 도시에 반하고 말았다. 나는 결국 호텔을 연장하고 기차표를 알아보던 것을 그만 두었다. 그렇게 며칠 더 남인도의 매력에 푹 빠져보기로 한 것이다.



티루치라팔리의 사람들


티루치라팔리의 매력은 사원이나 독특한 도시풍경 뿐만이 아니었다. 티루치라팔리를 다른 관광지와 다른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때묻지 않은 사람들이다. 또한 그 곳에서는 나 말고 외국인 관광객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그 곳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매우 특별한 사람이 된다.


티루치라팔리 사람들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길거리를 걷고 있으면 현지인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며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민다. 어떨 때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팔짱을 끼는 사람도 있다. 인도는 호객행위와 바가지로 악명이 높다고 익히 들어왔다. 처음엔 사진을 찍고 돈을 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편견없이 순수하게 바라봐 주었다.


만원버스에 타면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해준다. 처음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기어코 나를 버스좌석에 앉게만든다. 시간이 지나고 이 곳에 익숙해지면서 순박한 이 곳 사람들이 보여준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마음껏 감사하기로 했다.


시내를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어느 현지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길을 잃었다고 하니 스쿠터로 데려다 준다고 하신다. 인도에서 낯선사람의 호의나 친절에 의심부터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마지못해 아저씨 스쿠터에 올라탔다.


호텔에 도착하고 아저씨가 꺼낸 첫 말은 다름아닌 “너 인도 좋아하니?” 였다. 조금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호객행위를 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너무 빡빡하게 굴었던 내가 부끄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당연하죠!”라고 대답했다. 그 아저씨는 “그럼 즐거운 여행 해~”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쿨하게 돌아갔다.


인도 서해안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까지 인도종단을 하는동안 나는 그렇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북부의 유명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는 뭄바이나 뉴델리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한푼이라도 더 바가지를 씌우려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티루치팔리사람들의 순수함이 그리워지곤 했다. 지금도 나는 지치고 힘들 때 때묻지 않은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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