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도시에서 체르노빌 사건을 생각하다

코로나 시대 북유럽 타르투 여행하기

by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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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도시 타르투


1992년 기나긴 투쟁 끝에 독립을 되찾기까지 에스토니아는 구소련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기자기한 유럽풍 대학도시 타르투에서도 이따금 구소련의 잔재와 마주치곤 한다. 유럽 100대 대학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이 위치한 이 곳 타르투는 수백 년 전 독일과 러시아 문화가 교차하던 지점이자 현대에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유학생들로 가득한 자유롭고 학구적인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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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시대 방공호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서려있는 구소련풍 아파트부터 과거 소련의 cia격인 kgb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감옥까지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에스토니아의 아픔은 타르투를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옛 구소련 도시였던 이 곳에서 체르노빌이라는 다큐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원전사고 이면에 숨겨진 이념의 한계와 죄 없이 고통받아야 했던 구소련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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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전역에 퍼져있는 kgb 감옥


체르노빌 원전의 총책임자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독단적인 판단으로 터빈의 관성력만으로 원전이 얼마만큼 발전이 가능한지 부하 검사를 실시한다. 그 과정에서 안전 시스템을 완전히 해제한 상태였으며 결국 그의 아집은 인류사상 최악의 원전 폭발 사고로 이어진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는 내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책임자와 정치인들의 태도였다. 결국 그들의 책임전가와 돌려막기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인류 최악의 인재로 만들어버렸다.


고통받는 것은 죄 없는 체르노빌 시민들이었다. 다리 건너에서 폭발한 원전의 아름다운 불빛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시민들은 전원 피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원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소방관과 광부들은 과도한 피폭으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어가야 했으며 드라마는 그들의 고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타르투가 구소련 원전사고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섬뜩함이 몰려왔다. 어두침침한 구소련풍 아파트 복도를 지나면서 영화의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일부로 편입되어 그들이 겪었을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20210118_153729.jpg 북유럽의 겨울숲


재작년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후쿠시마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먹어서 후쿠시마를 응원하자.”라는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내걸던 무능한 일본 정부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보내던 후쿠시마 사람들의 처량한 모습 그리고 후쿠시마의 대자연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느껴졌던 복잡한 심정이었다.


당시 나는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후쿠시마를 벗어나 도쿄에 도착한 즉시 증상이 호전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을 죄 없는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있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현재 진행형이다. 수많은 거짓과 은폐로 일관하며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2011년 3월 11일을 기준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폐망의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히 지울 수 없다.


20210118_154326.jpg 2024 유럽 문화수도 타르투


이념과 정치는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하며 흥망성쇠를 반복해왔다. 인류는 실체도 불명확한 이념과 정치라는 유령 때문에 전쟁을 반복해 왔고 수백 수천만의 목숨이 희생되어왔다. 과연 무언가를 위한 정치이며 이념일까? 단순히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러나 어떠한 이념과 정치도 영원할 수는 없다. 세계 최강을 노리던 소련이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무너져버렸듯이. “독립은 정말 소중한 거예요.”라고 강조하던 타르투 대학교 박물관 가이드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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