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세잔느 - 비엔나 II

베토벤과 리히노프스키 공작

비엔나에 와서 그림도 좋지만 음악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모차르트와 함께 리즈 시절의 비엔나의 음악을 대표하는 베토벤은 고용주의 비위에 맞추어 작곡을 해야 했던 선대음악가들과는 달리 어느 군주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최초의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베토벤 역시 당대 음악가들에게 신이 내린 직장으로 인기가 높은 비엔나의 궁정음악가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는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타이밍이다. 베토벤이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전 유럽을 호령하던 신성로마제국이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해체의 길에 들어섰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온 유럽이 전쟁터가 된 것이다. 아무리 베토벤의 음악이 위대하기로서니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음악가를 따져가며 새로 모실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돈의 세월을 보낸 끝에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유럽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었다. 살아남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비엔나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그런데 베토벤은 하필 딱 이때 청력을 상실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인 궁정음악가가 될 기회가 또 한번 날아갔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베토벤은 때 마침 구시대가 몰락하면서 도래한 시민사회가 원하는 웅장한 교향곡과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은 비르투오소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협주곡을 잇달아 작곡하여 독립음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고전파와 낭만주의를 이어주는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의 하이든이 시작한 교향곡을 완성한 동시에, 낭만주의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알리는 수많은 협주곡들을 작곡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살아생전에 스스로가 악성임을 잘 알고 있던 베토벤은 이러한 음악적 성취에 힘입어 당대 귀족들과의 수많은 일화에서 근거있는 자기애를 보여주었다. 이런 베토벤이야말로 교회의 권위를 높이거나 절대왕정을 과시하는 과거 음악의 목적에서 벗어나 음악가를 음악의 주인으로 삼는 인식론적 음악의 진정한 화신으로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보니 베토벤의 이러한 자기애와 관련된 비엔나의 한 공작과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높은 귀족에게 모욕을 당한 베토벤이 ‘공작은 당신 말고도 많지만 베토벤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나 하나뿐이오’라는 편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악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하인 취급하는 당시 귀족들의 속물스러움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공작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베토벤의 편지 한장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 귀족은 리히노프스키 공작이었다.


이 양반의 영지는 원래 지금의 체코 어디쯤에 있었는데, 당시의 많은 영주들처럼 자신의 영지는 대리인시켜 소작료나 받고 본인과 가족들은 당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비엔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을 것이다.


당시에 공작이라고 하면 대충 경상도나 전라도쯤 되는 면적을 다스리는 영주로 각 나라 별로 몇 명되지 않는 핵심 귀족이었다. 그런데 영주들이 각자 자기 영지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던 중세의 봉건제도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강력한 왕권으로 지방까지 통치하는 절대왕정으로 변모했다.


그러자 이들은 시골의 영지를 떠나 절대 권력의 핵심 근처에 머물며 왕의 측근이 되는 길을 택했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이 시작되자 프랑스의 공작과 백작들이 베르사이유로 몰려들었듯이 동유럽의 귀족들은 비엔나로 몰려갔다.


여기에 더해 수도에서의 화려한 사교생활에 한번 맛을 들리면 시골로 돌아가 글도 못 읽는 농민들 틈에서 대장놀이 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궁궐 정치의 암투에 지친 아빠가 낙향을 선언해도 비엔나 궁정 무도회장에서 황태자와 춤출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딸내미와 엄마가 따라갈리 만무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이런 사교계에서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공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예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독립음악가로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공무원인 궁정음악가에 비해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음악자영업자 베토벤 역시 이 분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베토벤은 교향곡 2번을 비롯해 여러 곡의 소나타를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이 분은 이렇게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만 남기고 행복하게 살다 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왕과 영주들이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하던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 평화로운 시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당시에 공작쯤 되는 타이틀을 달았다면 평생 왕의 눈치를 보고 주변 영주들과 세력다툼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잘못하면 영지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웠으니 말이다.


