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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세잔느 - 세잔느를 좋아하세요?

벨에포크


정확히 19살 8개월이던 그 해 여름, 나는 나만의 벨에포크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하면서 프랑스와 서유럽의 벨에포크 시절에 그려진 그림을 처음으로 직접 보게되었다.


그 시절에 그려진 수많은 그림 중에서 하필 세잔느의 풍경화에 꽃혀버렸다. 샤갈처럼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좋아하게 된 까미유 피사로처럼 목가적이지만 심심하지도 않았다. 은은하게 아주 살짝 배어나는 보라색. 그것은 세잔느의 색이었다.


이 보라색은 어디에도 등장했다. 마치 한국의 야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생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에도, 사과에도, 사람들의 옷에도, 심지어 사람 얼굴에도 세잔느의 보라색이 있었다.




Montagne Sainte-Victoire with Large Pine, Paul Cézanne 1887, 런던 코톨드 갤러리



세잔느를 처음 본 것은 파리의 오랑쥬리 미술관이었다. 루브르도, 오르세도 아닌 센 강변에 위치한 유명세가 조금은 덜한 미술관이다. 이 곳을 가게 된 것도 센 강변을 따라 거닐다가 별 생각없이 들어간 것이다.  아무런 기대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처음 접하게 된 세잔느의 색. 이런거 좋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난 내 생애 최고의 영화로 ‘타이타닉’을 꼽는다. 타이타닉을 인생 영화라고 꼽는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이 대작을 보았다.


타이타닉이 개봉될 당시 나는 카투사로 군복무 중이었다. 많은 미군 부대에는 영화관이 있고, 매주 목요일마다 새로운 영화를 상영했다. 미군들은 돈을 내지만 카투사는 무료입장이었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처럼 카투사들의 일과 중 하나는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는 목요일 저녁이면 일단 영화관에 가서 새로 나온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재미없으면 중간에 나오면 그만이다.


그날도 그런 수많은 목요일 중 하루였다.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아주 제한적으로만 접할 수 있던 그 시절, 미국 현지와 동시에 개봉하는 미군 부대 영화관의 일정 상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달랑 타이타닉이라는 제목 하나 만을 알고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에 들어서던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보다 재미없으면 알아서 농구장으로 와라’. 미군 영화관에 갈 때마다 늘 하던 말이지만 그날 그 말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자리를 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다.


그날 영화를 보러간 카투사들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영화가 끝난 후에 모두 같이 나왔다. 영화관에서 막사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밤하늘만 바라보며 혹시나 눈치 없는 누군가가 말을 꺼내 이 분위기를 깰세라 서로 시선을 피한 채 걷고만 있었다.


감동받을 준비 없이 찾아온 감동, 나에게 세잔느는 그런 거였다. 그런 그림을 인상주의 (엄밀히 말해서 세잔느는 포스트인상주의이다)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 색감이 ‘프로방스’라고 불리는 프랑스 남부의 풍경과 햇살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그 후의 일이다. 그 날은 그냥 멍하니 그 색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오랑주리를 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파리에서 가야 하는 미술관 중 필수 코스는 당연히 루브르였고 그 다음은 오르세였다. 퐁피두 센터와 오랑주리는 시간이 되면 가는 옵션일 뿐이다. 시간이 남아 돌았던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그 모든 곳에 다 들어갔다.


푸르러야 할 산이 세잔느의 눈에는 보라색으로 보인 것도, 고흐의 눈 앞에 샛노란 해바라기가 펼쳐진 것도, 마티스의 눈에 붉은 색의 사람들이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것도, 모두 약물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즐겨마시던 압상트라는 술에는 환각물질이 들어있었다.


사실 압상트의 유해성은 대마초의 유해성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한국어 위키를 보면 압상트의 유해성은 와인제조업자들의 로비 때문이며 환각 효과는 술을 많이 마셔서이지 압상트의 원료인 허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장황하게 쉴드를 치고 있다.


반면 영문 위키에는 압상트의 환각효과는 과장 (Exaggerated)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정도로 간단히 넘어간다. 결국 과장되었다는 것이지 있긴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당시의 주머니 얇은 예술가들이 즐겨 마시던 싸구려 압상트는 허브의 환각물질과는 별개로 황산구리나 염화안티모니 같은 이름도 어려운 다양한 첨가물로 범벅이된 술이었다.


알프스 일대에는 깊은 산 속에서 나는 다양한 약초를 가지고 약을 만들거나 술을 빚는 전통이 있다. 결국 현대에 와서 환각 성분을 제거하고 재출시 된 압상트나 샤르트뢰즈 같은 알프스의 허브술을 마셔보면 딱 약초가 많이 들어간 감기약이나 한약 맛이다.


