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네오섬에서의 일년
코타키나발루에 수십 번씩 갈 줄 알았으면 바로 전 해 가족여행으로 코타키나발루 말고 다른 곳을 택했을 것이다.
사람 일은 이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코타키나발루 일대 호텔들을 돌아가면서 한번씩 다 자보고는 결국 바닷가가 아닌 시내에 있는 호텔을 정해 놓고 그 곳에만 묵었다. 바닷가 리조트도 하루이틀이지 번화가에서 뚝 떨어진 리조트에 혼자 묵어봐야 수영장에서 닭질을 해대는 커플들을 보면서 염장밖에 더 터지겠는가. 결국에는 식당이나 마사지샵 가까운 시내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코타키나발루는 출장을 갈 때 들르는 경유지였다. 최종 목적지는 보르네오섬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쿠알라 토마니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이 곳에 가려면 먼저 공항이 있는 코타키나발루까지 가야 한다. 코타키나발루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아침 차를 빌리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금 먼 여정을 떠난다.
한때 우리에게 가구 브랜드로 알려진 보르네오섬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있다. 남쪽은 인도네시아가 차지하고 있고 북쪽은 말레이시아 영토이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는 브루나이로 되어있다. 보르네오섬의 동쪽은 일단은 말레이시아 영토인데 인접한 필리핀이 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국경분쟁이 왕왕 일어나는 곳이다. 내가 보르네오섬에 출장가던 시기에도 이 곳에 필리핀 군이 들어와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사실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섬이 많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말레이시아는 국가와 영토의 개념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유럽 열강이 식민지배하기 전까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섬들에 점점이 흩어진 다수의 부족국가나 소왕국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게 인도네시아가 특히 심한데 동서로 길쭉한 인도네시아는 식민시대 이전까지는 서로 한 국가나 민족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이 살던 수많은 섬과 부족들이 그냥 한 나라로 뭉뚱그려져 독립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국가가 되기에는 부족국가의 체계가 근대 국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 보니 근대 국가의 형태로 독립한 이웃나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들이 자신이 독립하는 김에 인근의 주인없는 섬들까지 영토로 편입을 한 것이다.
그래서 발리 사람들은 스스로를 발리인 Balinese라고 하지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흔히 인도네시아어라고 알려진 바하사 Bahasa어는 여러 언어 중 표준어로 선택된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현지에서는 바하사라고 하지 인도네시아어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종교도 다르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발리의 종교는 힌두교이다. 불교가 대세인 섬도 있고 정말 뜬금없지만 보르네오섬 내륙은 카톨릭이 주류이다. 수세기 동안 맹활약한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마을마다 성당이 있다. 그러다보니 토마니 마을에서 같이 일하던 무슬림 직원은 금요일 오후마다 모스크를 찾아 멀리 차를 몰고 가야했다.
이런 점만 보아도 보르네오섬을 오랜 기간 다스린 중앙집권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부족들이 각자 영토를 나누어 살던 보르네오섬은 영국이 떠나면서 반은 인도네시아, 반은 말레이시아로 분단되었다. 말레이시아 입장에서는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있는 지역은 서말레이시아, 보르네오지역은 동말레이시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동남아시아 제일의 강국인 말레이시아이지만 이 동말레이시아 지역만큼은 동남아 기준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다.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서말레이시아에서 볼 때는 언젠가 독립할 수도 있는 남의 땅인지라 큰 돈이 드는 투자는 안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보르네오섬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이 지역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내가 보르네오섬에 출장을 간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서말레이시아에 비해 동말레이시아는 통신 인프라도 열악하다. 그래서 보르네오 섬 내륙의 오지마을에 가면 인터넷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말레이시아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고 어느정도까지는 이를 해소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 밀림을 가로질러 광케이블을 까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이런 곳에는 정부에서 위성을 이용한 일종의 관제 피씨방을 만들어 인터넷을 제공한다.
한 때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위성과 드론을 이용해 스카이 인터넷을 전세계 오지마을에 제공하겠다고 떠들썩하게 홍보를 했는데 솔직히 업계사람으로 말하면 이런 소리는 벌써 20년째 너무 많이 들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이런저런 IT기업들마다 홍보거리가 부족할 때 마다 한번씩 써먹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런 동네에 인터넷을 제공하려면 그냥 주파수만 쏘아서는 안된다. 받을 단말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활용법도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니 각국 정부들은 통신사들에게 돈을 각출해 이 지역에 인터넷 센터를 지어서 장비도 비치하고, 교육도 하고, 때로는 개인용 단말기도 나누어 준다.