언젠가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친구 와이프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애가 둘인 이분이 얼마전 혼자 리스본에 한달간 다녀오셨다고 한다. 갑자기 왠 리스본? 하고 물어보니 리스본에 사는 친구 하나가 길게 휴가를 가면서 친구들 보고 집 비었으니 와서 놀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동창들이 간만에 모여 의기투합을 한다는데 남편한테 애들을 맡겨 놓고 한달간 포르투갈에 가 있을 핑계로 이거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아무튼 리스본 어땠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신선한 답이 돌아왔다.


“현철씨 있쟎아, 리스본이 유럽에서 제일 서쪽 끝이쟎아.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완전 변방이지. 그래서 역사적으로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목숨만 부지한 왕족 귀족들이 금붙이 싸들고 리스본으로 모여들었거든. 그러니까 리스본은 수백 년간 돈은 넘쳐나는데 할 일은 없는 왕자 공주들이 모여 살던 곳이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뭐하면서 남은 삶을 보냈겠어? 마음 비우고 인생 즐기다 가는거지. 그래서 그런지 리스본에는 아직도 나른한 향락문화가 남아있어. 그 분위기가 있어, 아직도. “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과 음악적 교류를 하던 당시는 유럽사에서도 손꼽히는 격동의 시기었다. 리스본 길거리에서 ‘공주님’하고 부르면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다 ‘저요?’ 하고 돌아볼 정도로 발에 채이는게 고향에서 쫓겨난 왕자와 공주들이었다.


당시는 르네상스를 계기로 먼저 천년을 이어온 교황의 권력이 쇠퇴하고 절대왕정이 등장한 시절이었다. 이 후 프랑스 대혁명에 이어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그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콕집어 말하자면 우선 리히노프스키 가문의 기반이 된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의 말발굽 아래 무너져내렸다. 목이 날아간 루이 16세를 보고 경악한 유럽의 왕들이 힘을 모아 간신히 나폴레옹을 몰아내었지만, 원래가 느슨한 연합체였던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 후 멀리 뚝 떨어진 스페인 등이 제국에서 빠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되어 명맥을 이어갔다.


수백년이 지나고 보니 이렇게 간단히 한줄 요약이 가능하지만 당시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격변의 시기였다.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섰다지만 그 중간에 라인동맹이니 하는 단명한 체제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이 와중에 줄 한번 잘못 섰다가 리스본으로 야반도주하는 귀족들이 속출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시기에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편하게 잠자리에 든 날이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뜬눈으로 지샌 밤이 더 많았을 당시의 권력가들에게 음악이 하나의 위안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집에 식객으로 있는 (단칸방에 살던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궁전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했다) 예술가들의 상처받은 영혼까지 달래주러 다니기에는 스스로가 짊어진 시대의 무게가 너무 컸을 것이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을 모욕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엔나를 점령한 프랑스 군을 위해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결국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것이지 그 당시 온 유럽을 정복할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던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한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어디에 가서 줄을 서야 했을까?


당시의 시대상과 귀족문화를 감안하면 예술교류야말로 패배한 제국의 귀족들이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점령군의 비위를 맞추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럴 때 한 번 잘 써먹자고 그 동안 그 많은 돈을 들여 예술작품을 사모으고 음악가들을 후원해온 것 아니겠는가?


당시 유럽 귀족들 사이에는 전쟁 중에도 상대방 장교는 죽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로 귀족이라는 강한 동류의식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국적불문하고 대개 한다리 건너 다 친인척으로 이어진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점령군 장교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미술품과 아름다운 가구로 장식된 살롱에서 베토벤 같이 이름 높은 음악가의 연주를 들려주며 교류를 이어간다면 이 격동의 세월 속에서 리히노프스키 가문이 살아남을 확률은 분명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공작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요청을 받은 베토벤이 거절을 넘어 격분한 것이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베토벤은 그냥 나폴레옹을 싫어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싫어한 이유도 사실 별거 없었다.