이런 허브술들은 우리나라 산사에서 장을 담구어 팔 듯이 대개 산 중의 수도원에서 만들어 수도승들끼리 나누어 마시고, 남은 것은 또 팔아왔다. 수도원마다 절대 비밀이라는 재료와 혼합비를 생각해 보면 간혹 환각 효과가 있는 약초가 섞여 들어가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애초에 이런 술들은 깊은 산속에서 남자들끼리만 일생을 보내야 하는 수도사들이 긴긴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만든 것이라 이것저것 섞다가 우연히 환각효과라도 나오면 감사기도 한번 올리고 그대로 숙성시켰을 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에 출연하기 몇 년 전에 프랑스의 시인, 랭보의 일생을 그린 영화, ‘토털 이클립스’에서 주인공 랭보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스무 살의 디카프리오는 대개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뻑이 도를 넘는 랭보를 연기한다. 자뻑을 메소드하라면 디카프리오가 적임자일 것 같긴 한데, 디카프리오 연기의 절정은 압상트의 폐해를 꾸짖는 시를 낭송하는 바른생활 시인을 조롱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랭보는 자신이 애정하는 압상트를 호환마마 취급하는 동료시인에 격분해 폭력을 행사하고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이 사람이 낭송하던 시에 소변을 갈긴다.


그러니까 와인제조업자들이 로비를 하기 이전에도 예술가들 스스로가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압상트는 결국 유럽에서 금지되었고, 파리의 밤을 불타듯 물들였던 로트렉의 붉은 색도, 난데없이 캔버스 반을 차지하던 고흐의 진노랑도, 산이고 사람 얼굴이고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등장하던 세잔느의 보라색도 사라졌다. 압상트 성분 중에서도 환각을 담당하는 물질인 테레벤은 시신경을 손상시킨다고 알려져있다.


이들이 부리던 현란한 색채의 마술이 사라진 것이 그게 사조의 유행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환각효과가 없어져서인지는 그 시절에 그 술을 마셨던 사람들 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곧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된 사조를 따르기 보다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작가에 따라서 간혹 로트렉과 세잔느의 색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이 화가들 눈에 정말로 그 색이 보인 것인지, 아니면 백 여년 전에 그 색감으로 그림을 그린 선배들의 작품을 자꾸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색을 쓰게 된 것인지는 역시 그 그림을 그린 작가만이 알 것이다.


인상주의와 아름다운 시절


세잔느를 비롯한 인상주의 (세잔느는 정확히 말하면 Postimpressionism, 포스트인상주의로 분류되지만 마네, 모네부터 피사로, 세잔느까지는 큰 틀에서 인상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에 대한 설명을 보면 대개 이런 말이 나온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장르라고 말이다. 역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한국인만 인상주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이 시기의 예술 사조를 좋아한다.


음악은 국민악파를 포함한 낭만주의, 미술은 역시 낭만주의에서부터 음악의 국민악파와 시기적으로 겹치는 인상주의까지가 이 시기의 유럽을 관통하는 예술 사조였다. 이 시기란 언제를 말하는가? 숫자로 말하자면 19세기를 말하지만 당시를 19라는 무미건조한 숫자로 정의할 수는 없다.


이 시기는 유럽인들에게 벨에포크 Belle Époque,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후대의 유럽인들이 이 때를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칭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아름다운 호시절이었던 것이다.


모든 문화적 번영에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번영이 선행된다. 쉽게 말해 배부르고 등따슨 다음에야 심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그런 벨에포크가 있긴 있었다. 바로 88올림픽 직후 3低 호황이 밀려와 97년 속칭 IMF라고 불리던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 나름 흥청거렸던 90년 대가 우리 만의 작은 벨에포크였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취업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었지만 반대로 집값은 당시 정부의 역점사업이었던 주택 200만호 건설에 힘입어 90년대 내내 전혀 오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200만호 건설에서 시작된 인력부족으로 인해 인건비, 특히나 저소득층의 임금이 큰 폭으로 올랐다.


나라 전체에 돈이 도니 직장인도, 사업가도, 대학생도 모두 호황에 취해 살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방송가를 점령한 90년대 가요열풍을 보면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이 얼마나 당시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다. 단군 이래 최대 호경기였다는 당시의 3저 호황은 90년대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19세기 유럽의 벨에포크 역시 산업혁명과 식민지배가 가져온 경제적 번영의 부산물이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일어난 르네상스는 17세기 이후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결국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을 낳았다.


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산업혁명 전 유럽과 중국의 1인당 생산량은 비슷했으나, 산업혁명 직후 영국 면직물 산업의 1인당 생산량은 중국의 60배가 넘었다) 유럽 전역에 엄청난 돈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족이 아닌 계층에서도 큰 돈을 번 자본가가 등장하자 부르주아지 계층이 성장하여 결국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도래하였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시작되자 한 때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과 문화가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쉽게 말해 산업 혁명으로 돈을 번 평민들에게 구매력이 생긴 것이다.


