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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세잔느 -다시 찾은 동유럽

부다페스트의 여름과 프라하의 가을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은 카오스였다. 소련과 동구권이 막 무너진 직후였다.


지금도 동유럽의 물가는 서유럽보다 저렴하지만 동구권이 막 붕괴된 직후의 동유럽은 유럽을 찾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특히나 스위스와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와 환율에 질려 햄버거도 변변히 못사먹고 마트에서 산 바게뜨에 잼을 발라 먹으며 버티던 학생여행객들은 독일쯤까지 오고나면 영양보충해야 한다며 서둘러 동유럽행 기차를 타곤 했다. 


부다페스트역에 도착한 나는 큰 짐을 맡기기 위해 역마다 있는 코인라커 (최근 테러가 빈발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를 찾았다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제대로 작동하는 라커를 찾기 힘들었다. 정확히는 어느 라커에 어느 동전을 넣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구권이 붕괴된 후 많은 나라에서 화폐개혁을 했고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권이 도입되었지만 사회시스템이 이를 즉각 반영하기란 당시의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어느 라커는 구 동전을 받았고 어느 라커는 새 동전만 받았다. 


누군가의 말로는 잘 찾아보면 둘다 되는 라커도 있다고 했지만 모두 헝가리어로만 씌어있어 하나씩 넣어보고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미 망가져 돈만 꾸역꾸역 먹는 라커도 부지기수였다.


아침에 도착한 부다페스트 역에서 이 우여곡절을 다 치르고 나니 어느덧 슬슬 점심을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들 영양보충하러 간다는 동유럽에서의 첫 식사. 기대되지 않는가? 더구나 이미 전날 야간열차에서 만난 일단의 한국여행객들과 계획까지 다 짜놓았다. 제대로 칼질 한번 해보자고 말이다. 


이렇게 급작스레 뮌헨발 부다페스트행 열차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 네명은 식당을 찾아 출발했다. 역을 나선 우리의 눈에 길건너 큰 호텔이 보였다. 이름은 기억나지도 않고 그 당시에도 몰랐다. 아마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거나 건물 용도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들 눈에 매우 좋은 호텔로 보였다. 저기 가서 점심먹자며 그 중 나이 많은 형 하나가 호기롭게 분위기를 잡았다. 


보무도 당당하게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아무리 혼란에 휩싸인 헝가리라지만 우리 눈에 그 곳은 지나치게 좋아보였다. 샹들리에가 달린 아주 높은 천장과 그 높은 천장까지 이어지는 벽면을 빼곡히 메운 벽화가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르네상스 이후에 지어진 유럽의 궁전이나 성당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미켈란젤로 풍의 벽화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장을 하고 있었고, 바이얼린과 비올라를 든 일군의 악사들이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연주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 넷은 아무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긴 바지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당시 여름 배낭여행객들의 활동화였던 스포츠샌들을 신고 있었다. 전날밤을 꼴딱 새운 야간열차에서 막 내려 눈꼽만 뗀 우리는 그 때 사진을 찍었다면 역대급 인생샷이 나왔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조용히 물러나와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호텔에서의 식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지라 데스크에서 이 호텔에 다른 레스토랑은 없는지 혹시 캐쥬얼한 레스토랑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안내데스크의 직원은 예의 몰골을 한 우리를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턱짓으로 대답했다. 밖에 맥도널드가 있다고 말이다. 


순간 우리는 분노했다. 아무려면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고 찾아온 데스크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직원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우리를 대해야지 말이다. 물론 그때의 꼬라지를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 직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불끈한 우리는 뒤돌아볼 것 없이 아까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랬을 것이다) 직원에게 아주 쿨하게 ‘네명이요’를 외치며 그냥 안으로 쓱 들어갔다. 허겁지겁 따라온 직원은 할 수 없는 듯 제일 구석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지금 같으면 드레스 코드를 내세우며 쫓아냈겠지만 사회의 모든 체계가 무너진 그 당시 동구권의 웨이터는 반바지를 입고 당연한듯 들어서는 외국인을 막아설 배짱은 없었다.  