동남아시아 통신시장에 진출하려고 이런 저런 기회를 엿보던 우리가 인터넷센터를 짓기 위해 보르네오섬 깊숙한 곳에 위치한 쿠알라 토마니라는 작은 마을을 택한 것은 이 곳이 포장도로로 연결된 마지막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도 마을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그런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거나 하루에 몇시간씩 비포장도로를 헤치고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쨌든 토마니만 해도 인터넷이 필요한 곳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오지 마을은 다음에 하면 된다는 것도 충분한 핑계가 되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여기까지만 하고 말았다)
이곳이 어느정도 오지냐하면 인터넷센터를 다 짓고난 후에 한국에서 하듯이 센터 외부에 CCTV를 달았다. 센터 내부에는 이 일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값비싼 장비들로 가득차 있으니 상식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CCTV를 달고 나자 마을 이장이 찾아왔다. 위성신호를 수신하기 위해 세워둔 망루에 함께 달아놓은 CCTV를 가리키며 마을 사람들이 떼어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있는 말이었다. CCTV는 가져가더라도 도난 장면은 센터 내부에 있는 저장장치에 녹화가 된다. 그런데 그걸 확인한들 어쩌란 말인가. CCTV를 떼어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더라도 이 일대에는 신고할 경찰도 없어 그냥 도난장면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얼굴을 확인한다 치더라도 마을을 뒤져 범인을 잡는 것은 먼 도시에 있는 경찰과 마을의 협조를 받아야하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장 입장에서는 저런 값비싼 장비를 그냥 밖에 두었다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이런 골치아픈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코미디 같지만 결국 이 CCTV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고용했다. 마을 청년 두명에게 일당을 주고 우리가 퇴근한 후에 이 CCTV를 지키는 야간경비를 서게 한 것이다. 이들은 저녁무렵이 되면 센터 앞에 자리를 깔고 다음날 아침까지 CCTV를 지켰다. 이들의 인건비는 정말 몇푼 안되는지라 마을에 고용을 창출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쿠알라 토마니 마을에도 숙소와 식당은 당연히 없었다. 식당 대신 마을에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외지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눈치빠른 아주머니는 가게 앞 테이블에서 볶음밥 등 간단한 식사를 팔기 시작했다.
식사야 그렇다 쳐도 숙소가 문제였다. 결국 토마니에서 근 한 시간 거리인 테놈이라는 도시에 숙소를 정했다. 테놈은 마을이 아닌 도시였다. 도시라는 것이 우리가 묵을만한 여관 수준의 숙소가 있고 KFC가 하나 있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여기서 3~40분을 더 해안쪽으로 가면 케닝아우라는 꽤 큰 진짜 도시가 있었지만 이 곳에서 토마니까지는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려 출퇴근을 하기에는 불가능했다. 결국 편도 한시간 거리인 테놈으로 타협을 보았다.
테놈은 도시 이름이자 그 지역의 명칭이기도 했다. 테놈시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테놈군의 군청소재지였다. 이 지역은 무룻이라는 부족의 영토로 이들은 나름 전사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봐야 테놈군을 다 털어 인구 5천명 남짓이지만 인근 무룻 부족의 마을을 지나다보면 마을 입구에 커다란 창과 방패를 전시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테놈시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는 꽤 크지만 완전히 쇠락한 호텔이 하나 있었다. 멀리서 외관을 보면 그럴 듯 한데 내부를 들어가면 전혀 리노베이션이 안된 70년대 여관 같은 곳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카펫과 오래된 침대, 그리고 배불뚝이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화장실에는 녹물이 나와 첫 출장 이후 이곳에 다시 오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수도꼭지에 연결하는 정수기를 사가야만 했다.