이전까지는 왕족과 귀족에게 고용된 궁정음악가나 교회에 속한 음악가 자리가 아니면 밥벌이하기도 힘들었던 음악가들은 이 시기부터 독립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구매력이 생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오페라 하우스와 음악당들이 무수히 들어서며 작곡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화가들도 작품을 사주는 구매자가 많아지자 오늘날 공장장 소리를 듣는 다작 화가들 뺨치게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다. 37살에 요절한 고흐는 젊은 시절 화상과 전도사를 하느라 실제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에 불과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고흐의 작품은 습작을 포함해 무려 2천 점이 넘는다. 중간에 소실되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작품까지 따지면 활동 기간 동안 거의 하루에 한점꼴로 찍어낸 것이다.


귀족의 주문을 받고 수개월에 걸쳐 공들여 초상화를 그려 납품하던 시대에서 일단 이거저거 많이 그려놓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특히나 이제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음악가들은 대중을 상대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세계를 마음껏 뽐내었다. 당시의 클래식 음악가들의 인기는 지금의 BTS나 블핑 뺨치는 것이었다.


파가니니가 활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저 세상 기교를 뽐내면 실신하는 여인들이 속출했고, 이런 파가니니의 공연에 감동을 받고 스스로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자처한 리스트가 담배를 손에 든채 피아노를 쳐대는 폭풍스킬을 시전하면 관객들은 음악당이 떠나갈새라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날 K-Pop 콘서트장에서 실신하는 팬들이 나오듯이 실제 나폴레옹의 여동생도 공연장에 가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다가 기절했다고 한다. 모두 음악이 신의 영광과 왕의 권위만을 위해 엄숙하게 존재하던 중세나 절대왕정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가와 미술가들이 신이 아닌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선율과 독창적인 색감을 뽑아내던 당시를 가리켜 후대의 예술사가들은 낭만주의 시대라고 불렀고, 역사학자들은 아름다운 시절 – 벨에포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급속하게 부를 쌓으며 시민사회를 주도한 졸부들은 하루빨리 주위 사람들에게 본인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했다. 내가 어제의 그 개똥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 신흥부호들은 앞다투어 그림과 조각을 구입해 새로 지은 저택을 장식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문화행사를 후원하며 지인들을 초대했다. 이유야 어쨌던 역시 많은 대중들에게도 예술과 문화가 전파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도금시대 Glited age라는 말은 마크 트웨인이 19세기 후반 미국 산업혁명 시기의 자본가들을 보고 붙인 말이지만 미국보다 먼저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은 수십 년 앞서 비슷한 도금시대를 경험했다. 단지 유럽인들은 도금시대 대신에 벨에포크라는 조금 더 고상한 명칭을 애용했을 뿐이다.


산업혁명은 단순히 생산성 향상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군사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렇게 동서양의 경제력과 군사력 비대칭이 극에 달하며 결국 근세부터 시작된 유럽의 제국주의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식민지 주민들의 등골이 휘는 동안 유럽본토는 산업혁명이 가져온 생산성 향상에 더해 식민지에서 흘러들어 오는 막대한 부로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산업혁명과 식민지배 쌍끌이로 형성된 부는 고스란히 그들 만의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를 만들어낸 자양분이 되었다.


음악과 미술의 낭만주의는 모두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하였다. 인상주의가 낭만주의의 연장선이냐 아니면 모더니즘의 시작이냐는 예술사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나 필요한 것이지 이 시기를 이해하려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곳에나 중간의 회색지대는 있기 마련이다. 쇤베르크가 낭만파의 마지막 탕아인지 아니면 무조음악의 지평을 연 현대음악의 시조인지를 따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초기에는 낭만파였으나 말기에는 기존 음악의 문법을 파괴한 현대음악으로 돌아선 그는 스스로가 둘 다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당시 산업혁명의 성공과 식민지의 확장으로 주체하기도 힘든 부가 유럽 전역에 흘러넘쳤고, 그 낙수효과로 중산층까지 풍요로와지자 비로소 귀족이 아닌 대중이 문화소비의 주체가 되는 예술사조가 유행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던 시절에 나온 예술은 백 여년이 흐른 오늘날 보아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연이은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유럽의 시간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시절이 되었다. 벨에포크 시절에 꽃을 피운 낭만주의는 점차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모더니즘으로, 그리고 다시 다양한 장르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변해갔다.