메뉴판을 재빨리 스캔하며 생각외로 만만하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각자 주문을 시작했다. 그날 나는 앙트레로 오리고기가 들어간 샐러드를 시켰고, 헝가리에 왔으니 굴라쉬를 주문했다. 메인은 양이나 스테이크 같은 고기였던 것 같다. 


와인도 한 잔 했는데 네명이니 병으로 시키는 것이 맞았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배포는 없던 학생인 우리는 하우스 와인을 각자 글라스로 시켰다. 그리고는 각자 만 원 조금 넘게 돈을 내고 나왔다. 하늘이 두쪽나도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절대 이만원은 아니었다. 


물론 1994년도의 만원이 지금의 만원과는 다르지만 당시에도 그 돈은 그 호텔과 음식을 생각했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이었다. 아니 거저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설마 그정도였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라가 붕괴되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로부터 딱 4년 후 속칭 IMF로 대한민국이 붕괴되었다. 그러자 반대로 한국에 살던 외국인들에게 천국이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 주재원으로 파견되었던 한 미국 투자은행의 대리급 직원은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 한국에서 매일매일을 다른 여자와 자면서 왕처럼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가 친구가 그 메일을 퍼뜨리는 바람에 결국 해고되었다.


동유럽이 그 정도로 혼란에 빠진 이유는 구 소련이 무너지며 도미노 현상으로 같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구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시나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였을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트라비 (30년간 모델변경이 없었던 동독 국민차)와 볼가 (40년째 같은 플랫폼을 쓴 구소련 고급승용차)에 지친 동구권 사람들이 서구의 상품들과 유행을 동경해서만은 아니었다. 


무너진 장벽을 넘어 사람들을 서구로 몰려가게 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이었지만 장벽 자체를 무너뜨린 것은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석유를 장악한 미국의 패권이었다.


미국이 석유 패권을 장악하면서 소련은 무너졌다. 자본주의와는 큰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구에서는 오히려 냉전 기간 내내 팽팽한 균형이 무너질까 걱정하며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솔깃해 하는 이유를 찾아 자본주의를 수정해나가는 수정자본주의가 판을 쳤다. 실제로는 소련이 무너진 이후에야 자본주의는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자본가들의 천국이 찾아왔다. 


석탄을 쓰는 증기기관 (외연기관)의 시대가 지나고 석유나 가스를 원료로 쓰는 내연기관이 산업뿐 아니라 전쟁무기의 핵심이 되자 전쟁 중의 영국와 독일은 중동의 원유를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을 대신해 소련과 양강구도를 형성한 미국 역시 같은 목적으로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 큰 공을 들였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차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저유가를 유도했다는 것은 일반인을 위한 편한 해석이다. 그게 이유였다면 여전히 막대하게 쌓아놓고 손도 안대는 자국의 유정을 먼저 개발했지 그렇게 욕을 먹고 자국 군대를 희생하면서까지 소위 악의 축들과 싸워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석유에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는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 GDP의 절반을 원유와 석유 관련 산업이 차지한다. 매우 단순하게 말해 원유값을 절반으로 떨어뜨리면 소련 국부의 1/4을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실제 이 원유값을 절반도 아닌 1/5 이하로 날려 버렸다. 


70년대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치솟자 소련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들부터 소련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한다는 전망이 난무했다. 그런데 80년대에 배럴당 $50를 상회하던 유가는 미국이 석유패권을 장악하며 $10 아래로 내려갔다. 


미국이 이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헨리 키신저가 있었다. 키신저가 작금의 명성을 얻게 된 것도 미국과 소련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양쪽에서 꿀만 빨던 중동 국가들, 특히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를 결정적으로 미국의 편으로 돌려놓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문제로 미국과의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사우디 왕가를 미국의 편으로 만든 키신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이다. 이점만 보아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 


아랍의 왕들은 소련과의 석유 패권 싸움에서 미국을 지지하기로 동의함에 따라 막대한 부와 권력을 보장받게 되었다. 남미나 북한의 독재자들을 상대할 때는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미국이지만 이런 아랍국가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다. 유가는 떨어져도 한줌의 왕족은 상상도 못할 부를 보장받게된 것이다. 종종 만화 같은 부를 과시하는 만수르 스토리는 이런 배경에서 출발하였다.