이런 쇠락한 낡은 호텔을 보면 이 곳이 그래도 한 때는 커피와 고무나무 재배로 돈이 돌던 과거의 영광 정도는 있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근에서 그나마 나은 이 곳으로 숙소를 정하고 사장님을 오시라고 해서 가격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름 네고를 한다고 만났는데 호텔에서 제시한 가격이 정말 우리나라 여인숙 수준이었다. 회사 출장비 가이드의 반의 반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이럴 때 쓰는 신공이 각종 서비스를 얹는 것이다. 그러면 어차피 정해진 출장비로 써야하는 밥값이나 기타 경비를 숙박비에 얹어 처리하고 좀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다. 결국 그 호텔에서 가장 큰 스위트룸을 기준으로 회사 가이드 반값 정도에 빨래 (하루 티 한장과 바지, 속옷 등)와 아침식사, 저녁식사를 포함하기로 쇼부를 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게 다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파리만 날리던 호텔에 갑자기 몰려든 외지인들로 때아닌 호황을 누리게 된 사장님은 입이 점점 찢어지더니 급기야 직원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 더 받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라고 한 것이다.
빨래는 무제한으로 바뀌었고 식사는 그냥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면 끝도 없이 가져다 주었다. 토마니 구멍가게에서 해주는 똑 같은 볶음밥에 물린 우리가 점심 도시락을 부탁하자 역시 일회용 그릇에 넘치도록 담아 아침마다 포장을 해주었다. 결국 구멍가게 아주머니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격일로만 도시락을 받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공항이 있는 코타키나발루에서 테놈으로 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차를 렌트해서 직접 몰고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처음 갈 때야 렌터카에 기사까지 대동해 갔지만 비용 문제로 매번 그렇게 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숙소가 있는 테놈에서 아침 저녁으로 토마니를 왕복하려면 반드시 차가 필요했다.
결국 인원 수에 맞추어 코타키나발루에서 차를 렌트해서 다녔는데 이게 하다 보니 트럭을 빌리게 되었다. 포장도로지만 상태가 안좋고 언덕이 많아 반드시 사륜구동이 필요했고, 또 센터에 각종 장비나 짐을 옮길 일이 많다보니 크고 튼튼한 트럭으로 낙점이 된 것이다.
보르네오 섬에 지천으로 널린 토요타 포추나 트럭을 몰고 코타키나발루에서 테놈으로, 테놈에서 쿠알라 토마니 마을로 정말 수백번은 다녔다. 이 지역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에 찾은 또 다른 방법이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주로 혼자 다닐 때 시외버스가 유용했다. 테놈에 일행이 먼저 가있고 차가 더 필요없는 경우에는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편하게 풍경을 보면서 현지인 모드로 갈 수 있다. 이 시외버스는 가는 길에 보르네오 시골 마을 이곳저곳에 수시로 정차를 하며 사람들을 태우고 갔다.
트럭으로 보르네오섬 이곳저곳을 누비다보니 간혹 재미난 일이 생기곤 했다. 동남아시아하면 열대과일이 생각날텐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열대과일은 특유의 냄새로 사람마다 호불호가 심히 엇갈리는 두리안이다. 두리안의 매력은 전혀 과일같지 않은 아주 묵직한 단맛에 있다. 흔히 과일하면 떠오르는 상큼함이나 아삭거리는 느낌과는 전혀 반대되는 맛이다.
동남아시아 과일가게, 특히 노점에서 두리안을 살 때 조심해야할 것이 있다. 두리안은 엄청나게 두꺼운 겉껍질을 정글도같이 큰 칼로 쪼개서 안에 있는 속살을 먹는다. 두리안을 맛만 보고 싶을 때는 미리 잘라 소량씩 포장해놓은 것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큰거 한 통을 사면 즉석에서 무게를 달고 해체해준다.
두리안 해체과정을 보면 과일을 깎는 것보다 큰 생선 한마리를 잡아 회치는 광경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두리안 한마리 잡았다 두마리 잡아간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대부분의 과일상들은 양심적이지만 거리의 노점상 중에는 간혹 이 해체과정에서 손장난을 치는 경우가 있다. 정글도로 두리안의 껍데기를 팍팍 쳐내면서 관광객들이 현란한 손놀림에 정신 팔린 사이 노오란 속살이 담긴 껍질을 옆으로 휙 던져버린다.
아무리 동남아시아라고 해도 두리안 큰거 한마리 잡으려먼 2~3만원은 주어야 한다. 그러니 옆으로 빼돌린 속살 한점은 값으로 따지면 몇천원 어치가 된다. 아마도 미리 해체해 소량으로 팔리는 두리안 중 상당수가 이렇게 관광객을 현혹시켜 한켠으로 빼돌린 두리안일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걸 모르고 여러 번 당했다. 그런데 아무리 껍질이 두껍다고는 하지만 막상 받아온 속살의 양이 너무 적은 것이 티가 났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매번 받아오는 양도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은 코타키나발루 야시장에서 노점상의 손놀림을 아주 유심히 보았다. 아니다다를까 안에 속살이 큼직하게 남아있는 껍질 한토막을 옆으로 쓱 하고 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단지 여러 번 속아서 의심을 품은 외국인에게 걸린 것이 그 사람의 운이라면 운일까.
