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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세잔느 -너무 쉽게 오른 마추픽추

마추픽추와 히피

“허무하지 않으세요? “ 


물끄러미 발 아래의 유적지와 안개 너머로 보이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동행자가 문득 던진 한마디였다. 


산이 아니라 빌딩 옥상에 올라와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높은 산봉우리에 숨어있는 돌을 쌓아올린 바위 도시이니 어쩌면 빌딩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허무함, 너무 쉽게 와버렸다는 허탈감.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었다. 이미 올라와버렸으니까 말이다. 


남미를 여행한다면 어디를 가고 싶을까? 우유니 사막의 야경은 정말 멋진 광경이다. 운이 좋으면 (나는 그렇게 운이 좋지는 못했다) 문자 그대로 쏟아질듯한 별이 소금물에 반사되며 디즈니 만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아마존은 한번쯤 가볼만 하겠지만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은 막상 가보면 그냥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해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리우데자네이루 언덕 위의 예수상은 분명 장관이지만 예수상을 보자고 지구 반대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나 칠레의 파타고니아 등등도 모두 가보면 좋지만 단지 그 곳을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갈 필요는 없다. 해변을 즐기려면 지중해나 가까운 동남아도 충분하고 대자연을 보려면 내 경험으로는 캐나다나 뉴질랜드가 훨씬 여행하기에 쾌적하면서도 웅장한 광경을 보여준다. 


물론 전세계에서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경험했다고 하면 모를까 굳이 캐나다 로키산맥과 뉴질랜드 남섬 트래킹을 제껴놓고 지구 반대편의 파타고니아를 먼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마추픽추는 다르다. 남미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하는 곳, 아니 마추픽추를 오르기 위해 남미에 가야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미슐랭 3스타라고 해야할까. 그 곳을 방문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할 가치가 있는 장소 말이다. 나머지는 잘쳐줘야 1스타이고 우유니 사막은 2스타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마추픽추에 대한 느낌은 아마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세대는 가본 적도 없고, 가봤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도 없는 마추픽추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터넷도 케이블도 없이 간혹가다 서구문화를 접하던 시절에 서구를 휩쓴 68혁명 (1968년에 프랑스에서 시작한 사회운동, 이후 반전운동과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세대의 히피 문화 끝물 한 두 방울이 어쩌다 태평양을 건너 이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당시 서구 락밴드들의 노래에는 유독 마추픽추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갔다. 


말그대로 1968년을 기점으로 하는 68혁명과 히피문화가 탄생한 1960년대는 양차 세계대전으로 지연되었던 2차 산업혁명이 정점에 달하며 사람사는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시기였다. 


자동차의 대중화, 냉장고, 에어컨의 보급, TV와 휴대용 라디오 등이 나오며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찌보면 컴퓨터와 인터넷을 제외한 선진국의 생활상은 1960년대 이후로 크게 변한 바가 없다. 19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물자를 생산하느라 미루어졌던 이 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사회로 퍼져나간 시기였다. 


거기에 더해 전쟁이 너무 오래 지속되며 세대를 막론하고 전쟁에 염증을 내고 평화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결국 한반도에서 질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곧 베트남 전쟁이 이어졌다. 


그러자 전쟁터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 바로 전 세대의 삶을 생생하게 목격한 세대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남의 전쟁인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시 베트남에 가서 죽으라는 정부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들은 온몸으로 저항에 나섰다. 


히피로 상징되는 반전세력들은 이런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했다. 핑크플로이드나 레드제플린같은당시의 락밴드들은 정부와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기존 교육시스템과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꿈꿨다. 


Stairway to Heaven –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나 호텔 캘리포니아 같은 은유적인 노래를 통해 이들은 기계화된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어딘가에는 있을 몽환적인 세계로의 도피를 상상했다. 이들은 당시에 막 자리잡기 시작한 서구의 물질문명 – 전자제품과 기계공업 – 에서 벗어나 탈서구, 탈문명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마추픽추와 히피문화


마추픽추는 이들의 무릉도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서구제국주의가 종식된 것 같았지만 냉전이 시작되며 서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통해 동양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지배력 유지를 위한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기 싫었던 젊은 세대들은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폭력적인 서구와 평화로운 정신세계의 동양이라는 이원적인 프레임을 만들어갔다. 