살아 생전에 자신이 악성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베토벤은 늘 평민으로 태어난 자신의 출신 성분을 원망하면서 부모 잘만난 덕에 떵떵거리며 사는 귀족들을 고까워하면서도 동경했다. 베토벤뿐 아니라 당시 직업 특성상 늘 귀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평민출신 음악가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시대를 초월한 비르투오소로 명성을 떨치며 자기 잘난 맛에 살던 파가니니도 말년에 와서는 귀족들에게 수시로 공짜 연주를 조공하는 눈물의 똥꼬쇼를 벌인 끝에 늦둥이 외아들을 남작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평생을 난봉꾼으로 살던 파가니니도 말년에는 가족의 정이 그리웠던지 갑자기 나타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을 군소리 없이 거둬들여 한없이 아끼고 위한 끝에 결국 귀족으로 신분상승까지 시켜주었다. 아들도 그 보답으로 노부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극진히 모시며 훈훈한 마무리를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자뻑이라면 파가니니를 우습게 뛰어넘는 베토벤은 자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귀족이 되고 싶어했다. 궁정음악가 자리를 노린 것만큼이나 호시탐탐 신분상승의 기회를 노리던 베토벤은 결국 실패는 했지만 피아노를 가르치던 귀족집 딸을 꼬셔 결혼하려고도 했고, 또 조상들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이름에 그냥 붙는 호칭인 반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독일어에서 귀족에게 붙는 폰과 헷갈리자 굳이 아니라고 해명은 안하는 센스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굳이 말하자면 베토벤 Beethoven이라는 성에서 Beet는 우리가 흔히 서양순무라고 부르는 빨간 색 무, 비트 Beet를 말한다. 베토벤은 Beet와 Hoven이 결합된 성인데, 아인트호벤 같은 네덜란드의 축구단 이름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호벤 Hoven은 농부들이 소작하는 토지의 단위이다. 그냥 밭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아인트호벤은 끄트머리 밭이라는 뜻으로 영주의 영지에서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동네란 말이고, 베토벤은 비트 호벤, 그러니까 무밭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결국 무밭집 루드비히란 이름으로 베토벤의 조상들은 전형적인 중부유럽의 농사꾼들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랄 것 없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귀족들과 어울리게 된 베토벤은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원망했다.


그러던 차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신분폐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뒤이어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자신이 무시하면서도 동경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왕과 귀족들을 차례로 쓸어버렸다. 여기에 고무된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유럽 최강 합스부르크 왕가들을 차례로 박살내고 자신감 뿜뿜한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버리자 이에 격분한 베토벤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이 교향곡의 제목을 그냥 영웅 – 에로이카로 바꿔버렸다.


그러니까 출신성분 콤플렉스가 심했던 무밭집 루드비히는 처음에는 귀족이 되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실패하자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린다는 심정으로 계급투쟁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평생 만나본 적도 없는 나폴레옹을 계급철폐의 영웅으로 숭배도 했다가 증오도 했던 것이다.


혼자서 내 마음 속 보나파르트를 그렸다 지웠다 하는 베토벤의 속을 알 리 없는 공작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식객인 베토벤에게 점령군을 위한 연주회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느닷없는 거절에 당황해 언쟁을 벌이다가 그간 쏟아부은 막대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감히 악성을 몰라보고 하인 취급한 속물공작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예의 그 짧은 편지를 남기고는 공작의 저택을 떠나 인근의 오퍼스도르프 백작집으로 향했다. 모멸감은 느꼈지만 단칸방을 벗어나 한번 맛본 안락한 귀족의 집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이 후에도 여러 차례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혔을 것이다. 하지만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이 일을 곧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집에 식객으로 있던 음악가의 상처입은 영혼까지 달래주러 다니기엔 그 시절의 공작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결국 살아남았다. 뒤이어 등장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도 이 가문의 이름은 건재하였다. 적어도 베토벤과 언쟁을 벌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손자대까지는 잘 버텨내었다.


하지만 곧 이 집안의 이름은 유럽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얼마 후 뜬금없이 남미에 리히노프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집안의 후손들은 현재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 영지는 없이 가문의 작위 만을 세습하며 살고 있다.


