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가 선사한 전율
늘 그랬듯이 아침에 눈을 뜨고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호텔 레스토랑에 내려가서 조식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호텔에서 먹는 아침식사는 조식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을 먹었다. 첫날이라 먹을만 하지만 사나흘을 같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다보면 이것도 곧 물릴 것이다.
커피 한잔을 더 시키고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양복을 입고 어디론가 분주하게 가는 사람들. 나도 곧 저 대열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보려고 시계를 보는 순간, 퍼뜩 깨달았다.
오늘 나는 누군가를 만나러 택시를 불러 타고 급하게 갈 일이 없다. 출장이 아니라 여행을 온 것이다. 다만 너무 오랫 만에 겪는 일이라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이다.
새삼스레 마드리드의 가을 아침을 온전히 즐기게 되었다.
한동안 여행을 안가게 된 이유는 혼자 다니는 여행이 그닥 재미없어진 까닭이었다. 스무살에 처음 배낭여행을 떠난 후로 몇 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 떠났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이 떠나기 전의 설레임과 도착해서의 즐거움, 그리고 돌아와서 이를 돌아보는 재미가 다 따로 있기 마련이다.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우연히 만난 낯선 동행과의 시간도 다 나름 즐겁지만 돌아온 후에 이를 함께 돌아보며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혼자 떠나는 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게 쌓이다 보니 그만 여행의 재미마저 시들해져버렸다.
그렇게 휴가 때마다 여행을 갈까 말까 갈등을 하는 와중에 항공사들이 아주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했다. 바로 마일리지에 유효기간을 둔다는 것이다. 출장 때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마일리지를 보면 여행을 가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일리지 유효기간 통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몇천 마일이 날아간 후에야 ‘그래 어차피 없어질 마일리지라면 그냥 아무데라도 가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마일리지로 여행할 때의 기본은 같은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도시를 고르는 것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여행이나 출장으로 안가본 곳을 고르다보니 자연스레 마드리드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스페인에 안가본 것은 아니다. 유레일패스 한장 들고 온유럽을 배회하던 대학생 시절에 잠시 스쳐 지나간 적이 있긴 했다.
매해 여름이면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비뇽에서 유명한 연극 축제가 열린다. 니스를 거쳐 아비뇽에 도착한 나는 하루종일 아비뇽의 거리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과 마임을 즐기다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극축제가 열리는 한여름의 아비뇽에 당일 묵을 숙소가 남아있을리 만무했다.
왜 미리 예약을 안했냐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라떼는 그랬다.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드북에 나오는 숙소 정보는 지면의 제약상 매우 제한적이어서 미리 알아볼만한 숙소도 뻔했다. 게다가 아비뇽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숙소 예약을 하려면 공중전화로 시외전화나 무려 국제전화를 해야했다.
문제는 비싼 돈 들여 전화했는데 방이 없다고 하면 전화비를 날리는 거다. 기껏 방이 있어도 성수기 가격이 너무 비싼 경우도 많아 학생 예산에 맞는 방 하나를 잡으려면 장거리 전화 여러 통을 해야 했다. 잘못하면 하루밤 방값과 전화비가 맞먹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주머니 뻔한 학생 여행객들은 그 돈을 전화비에 쓰느니 그냥 현지에 가서 부딫혀 보는 것이다.
방이 없어도 걱정할 것은 없다. 언제나 대안은 있었다. 바로 노숙을 하는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스무 살의 여행자였고, 적어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난민들이 몰려들기 전인 90년대의 유럽은 그런 학생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관문인 뮌헨역에서는 기차 연결편을 기다리며 역에서 노숙하는 학생들을 위해 아예 넓직한 라운지를 하나 내주었다. 라운지 입구에서 유레일 패스나 국제학생증을 검사해서 노숙자들의 유입을 막았고, 문앞에서 경찰이 보초(감시?)를 섰다.
이 곳에서 동서유럽을 서로 엇갈려 여행하던 여행객들끼리 동전을 꺼내들고 포커를 치며 밤을 지샌 것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다. 유로라는 것이 도입되기 전의 일이다. 손바닥만한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객들도 바로 이웃나라에 도착할 때마다 환전을 해야 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다음 나라로 넘어갈 때 주머니에 잔돈푼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뮌헨역 하우스에서는 환율이니 이런거 안따지고 무조건 동전 하나가 칩하나였다. 체코나 헝가리에서 온 여행객들은 쾌재를 부르며 동전을 수북히 쌓아놓고 올인을 외쳤고, 운나쁘게 프랑스나 스위스를 들렀다 온 여행객들은 울상을 지으며 조금이라도 잔돈푼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졌다.
북유럽에서 온 여행객들은 크로네 (노르웨이 화폐)를 포린트 (헝가리 화폐)와 맞바꾸느니 그냥 구경만 했을지도 모른다. 광박은 두배가 국룰이듯 만국의 동전은 평등한 것이 그 때 그 곳의 로컬룰이었다.
Münze aller Länder vereinight Euch! 만국의 동전이여 단결하라!