서구의 사고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히피들도 자유롭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동양의 불교와 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요가와 명상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인도여행이 유행하며 한국에도 책이 번역되어 나온 오쇼 라즈니쉬 같은 명상재벌이 탄생하기도 했다. 라즈니쉬는 물질문명을 피해 인도로 피난온 서양젊은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인도의 명상과 참선을 가르쳐서 떼돈을 벌었다. 유명세를 탄 후에는 아예 미국 본토 시장으로 진출한 라즈니쉬는 롤스로이스 99대 컬렉션을 완성하며 무소유로 일구어낸 풀소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시점에서 불과 수십 년 전에 서구에 처음 알려진 마추픽추 (1911년에 발굴되었다)는 이들에게 완벽한 이상향으로 보였다. 폭력적인 서구 제국주의를 피해 안데스 산맥의 까마득한 고원으로 도피한 잉카문명의 마지막 왕조. 번잡한 산 아래 세계에서는 보이지도 않게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산꼭대기의 신비한 도피처. 서구물질문명을 배격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유토피아로 보였다. 


곧 이들이 즐겨듣는 노래에 마추픽추라는 단어가 난무하기 시작했고, 바다 건너 한국에 살던 이들의 귀에도 중독성 강한 멜로디에 실린 이 임팩트 강한 네글자 단어가 맴돌았다. 마~추 픽추! 하고 말이다. 


마추픽추는 노래로만 불려진 것이 아니었다. 동양의 신비한 정신세계를 숭상한 나머지 미국과 유럽에서 번 돈을 인도의 구루들에게 다 갖다 바치면서 거지꼴로 요가와 명상을 배우러 다닐 정도로 실행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곧 페루의 마추픽추는 이 신비의 잉카문명 최후의 안식처를 찾아나선 서양 히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처음에 마추픽추를 찾아나선 이들은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도시의 건축목적 자체가 산 아래에서 공격은 커녕 올라가기도, 아니 찾기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들은 난데없이 산 위의 돌무더기를 보겠다고 찾아온 낯선 서양인들에 놀란 현지인들을 가이드로 고용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배낭을 메고, 침낭을 들고, 또 본국에서 몰래 들고 온 향기나는 풀떼기를 숨겨가지고 말이다. 마추픽추 인근의 잉카 고대도시인 쿠스코를 출발한 히피들은 며칠씩 산을 올라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마추픽추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한참 전의 일이다. 


이들은 마추픽추 일대에 텐트를 친 채 마리화나를 피우고 기타를 치며 한동안 머물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하산했다. 매일매일 입장인원까지 통제하며 정상에서 숙박은커녕 화장실도 못가게 하는 지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뉴욕 시립대 City University of New York 사학과의 마크 라이스 Mark Rice 교수는 아직 발굴도 다 안끝난 마추픽추에서 벌어진 이 난장판을 보고 ‘히피들의 침략 Hippie Invasion’이라고 불렀다. 


히피들의 대다수가 마추픽추로 간 것은 아니었다. 히피들의 본진은 역시나 인도와 네팔로 향했다. 이들은 심지어 인도까지 육로로 갔다. 버스를 타거나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교통편이 여의치 않은 곳에서는 걷기도 했다. 유럽을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와 네팔까지 이어지는 이 루트를 ‘히피 트레일 Hippe Trail’이라고 불렀다. 


어찌보면 마추픽추에 간 히피들은 대세 아이돌을 숭배하는 대신 나만의 띵곡을 찾아 헤매는 비주류 문화 추종자였을 것이다. 


방콕의 카오산로드가 동남아시아 히피들의 성지가 된 것도 인도에 도착한 히피들이 내친 김에 몇걸음 더 간 곳이 태국이었기 때문이다. 태국에 온 이들 중 일부는 당시 공산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 막힌 북쪽과 동쪽 대신 남쪽으로 내려가 발리에도 히피 문화를 남겼다.


히피 트레일 Hippie Trail, Wikipedia



방콕과 발리에 히피 문화가 여태 남아있듯이 마추픽추를 둘러싼 이런 히피 문화 역시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있다. 


마추픽추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쿠스코에 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가서 그냥 마추픽추만 보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쿠스코 자체도 잉카분위기와 히피문화가 적당히 조화된 아주 매력적인 도시이지만 기왕 먼 바다를 건너와서 이것만 보고 집에 가기는 아쉬운 관광객들의 뽕을 뽑기 위해 페루정부는 마추픽추 주변에 다양한 투어 옵션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마추픽추 여행객들 대부분이 다녀왔을 성계 – 성스러운 계곡 투어이다. 사실 여기를 투어로 가봐야 별 것 없다. 이 계곡은 잉카 제국 당시 옥수수를 키우던 지역으로 투어로 가서 주변에 있는 산속 염전과 소소한 잉카 유적지 등을 둘러보는 곳이다. 마추픽추까지 와서 그냥 가기는 아쉬우니 한번 둘러보는 곳인데 여기에 숨겨진 보석이 있다. 바로 마약이다.