19세기의 낭만주의가 유럽의 리즈시절을 반영하여 아름답고 밝은 분위기를 담아내었다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은 각각 20세기 전반을 강타한 양차대전과 대공황으로 인해 어둡고 우울해진 사회 분위기를 대변하여 예술은 점차 난해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러자 21세기의 오만가지 사회상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이 지나간 호시절인 90년대를 그리워하듯이, 유럽인들도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세기 전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꽃이 진 후에야 봄이었음을 아는 것처럼 어둡고 우울해진 후에야 예전에는 밝고 아름다웠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레 벨에포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벨에포크와 문화유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의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비판한다. 콘크리트의 수명은 백년에 달하고 실제 파리나 런던, 뉴욕을 가봐도 19세기의 건물들을 얼마든지 고쳐가면서 쓰는데, 우리는 부동산 가격에만 연연해서 30년도 안된 건물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데만 몰두한다고 말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한 때 서울시는 낡은 아파트를 부수고 새로 짓는 재건축사업 허가를 내주며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내에 무조건 옛날 건물 한 두 동씩을 존치하라는 정책을 강행했다. 과거의 건물을 미래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자는 것이다.


주민입장에서는 해당 면적만큼의 부지를 손해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축아파트 단지 안에 흉물스럽게 자리잡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의 잔재가 단지 미관을 해친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주거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명분에 목숨 걸고 딴지를 걸기는 힘들어 이 정책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다가 서울시장이 바뀐 후에야 비로소 제동이 걸렸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서구선진국과 달리 과거의 유산은 모두 때려부시고 천편일률적인 성냥갑 아파트를 짓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19세기의 건물들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여태까지 잘 쓰고 있는 것은 그 시절이 그들의 벨에포크였기 때문이다.


이미 선진국의 생활상을 누리던 당시에 지은 건물은 백년이 지난 후에도 리모델링과 수선을 거치면 크게 불편없이 쓸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또 백년 전에 지은 이 건물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기술과 문화수준을 반영하여 지은 우아한 주거작품들이다. 외관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내부설계도 어느 면에서는 오늘날의 주거용 건물보다 더 넓직하고 쾌적한 부분도 있다.


물론 파리 구도심의 19세기 건물들은 배관도 낡고 수압도 떨어지는 등 기능적으로 볼 때 현대의 아파트에 비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세기에 지은 5층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 많고 –철제 주물로 만든 엘리베이터를 손으로 열고 닫아야 해서 밤에는 온 건물에 철컹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기는 한다 – 냉난방도 들어와 사람이 못살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불편하긴 하지만 파리 구도심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관광수입에서 얻는 사회적 이득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조상들이 온 지구를 호령하며 전세계가 동경하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만들어내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시대의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싶어한다. 꼭 19세기일 필요는 없다. 유럽 각국의 도시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아름다운 시절에 지어진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을 잘 보존하고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불가리아 벨에포크 시절의 은행 건물, The Belle Éqoque in Europe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70년대는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은 벨에포크였을까? 당시에 지은 주공아파트와 시영아파트에는 19세기 파리의 5층 건물에도 있던 엘리베이터가 없어 장바구니를 들고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심지어 고층 아파트에서도 건축비와 전기비를 아끼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서는 것이 아니라 층의 중간에 서는 곳도 있다. 10층과 11층 주민이 같이 내려 각자 반층 올라가고 반층 내려가게 되어있는 아파트 형태는 아직까지 서초구 잠원동 일대에 남아있다.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길이 없어 도시 외곽의 빈 땅에 네모 반듯한 5층 건물 수만 채를 날림으로 지어야만 했던 1970년대는 분명 우리의 벨에포크는 아니었다.


당시의 경제발전이 이후 대한민국의 짧은 벨에포크를 가져오는 기반을 만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먹고 살만해진 지금에는 추억하고 회상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어서 빨리 잊어버리고만 싶은 힘든 시절일 뿐이다. 당시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라면 벨에포크가 아닌 모베제포크 Mauvais Époque, 나쁜 시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모베제포크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는 또다른 논쟁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모베제포크 시절의 성냥갑 건물을 보존하자면서 유럽과 미국의 벨에포크 시절 건물을 들먹이는 것은 분명 비교 대상을 잘못 선택한 주장이다.


연탄을 떼는 13평 아파트에 온가족이 모여 살던 성냥갑 모양의 건축물은 벨에포크 시절 파리 사교계의 명사들이 모여살던 세느강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처럼 우리의 추억이 깃든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간직해야 하는 대상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Belle Éqoque 시절의 아파트, The Belle Éqoque in Europe




재건축되는 와중에 미래유산으로 존치되는 서울의 주공아파트, 매일경제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짧은 벨에포크가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벨에포크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 벨에포크 시절의 미술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 스무 살의 여름, 나는 나만의 벨에포크에 살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그 때는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세월이 흘러 모베제포크를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때가 나만의 벨에포크 였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아름다운 시절에 마주쳤던 것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파리의 19세기 건축물을 여태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 한구석에 잘 간직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까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 시절에 보았던 세잔느일까, 아니면 오랑주리에서 세잔느를 보고 있던 스무 살의 나였을까?


당신의 벨에포크는 언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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