국가 경제의 절반을 석유에 의존하던 구 소련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사우디가 증산에 앞장서며 $50가 넘던 유가가 $10 아래로 떨어지자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경제난에 처한 소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유럽과 북한에 무상으로 제공하던 석유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쓰레기 같은 물건을 만들어 소련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석유를 받아가던 동유럽의 경제 역시 함께 무너져 내렸다. 


베를린 장벽은 동서 분단의 상징이다. 수많은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가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독으로 넘어간 것이 동구권 붕괴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징적 의미가 더 컸던 베를린 장벽에 비해 실질적으로 동서유럽을 갈라놓은 가장 긴 장벽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기철조망이었다. 


베를린 장벽에 비할 수 없이 긴 이 국경선을 사람이 일일이 지킬 수는 없었던 헝가리는 국경선 끝에서 끝까지 거대한 전기철조망을 설치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전력은 모두 소련이 지원하는 석유를 태워 전기를 만드는 화력발전소에서 충당했다. 


하지만 소련이 석유공급을 중단하자 전기가 끊긴 철조망은 거대한 고철더미로 전락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유럽 사람들은 앞다투어 헝가리로 몰려와 손쉽게 철조망을 절단하고 서유럽으로 몰려갔다. 곧이어 체코의 국경철조망도 철거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불과 수 년 후에 아직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헝가리와 체코를 찾았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30년 전 철거되었던 헝가리의 철조망은 지금 이 순간 다시 설치되고 있다. 다만 방향이 바뀌었다. 한 때 서쪽의 오스트리아 국경에 설치되어 자국민이 서쪽으로 가는 것을 막았던 헝가리의 철조망은 지금은 동쪽의 세르비아 국경에 설치되어 난민들이 헝가리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헝가리는 스쳐가는 관문일 뿐, 난민들의 최종목적지는 독일과 프랑스임을 잘 알고 있는 서유럽의 지도자들은 베를린 장벽때와는 달리 새로운 장벽을 모두 마음속 깊이 성원하고 있다. 


뒤이어 찾은 프라하도 부다페스트에 못지 않게 말도 않되는 물가와 카오스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체코는 비자가 필요했는데 미리 영사관을 찾을 필요없이 체코로 들어가는 기차 안에서 입국비자를 받으면 되었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경찰들은 수시로 관광객에게 다가가 매번 입국비자를 팔고 또 팔았다. 솔직히 그 때 그 사람들이 실제 체코 공무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제복만 입고 관광객들 등을 치던 동네 건달들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로부터 정확히 사반세기 후 프라하를 다시 찾았다. 세기가 지난 프라하의 가을은 차분했고, 아름다웠다. 거리는 여전히 관광객으로 붐비었지만 싼물가를 찾아온 예전의 후줄근한 배낭여행객들의 모습은 미술관과 오페라하우스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관광객들로 많이 대체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체코 자체의 변화보다는 인스타그램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지금은 여행하기 편한 옷보다 사진찍을 때 잘나오는 옷을 입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체코인들의 모습은 더욱 바뀌었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달려들어 호객행위를 하며 투숙객을 구하는 민박집 삐끼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안따라갔겠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나이의 나는 낡은 (썩었다는 말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밴을 타고 이들을 따라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프라하 가정집에서 방을 하나 받아 묵었다. 


90년대 초반의 비엔나는 이 곳을 처음 찾은 대학생의 눈에 온갖 고풍스러운 건물로 가득차 있고 공원과 거리마다 음악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낭만의 도시였다. 반면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는 몰락한 국가의 수도답게 음산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10여 년 전에 업무차 자주 갔던 알제리의 수도 알저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이었다. 반면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프라하는 날이 갈수록 어딘지 쇠락해가는 분위기의 비엔나에 비해 활기차고, 깨끗하며 무엇보다 낭만적인 도시가 되어있었다. 