나 역시 그냥 쿠스코 분위기가 좋아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반나절 돌면 뻔한 쿠스코인지라 슬슬 우유니가 있는 볼리비아로 넘어가기로 하고 쿠스코 외곽 한적한 동네에 있는 볼리비아 영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한참을 기다려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하긴 쿠스코에 주재하는 볼리비아 영사가 뭐가 급하다고 점심시간 딱 지켜가면서 살까. 영사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문 앞에 서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말동무가 생겼다. 


멀리서 오는 모습만 봐도 기나긴 금발의 굵직한 레게머리를 한 딱 철지난 유럽 히피의 모습이었다. 아마 마지막으로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는 본인도 기억 못할 것이다.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몸빼바지와 때에 찌든 칼라풀한 티셔츠까지 돈없고 할일없고 시간많은 유럽백패커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안데스의 땡볕 아래서 마냥 기다리는 판에 잡담이라도 할 상대가 생겼으니 다행이었다. 


이 친구는 코소보에서 왔다고 했다. 코소보가 나라일까 아닐까. 본인은 나라라고 주장한다. 여권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아직 승인을 안한 나라가 많다. 세르비아는 당연히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알바니아와 한데 묶어 한 나라로 인정을 할지 코소보를 별개로 독립시킬지 아직 열강들의 이해가 엇갈리기도 한다. 이 친구말로도 자기는 알바니아계라고 했다. 


아무튼 이 문제는 풍채좋은 영사가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아마 본국 외부무에 전화해서 지침을 요청했을 것이다) 물어본 후에도 코소보 여권에 볼리비아 비자를 찍어줄지 말지 결정을 못하는 바람에 이 친구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친구가 돌아간 곳은 쿠스코가 아닌 성계였다. 자기는 성스러운 계곡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그 할 일 없고 볼거 없는 성계에서 묵는다고? 궁금해서 더 물어보니 세상에나,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벌써 6개월째 지내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뭐하는데 6개월이나 있냐고 하자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이 명상하기 아주 좋은 동네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뭐하는 놈인지 감이 딱 왔다. 너 뽕쟁이구나. 코소보 히피가 페루 산골짜기 현지인 마을에 자리잡고 할 일이 그 좋은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볼리비아에 간다는 이유도 뻔했다. 아까 이야기하다 보니 이 친구는 볼리비아에 우유니 사막이라는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한국인 여행자라면 응당 우유니 사막을 가기 위해 볼리비아를 가는 것 아니겠는가. 우유니도 안가면 볼리바아엔 뭐하러 가냐니까 그냥 여기 오래있다보니 지겨워서라고 했다. 


아마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6개월째 뽕을 빨고 있다 보니 (남미 최빈국으로 물가도 싸고 치안은 엉망인) 볼리비아에 가면 생활비도 싸고 어디어디에 가면 더 싸게 뽕을 맞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보나마나 라파즈에 가는 것이겠지. 


볼리비아가 어느 정도냐면 수도 라파즈에는 Route 36이라는 유명한 코카인바가 있다. 대놓고 마약을 판다고 광고하는 곳인데 당연히 뒷배경이 있어 단속은 안받겠지만 예의상 한달에 한번씩 장소를 옮기는 성의 정도는 보여가며 영업을 하고 있다.


어감상 뽕이라고 했지만 유럽 히피들이 남미로 몰려드는 이유는 코카인 때문이다. 남미 어느 동네를 가나 길거리에 산더미처럼 잎사귀를 쌓아놓고 파는 코카잎에서 추출한 것이 코카인이다. 


68세대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안데스 산맥의 돌무더기에 불과했던 마추픽추로 몰려들면서 그 시절 히피들에게 젖과 꿀이었던 마리화나를 들고 갔다. 그런데 자국에서 비싼 돈주고 마리화나를 사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 먼 페루까지 들고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현지에 가면 더 쎄고 좋은게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히피들이 몰려들자 남미의 마약 카르텔들은 미국에 수출하고 남은 코카인을 현지에서 소매로 직접 팔기 시작했다. 마크 라이스 교수는 히피들의 침공을 언급하며 이 때문에 조용한 고대도시였던 쿠스코가 마약과 범죄로 어지럽혀졌다고 지적한다.