동유럽이 붕괴된 직후 돈 취급도 못받던 체코의 코로나나 헝가리의 포린트를 들고 뮌헨역의 큰 손으로 군림하던 친구들이나 스위스 프랑이나 독일 마르크를 들고 발발 떨며 주머니를 뒤지던 친구들이나 모두 지금쯤 지구상 어느 구석에서 아줌마 아저씨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숙이 자연스러웠던 때인지라 몇 군데 시도해본 백팩커스와 유스호스텔이 만실이자 자연스레 아비뇽 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작은 시골역인 아비뇽에서는 뮌헨역 같이 라운지를 따로 내주지는 않았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아비뇽은 연극 축제기간에만 반짝하는 작은 도시였다. 나보다 먼저 역 앞에서 자리 펴고 있는 여행객들 사이에 끼어 대충 수다 좀 떨고 있는데 역으로 들어오던 한 무리의 한국 여행객들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주무실건가요?"
“네, 아비뇽에 방이 없네요."
“조금 있다 바르셀로나 가는 밤기차있는데 거기서 주무실래요?"
경험상 꼭 떼제베나 이체 같은 고속철이 아니라도 유럽의 인터시티 정도 되면 좌석도 뒤로 많이 제껴져서 맨바닥 노숙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 대충 이야기거리 떨어진 서양애들하고 무료하게 있기보다는 한국사람들 틈에 끼는 것이 속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정에 없던 스페인 여행을 한 후 20여년 만에 다시 스페인을 가게 된 것이다.
혼자하는 여행은 으례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너무 뻔한 코스이긴 하지만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미술관 만한 곳도 없다. 그렇게 해서 마드리드에 도착한 첫날,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는 마드리드의 랜드마크인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고야와 블랙페인팅
말로만 듣던 고야의 블랙페인팅을 실제로 본 첫 느낌은 전율이었다. 지금와서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해보라면 자신이 없다. 보면 알게 된다라는 흔한 말이 답이 될까. 전율이란 대상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멋있다 혹은 무섭다’ 같은 생각이 아예 들지도 않는 진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일지 모른다. 곧이어 가슴 한쪽에서 울컥함이 느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이 그림이 슬픈 것인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슬퍼졌다.
한참을 그림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 멀찍이서 전체적인 구도를 본 후에 가까이 가서는 습관처럼 붓터치를 살펴본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크지 않았고, 재능은 크지 않은 열정에 비할 바도 아니어서 물감낭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청소년 시절의 몇 년을 이모의 화실에 꼬박꼬박 출근하며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있는지라 남의 그림을 보다 보면 이 사람은 이걸 어떻게 표현했는지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붓터치를 꼼꼼히 본다.
그냥 붓이 지나간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아 이 사람은 이걸 이렇게 그렸구나’하며 고개 한번 끄덕이고 다음 그림 보러간다. 그게 전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멀찍이서 찾아온 전율이 지나가고 가까이 다가가 붓터치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경외감이나 감탄을 넘어선 위축감이 들었다.
고야는 이 전율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표정을 굵은 붓터치 몇번으로 쓱싹해서 그려버렸다. 이보다 조금 후에 등장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납작한 붓을 이용해 타슈 (프랑스어로 얼룩)라고 불리는 짧고 굵은 붓질을 선호했다면, 고야는 동양화를 연상케하는 일필휘지의 강한 붓터치로 그 모든 표정과 감정을 단숨에 그려내었다.
옆에 있는 설명판을 보았다.
‘산이시드로로 가는 순례자 The Pilgrimage to San Isidro 1820-1823.’
들어본 그림이었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마야나 자기 아들을 들고 먹는 사투르누스 만큼은 아니지만 유명한 그림이다. 하지만 화집에 있는 작은 인쇄본을 보는 것하고 작가가 의도한 실제 크기의 작품 앞에 서는 것은 마치 집에서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을 공연장에 가서 라이브로 보는 것 이상의 차이였다.
사실 전율에는 그림의 크기도 한 몫 했다. ‘산이시드로로 가는 순례자’는 엄청나게 큰 대작이다. 그 큰 그림에서 고야는 분노마저 사라진 슬픔과 비참함, 원통함과 무기력이 골고루 담긴 표정을 빗자루 만한 대붓으로 쓱싹쓱싹 그려냈다.
왜 눈시울이 뜨거워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 만큼 슬픈, 아니 슬퍼야만 되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반은 18세기까지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대제국 스페인이 서서히 쇠퇴하는 시기였다. 대제국 스페인이 몰락하기 시작한 발단이 된 것은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나폴레옹이 처들어온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었다.
바로 이 그림의 배경이 된 전쟁이다. 그 이전에도 소위 무적함대가 영국해적떼에게 관광당하면서 바다의 패권을 내주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인 스페인은 적어도 유럽 본토에서는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에도 한동안 제국의 풍모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제대로 일격을 가한 것이다.
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19세기 초반은 영국에서 막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곧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지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한쪽에 쳐박힌 스페인은 이런 과학과 기술의 교류에서 소외되었다. 이웃나라들은 증기기관을 만들어 방적기를 돌리며 예전보다 수백 배에 달하는 생산성의 발전을 누리고 있었지만, 후진농업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의 스페인에게 이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일이었다.