도시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나이가 든 도시는 아무리 잘살고 경제규모가 커도 도시 구석구석에는세월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한 때는 번성했지만 지금은 패러다임이 바뀌어 폐허가 된 지역, 어느 순간에는 도시의 경제를 지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 버린 산업들이 있던 곳이다. 


서울로 치면 문래동과 성수동 일대에 남아있는 경공업지역일테고, 뉴욕의 예전 푸줏간 지역,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창고지대 등이다. 성수동과 문래동은 현재 도심재생사업의 1순위로 곳곳에 카페거리가 들어서고 있고 뉴욕의 푸줏간거리도 10년쯤 전 휘트니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다시 재생을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항구 인근의 창고지대는 지금은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온 IT기업들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쇠락이 시작된 시점과 이러저러한 재생사업의 결과가 나타나는 시점 사이에는 꽤 긴 시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오래된 도시 곳곳에는 이런 시차의 불일치가 발견된다. 


프라하는 이에 비하면 도시 전체의 재생을 마치고 다시 시작하는 청년도시같은 느낌을 준다. 쇠락하는 분위기에 접어드는 지역이나 산업은 눈에 덜 띈다는 말이다. 천년 고도가 젊은 느낌을 갖추니 관광객 입장에서는 완벽한 도시로 변모했다. 중부유럽답게 돼지고기를 많이 쓰는 음식은 일반식당에 가도 플레이팅과 세팅부터 완벽한 인스타 비쥬얼을 자랑한다. 체코하면 떠오르는 맥주 역시 말할 나위없다. 


구도심을 감싸는 성과 다리,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 홀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연들은 이 도시의 문화적 배경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프라하는 풍부한 역사와 문화의 기반을 보유한 천년 고도가 새롭게 출발하는 청년의 산뜻함과 깨끗함을 갖추면 어느 정도까지 훌륭해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체코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멀쩡한 가정집에 관광객을 받아 만원짜리 한 장벌어보겠다고 기차역에서 관광객이 내릴 때 마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며 호객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얼마 전 우유니 사막을 보러 볼리비아에 갔다가 칠레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우연히 체코에서 온 대학생 두 명을 만나 잠시 동행한 적이 있었다. 남미에서도 최빈국인 볼리비아 버스터미널은 그 시절 체코 기차역과 유사한 카오스의 도가니였다. 내가 예매한 표가 맞는지 좌석이 있는지 컨펌을 해야 했는데 작은 사무실 안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수많은 볼리비아인들이 모여들어 서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 난장판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둘이 꼭 붙어있는 서양 여자애들 둘을 보고 내친김에 이 친구들 표까지 받아 데스크에 확인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 둘은 한숨을 내쉬며 저 사람들이 자기들 몸을 막 건드린다며 몸서리치는 표정을 지었다. 한 친구는 겁먹으면서도 짜증난 표정으로 ‘짐승같아 – They are like animals’라며 한마디 던졌다. 


이들은 체코에서 온 대학생들인데 겨울방학을 맞아 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반사적으로 사반세기 전의 체코가 떠올랐다. 대학생이라니 이 친구들은 그 때쯤, 아니 그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 때 프라하 역에서 자기집 방하나를 내주기 위해 호객을 하던 사람들 중에 얘들 아빠도 있었을까? 만족스럽지 않기는 해도 어쨌든 다들 적응해서 살고 있던 체제가 붕괴했고, 새로운 체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모두가 안정적인 공무원으로 살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기존의 체제가 붕괴한 나라에서는 비대한 조직의 공무원과 민영화 대상인 공기업직원이 제일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이 때 막 가정을 꾸린 젊은 가장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별 생각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을 붙잡고 ‘너네 옛날 어렵던 시절을 알기는 하니’ 같은 말은 한국에서도 안하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더구나 동양인 버프로 내 나이를 그 정도까지는 안볼텐데 굳이 자진납세해 ‘어 우리엄마랑 동갑이시네요’ 같은 말을 들을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미에서 만난 체코사람 앞에서 그 언젠가 혼돈의 시대에 체코에 간 적이 있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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