이들의 영지가 있던 체코가 공산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식적인 신분제가 여전히 남아있어 공작쯤 되면 아직도 토지 백만 평쯤은 기본으로 깔고가는 영국과 달리 공산국가가 되어버린 동구권에서 과거의 공작이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어찌보면 소련에 넘어가버린 체코의 영지를 떠나 국제정치와 문화의 중심인 비엔나에 살고 있던 것이 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헝가리는 체코와 함께 공산국가가 되어버렸지만 오스트리아는 서구에 남게 되어 영지는 잃었어도 적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유럽 전체를 포화로 물들인 세계대전이 잇달아 발발하자 이들은 앞서 수 백년 동안 리스본으로 피신했던 비슷한 처지의 귀족들처럼 서둘러 보석함에 있던 패물과 찬장 속의 은쟁반을 챙겨서는 아예 대서양을 건넜다.


한 때 유럽의 중심에서 밀려난 귀족들에게 여생을 보낼 피난처를 제공했던 이베리아 반도는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몰락한 귀족들에게 나른한 향락을 즐기며 여생을 보내는 여유를 제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은 유럽의 땅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대륙으로 향했다. 과거의 공작과 백작들은 민주주의와 대통령제가 자리잡은 미국보다는 한 때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던 스페인 왕가와 포루투갈의 유산이 남아있는 남미를 택했다. 당시의 브라질은 식민 모국인 포루투갈의 왕자가 독립을 선언하고 황제로 군림하던 왕정국가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때 브라질에서 합작사업을 하던 EBX 그룹의 오너 역시 이베리아계인 Batista라는 성을 쓰는 집안이었다. 이들도 조상 어느 때엔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당시 만난 Batista 가문의 둘째 아들은 같은 그룹사는 아니지만 선대부터 함께 사업을 하는 집안이라며 한 벤처캐피탈을 소개해 주었다. 사장을 만나 이런 저런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Batista 집안과는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한바탕 호탕하게 웃은 이 사람은 자기 집안의 농장이 Batista 가문 농장 바로 옆에 있어 대대로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이 때 대서양을 건넌 유럽의 귀족들은 품안에 고이 싸들고 온 은촛대와 금수저를 주고 남미의 광활한 초원을 헐값에 사들여 대농장주가 되었다. 그 후로 수백 년이 흐르자 각각의 가문들이 경기도 면적만큼씩 차지하고 있던 대농장 어딘가에서는 석유가, 또 어딘가에서는 철광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곧 이를 개발하여 오늘날 남미의 자원재벌이 되었다.


한 때의 후원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가문과는 역사에 길이 남는 악연이 되어버린 베토벤은 파가니니의 외아들처럼 귀족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했던 공작과 백작은 예술가를 하인 취급한 속물로, 그 밑에서 음악으로 생계를 이어간 베토벤은 악성으로 꼽는다.


바흐와 헨델이 음악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면 한 때 귀족들이 손님에게 자랑하고 싶은 명품오디오쯤으로 여겼던 베토벤은 명실상부한 음악의 왕이다. 이에 비하면 당시의 공작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었길래 이런 베토벤을 하인취급했을까?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경쟁하던 국가의 귀족들이 오늘날까지 모두 작위를 유지하고 있는 연합왕국인지라 과거의 경쟁자들이 모두 나가떨어진 유럽본토국가들에 비해 귀족의 수가 현저히 많다.


그런데 갓 서른 두살로 이 중에서 제일 막내인 웨스트민스터 공작, 휴 그로스베너의 공식 재산은 130억달러, 한화로 17조원쯤 된다. 얼마 전까지 그로스베너는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20대’로 불리었다. 참고로 포브스에서 집계한 이재용 회장의 재산은 91년생 공작의 딱 절반 수준이다.


아직 미혼이신 공작전하는 생일 파티 한 번에 백억쯤은 가볍게 쏘시는 걸로도 유명하다. 이쯤되면 철부지 귀족의 돈지랄같지만 이 분에게 백억은 전재산이 17억인 사람이 여름 휴가로 백만원을 쓴 것과 같다.


원체 귀족수가 많았던 영국에서도 민주국가가 되면서 쪼그라든 재산이 이 정도이니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성로마제국의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에게 욕을 먹어가며 지켜낸 가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따졌을 때 이거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만한 재산을 물려받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그걸 지키는 것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베토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공작 입장에서도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 널렸다며 무시당하기에는 조금 억울하지 않았을까?


“There are many princes and there will continue to be thousands more, but there is only one Beethoven” – 베토벤이 남긴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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