사실 니코틴이나 알코올에 비해 중독성과 해독성이 더 높다고는 할 수 없는 마리화나가 마약목록에 올라간 것은 반전세력들이 즐겨 피우던 마리화나를 단속해 잡아넣으려는 CIA의 창의성도 한 몫 했다. 전쟁에 반대한다고 잡아넣는 것보다 마약사범으로 잡아가는 것이 혐의 입증도 더 쉽고 형기도 쎄게 때릴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마리화나라는 손쉬운 경로를 통해 어쨌거나 마약의 세계에 입문한 히피들은 곧 더 쎈 약을 찾아 LSD나 코카인으로 넘어갔다. 기왕 약쟁이 딱지가 붙은 김에 못할 것이 뭐 있느냐는 심리도 거들었을 것이다. 


마리화나보다 중독성이 더 높은 담배를 피우다 코카인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마리화나에서 코카인으로 가는 심리적 장벽은 낮아졌다. 곧 이들의 음악에는 마추픽추 못지않게 마약이 등장했다. 비틀즈는 ‘하늘에서 다이아몬드를 들고 있는 루씨’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LSD) 라는 말 같지도 않은 제목으로 마약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참고로 LSD는 마약 분류에서 히로뽕보다 한단계 위에 있다. 스티브 잡스도 젊은 시절 명상과 선불교에 못지않게 LSD에 심취했다. 자국의 길거리에 비하면 말도 안되게 싼 가격으로 마약을 즐길 수 있게 되자 마추픽추는 곧 히피들에게 남미에 가는 하나의 구실로 전락했다. 


LSD나 요가나 모두 내면의 깊은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               조지프 캠벨, 신화학자


사실 나도 페루나 볼리비아에 있을 때는 이 코카잎을 통째로 사서 – 돈천원 주면 한무데기를 준다 – 생수병에 넣어두고 물처럼 마셨다. 


해발고도가 백두산보다 높은 이 동네는 산소가 희박해 고산병이 오는데 코카잎을 우려 마시면 혈관이 확장되며 산소공급이 원활해져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천연 비아그라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혈관을 확장시켜주니까 말이다. 


코카잎을 구할 수 없는 히말라야에서는 반대로 비아그라를 고산병 약으로 쓴다. 어떤 약이건 혈관만 확장시켜주면 된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끊임없이 마셔댄 것이다. 물론 현지에서 코카차를 마시는 것은 합법이고 단지 한국에 반입하는 것만 불법이다. 


그런데 내심 기대했던 효과는 없었다. 넷플릭스에서 히트친 드라마 나르코스를 보면 이 코카잎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정글 속의 제조공장에서 정제해야 소량의 코카인이 나온다. 제조공장을 정글 속에 만드는 이유는 단지 음폐엄폐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마약으로 제기능하는 코카인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코카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걸 매일같이 트럭 수십대에 싣고 도심에 위치한 어느 건물 지하로 운반하는 것은 그냥 여기서 마약만든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같다. 


고작 한웅큼 생수병에 넣고 우린 물을 마시는 것으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면 파블로프 에스코바 (드라마 나르코스의 실제 모델인 전설적인 남미 마약상)가 그런 떼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코바의 나라인 콜롬비아에서만 코카잎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안데스 산맥 일대는 대대로 고산병 방지를 위해 코카나무잎을 엄청난 규모로 소비해왔다. 원재료 공급이 사실상 무제한인 이 동네에서도 볼리비아는 최빈국을 담당하는지라 루트만 알면 지구상에서 가장 싸게 코카인을 구할 수 있는 나라가 볼리비아일 것이다. 


그러니까 코소보 국적일 수도 세르비아 국적일 수도 있는 알바니아인을 페루에 있는 볼리비아 영사관 앞에서 만난 것이 2020년 2월이었다. 비자받기에만 성공했으면 이친구는 지금쯤 라파즈 빈민가 어디 쯤에서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말이다. 


2020년 1월에 남미에 가서 3월에 돌아온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 내가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서 페루 리마행 비행기를 타고 토론토를 거쳐 귀국한지 딱 3일 후에 칠레와 페루 국경이 폐쇄되었다. 


곧 아르헤티나와 브라질 국경도 닫혔고, 야간 통행 금지에 이어 여행객들은 아예 숙소에 격리되기 시작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귀국행 비행기편이 취소되는 바람에 숙소에 고립되었다가 정부에서 마련해준 귀국편을 타고 (취소당한 왕복 항공권의 몇배 가격을 냈다고 한다) 돌아왔다. 


정부의 행정력이 선진국에 비할바 아닌 남미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에콰도르 같은 곳은 수도에서도 코로나로 죽은 시신들이 그냥 길거리에 방치되었다. 그러고 보니 코소보인일 수도 세르비아인일 수도 있는 그 친구가 약에 쩔어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로 코로나가 창궐하는 남미 마약굴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어찌되었던 그 친구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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