대항해 시대에는 유럽본토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통로에 위치한 덕분에 이웃의 포루투갈과 함께 바다의 왕자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과학과 기술이 교류하는 통로에서 비켜난 지리적 입지가 결국 제국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1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증기기관에 대한 세계 최초의 특허는 하필이면 스페인의 발명가 제로니모가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무려 200년 전인 1606년의 일이다. 대항해 시대에는 세상의 중심인 스페인에 돈과 사람이 모여들어 분명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긴 있었지만 이제는 다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렸다.
산업혁명에서 소외된 전근대적인 농업국이 나폴레옹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며 장장 20년에 걸쳐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유일한 산업인 농업이 황폐해진 19세기 초반 스페인 민중의 삶은 가히 프롤레타리아 혁명 직전의 러시아에 비할 만큼이나 비참한 것이었다.
고야가 산이시드로라는 동일한 배경을 놓고 그린 두개의 그림에서 그 처참한 상황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이 두 그림의 시차는 딱 30년이다. 그 30년 사이에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포루투갈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Meadow of San Isidro 산이시드로의 풀밭, 1788, Goya 공식 홈페이지
The Pilgramage to San Isidro 산이시드로로 가는 순례자, 1820-23, Goya 공식 홈페이지
이 시절은 스페인 민중에게도 검은 시절이었지만 고야 자신에게도 검은 시절이었다. 베토벤에게 일어난 일이 고야에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음악과 미술의 두 거장은 비슷한 시기에 청력을 상실했다. 베토벤과 고야 모두 당시 유행하던 매독에 걸려 귀가 멀었다는 설도 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고야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집에 처박혀서는 당시의 음울한 스페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 이라고 불리던 그 집에서 그린 그림들은 훗날 검은 그림 Black Painting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산이시드로로 가는 민초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820년이라는 연대를 보고 19세기 초의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그림을 보면 그 상황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고 이들이 절망이라는 감정마저도 포기해버렸는지 바로 느낄 수 있다. 고야는 빗자루만한 붓터치 몇 번으로 2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 21세기의 관객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그 느낌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천재란 이런 것이다. 고야가 저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스페인 경제사 수천 페이지를 쓰는 노력과 그 이상의 재능이 필요했지만 관객이 그 그림을 보고 화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찰나 이상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 보는 그 순간이면 족하고도 남는다.
반면 그림이 아닌 글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몇 시간 동안 수백 페이지의 19세기 유럽경제사 책을 주저리 주저리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도 머리로는 이해가 될지 몰라도 당시의 상황이 가슴으로 느껴지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것이 예술의 힘이다.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한 강연에서 ‘소설가들이여 붓을 꺾으라’고 일갈하지 않았던가. 소설가들이 두꺼운 책 한권에 담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시인은 반 쪽이면 족하다고 말이다.
마드리드에 왔으니 당연히 프라도 미술관을 가보고, 또 프라도 미술관에 왔으니 의례히 고야부터 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검은 그림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한쪽 벽에 매달려 아들을 먹고 있던 사투르누스에게 먹다 만 아들 머리로 크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멀리서 온 이방인이여, 나를 그린 이의 예술혼을 경배하지 않고 무얼하는 겐가.”
Saturnus devouring his son 아들을 (처)먹고 있는 사투르누스, 1820-23, Goya 공식 홈페이지
들어갈 때와는 아주 달라진 기분으로 프라도 미술관을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았다. 미술관 인근 골목에서 구글맵 평점이 아주 높은 집을 찾아 들어갔다.
스페인에 온 첫날이니 응당 해산물 빠에야를 시켜놓고 먹는데 별 맛이 없었다. 왜 이럴까? 주위를 둘러보니 늦은 점심이지만 스페인 사람들로 제법 차있었고, 다들 옷도 잘 차려입은 꽤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벽에 걸린 유명 손님들의 흑백사진을 보면 전통 있는 집인 듯 했다. 그런데도 맛이 없다. 순간 퍼뜩 깨달았다.
아 혼자 먹으니까 맛이 없는 거구나.
마음을 바꿔 혼자 먹으면 맛이 없는 식도락 기행 대신 혼자 해도 재미있는 쇼핑 투어로 컨셉을 바꾸었다. 이베리아 반도 일주를 위해 렌터카를 빌려 마드리드를 떠나면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서쪽에 있는 아울렛이었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과 쇼핑이다.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동양 아저씨가 상점을 누비고 다니자 환대가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 어학연수 갔을 때가 생각났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날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쇼핑을 했다. 속칭 IMF 이전인 당시는 원화 가치는 고평가되었고, 아직 유로화가 등장하기 전이라 유럽에서의 쇼핑은 하면 할수록 남는 장사였다.
이삼일 동안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옷과 신발들을 찜해놓고는 마지막 날 폭풍 쇼핑을 시작했다. 양손 무겁게 쇼핑백을 가득 든 스무살의 동양인이 가게 문 앞을 얼쩡거리자 어제까지 나를 거들떠도 안 보던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손짓했다.
스미마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