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발트해에서 희망을 만나다

코로나시대 나홀로 사아레마섬 표류기

by 알바트로스


20210202_153340.jpg 사아레마섬 최북단 팡가절벽(Panga Cliff)


깎아내린듯한 절벽 위에 서서 해 질 녘 노을을 보며 파도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자연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들과 그 사람의 따뜻한 온기였음을 깨닫고 나는 다시 차디찬 현실에 내팽개쳐진다.


20210202_155935.jpg 겨울의 팡가해변


이 곳 사아레마섬 북부에도 아름다운 절벽과 해변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눈 내리는 영하의 날씨에 해변에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곳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왔다. 함박눈이 내리던 그날 이른 아침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팡가 절벽(Panga Cliff)으로 향했다.


20210202_151124.jpg 설원과 숲 그리고 파도소리


끝없는 설원을 가로질러 사아레마섬 최북단 팡가(Panga)라는 마을에 왔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조차 희미하던 그 작은 마을의 해안가 숲을 따라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고요한 숲 속에 울려퍼치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만 가득하고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대화를 나눌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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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잡념을 비우고 지난 3년을 회상해본다. 세 번의 이직과 퇴사, 인간관계의 단절 그리고 돈 없이 세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생활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와 방황으로 물든 지난 시간들이었다. 나는 커리어와 인간관계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중심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생을 완강히 거부한 대가는 가혹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멋진 방황을 했다. 공부와 회사라는 정해진 길밖에 갈 줄 모르던 헛똑똑이었던 나는 달콤하고 가슴 떨리는 일탈을 감행했다. 2019년 겨울의 산토리니와 2020년 발리에도 해 질 녘 노을과 절벽 그리고 바닷가가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고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모했다. 그리고 2021년 겨울 나는 북유럽의 어느 외딴섬에 홀로 남겨져 좋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IMG_8935.JPG 2020년 여름 아름다웠던 발리의 선셋


자연의 법칙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들은 간단명료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고 생명들이 깨어난다. 바닷가에는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 해가 지면 또다시 해가 뜬다. 비행기는 더 높이 날기 위해 반드시 한 번은 땅을 향해 곤두박질칠 듯 내려간다. 이 모든 법칙에 예외는 없다. 이제 끝없는 하강을 멈추고 다시 하늘 저 높이 올라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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