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이즈웰 알이즈웰
불과 3일 전의 일이다.
비가 오던 그날 밤, 일을 마친 나는 기름과 땀으로 쩔어 있었고 더위에 지친 상태라 얼른 집에 돌아가 씻고 상쾌한 기분으로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지만 아무렴,
저기 내 눈앞에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사랑스러운 노랑 버스가 오고 있는 걸.
마치 남자친구를 애타게 기다렸다 만난 여자친구인 양
여기야 여기-! 하고 손을 흔들어 버스를 잡았다.
요즘따라 들을 음악이 없지만 습관적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귓구멍에 끼우고
흐르는 노래들을 배경음악 삼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내가 내릴 정류장에 다 와가서 빨간 버튼을 눌렀다.
내리려고 몸을 움찔움찔 댔는데 버스 기사는 정류장을 지나쳤다.
상황 파악을 하는 중에 버스는 그다음 정류장을 또 지나쳤다.
비는 바람과 만나버렸고 버스가 우회전을 하며 내리막길로 향했다.
짜증과 화가 슬슬 치밀어 오르는 걸 누르며
"Excuse me!!" 하니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승객들이 나를 쳐다본다.
상관없었다. 또 한 번 정류장을 지나쳐 짜증이 한계점을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비틀거리며 기사 냥반에게 다가가 "버튼 눌렀는데 그냥 지나쳤어요"
하니 "나한테 말해줬어야지"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벙벙하게 있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은 할 말을 생각하며 버스가 네 번째 정류장에 정차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의 모든 에너지를 일 하는 데 다 써버려서 싸우거나 따질 기운이 하나도 없던지라 그냥 '너 그런 식으로 일 하면 못 써'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며 바람이 나도록 획 돌아 카드를 찍고 내려버렸다.
그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 하는 와중에 걸어서 집으로 가는 데 몇 분이나 소요되는지 구글맵에 계산을 하니 무려 14분이 걸린단다. 순간 14라는 숫자가 너무 싫었다.
비가 원래 이렇게 기분 나쁘게 내리던가?
우산 아래 씩씩대며 걷다가 아까 버스가 우회전을 하면서 내려간 게 생각났다.
'그럼 좌회전을 하고 오르막을 올라야 집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근데 거기 경사가...'
그때, 그것이 결국 넘쳐서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악!!!!!!!!!!!!!!!!!!!!!!''
도저히 여기에 쓸 수 없는 욕들을 내뱉는 두 단어 사이사이마다 넣으며 잠시 인종차별주의자가 됐다가, 저주를 퍼부었다가, 기사에서 그놈으로 됐다가, 다시 그 새끼로 호칭을 바꾸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 남자의 행동에 짜증이 두 배로 늘고, 나의 소중한 14분을 뺏어간 것에 분노하였으며, 아 그냥 참지 말고 화낼걸!!!! 하고 뼈저리게 후회도 하면서, 걸을 때마다 빗물이 바짓단에 튀기는 것도 싫었고, 맞은편에 오는 차들의 헤드 라이트는 왜 이렇게 또 밝은 거야 하면서 불만을 표출하는가 하면, 버스 회사에 클레임을 걸어야지 무슨 말을 쓸까, 뒤집어엎어버릴까 하고 고민을 하며 집까지 꾸역꾸역,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다.
집에 도착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찬 물을 세게 틀고
"으아아아-!" 하고 이웃집이 들리지 않게 소리를 지르며 샤워를 마쳤지만
화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진정시키기 위해 브런치에 저장해 둔 글을 퇴고하다가
버스 홈페이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언제 침대에 누웠는지 모르지만
그다음 날이 됐을 때 놀라운 점을 두 가지 알아냈다.
첫 번째, 내가 그렇게 화를 낸 것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보니, 내가 살면서 그렇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 적이 있었더라도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 어제의 내 모습을 봤으면 적잖이 먹었을 충격을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무서움과 실망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분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모여 생긴 응축된 분노.
도저히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을 처음 느꼈다.
두 번째, 글을 쓰니 그 검고 뜨거운 화가 말끔히 없어졌다는 것.
이 문장과 저 문장의 위치를 바꿔야 할지, 여기에 쓸 단어는 이 세 단어 중 뭐가 적절한지,
조사는 요게 맞는지 조게 맞는지 고민하고, 쓴 걸 눈을 읽고, 소리 내어 다시 읽다 보니
불과 1시간 전에 있었던 일과 컴플레인을 거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근 10여 년 간, 화가 나면 그것을 다스리고 잊기 위해서 구글에 검색하고 유튜브도 찾아보고, 조언도 구해보고 누워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수련의 시간들은 다 뭐였는가? 글쓰기가 이런 효과도 있다고?
내가 그렇게 어려워하던 '화 가라앉히고 잊기' 문제가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거였다고?
최근에 읽은 책에서 작가가 '모든 일에 긍정의 의도가 있다고 믿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뭐, 여기에 이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덕분에 내가 발전이 됐네?
고마워요.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지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그대여.
덕분에 화를 참지 않고 표출하지 않아도 아프지 않게 푸는 방법을 알았네요.
그래서 용서하겠습니다. 그래도 일은 그렇게 하지 마세요.
- 1월 21일 호주의 아늑한 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