바로 어이 하면서 속살이 담긴 껍질을 가리켰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당황한 노점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두리안을 하나 집어들고 잡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작은 두리안을 해체한 이 사람은 그 속살을 함께 담아주며 오케이?를 외쳤다. 당근이지. 뜨리마 까시 (바하사어로 감사합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테놈으로 향하는 국도 이편저편에는 계절별로 다양한 과일노점상들이 들어섰다. 철따라 참외와 복숭아를 파는 우리나라 국도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는 혼자 트럭을 몰고 테놈으로 향하는데 길가에 커다란 두리안을 한무데기 쌓아놓고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그래 오늘 간식은 너로 정했어.’ 망설임없이 바로 차를 세우고 두리안을 샀다.
여기서 작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센터에 있는 직원들 몫까지 큼지막한 놈으로 두덩이를 잡고서 계산을 했다. 카드는 당연히 안되니 현금으로 냈지만 출장비 처리를 하려면 영수증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회계처리와 경비에 대해 많이 깐깐해졌지만 이런 오지에 출장올 때는 현실을 반영해 간이영수증도 인정을 해준다.
노점상 아주머니가 아마 거의 써본 적 없는 영수증을 써주기 위해 어딘가에서 볼펜과 종이조각을 꺼내들고 날짜와 금액을 적는데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볼펜이 나오지가 않았다. 종이 위에 몇번 직직 그어도 안나오는 볼펜을 혀에 대고 적시기까지 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조용히 차로 돌아갔다.
쿠알라 토마니에 있는 인터넷 센터에 갈 때는 사무실 한켠에 쌓여있는 볼펜이나 호치키스, 클립 등 각종 사무용품을 잔뜩 들고 갔다. 어차피 현지에서 센터업무를 하려면 돈주고 사야하는데 토마니 인근에는 그런 문방구를 살만한 곳이 없다. 새볼펜 한자루를 가져와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영수증을 작성한 아주머니는 영수증과 함께 볼펜을 돌려주었다. 굳이 돌려받을 필요는 없는지라 영수증만 받고 펜은 가지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에게는 책상마다 굴러다니는 볼펜이지만 세상 어느 곳에 가면 이게 무척 귀한 물건이 되는 곳도 있다. 보르네오섬에 갈 때 마다 이런 문방구를 싸들고 가는 것이 현지 방문객이나 센터 인근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방문할 때 이런 사무용품을 아끼지 않고 넉넉히 쥐어주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일전에 해외 원조프로그램 지도교수로 여름 방학 내내 학생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있던 동생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녀석도 남아공에 갈 때 볼펜을 비롯한 각종 사무용품들을 잔뜩 들고가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쓰라고 건네주었다.
하루는 한국에서 간 일행을 챙겨주는 정부관계자가 내 동생 사무실을 찾았다. 불쑥 나타나서는 잘 지내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이것저것 묻는 이 공무원을 보면서 필요한 용건이 무얼까 궁금해하는 차에 이 분이 찾아온 용무를 밝혔다.
“음, 주변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네가 안쓰는 볼펜이 아주 많다고 하던데…”
눈치 챈 동생은 바로 서랍을 열고 볼펜을 한줌가득 쥐어서 이 분에게 드렸다고 한다.
아침부터 큼지막한 두리안을 두덩이나 팔아서 기분이 좋아진 아주머니는 뜻하지 않게 볼펜까지 얻게 되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필기감이 부드러운 젤러펜이었으니 아마 한국에서 이천원쯤 할 것이다. 잘 나오지도 않는 오래된 싸구려 볼펜을 쓰다가 부드럽게 쓰윽하고 굴러가는 비싼 볼펜을 득템한 아주머니는 종이에 대고 몇번이고 볼펜을 그어보더니 나를 바라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다.
옆에서 아무말 없이 두리안을 정글도로 팍팍쳐가며 해체하던 아저씨도 이 상황이 궁금한지 아주머니와 함께 나와 내가 타고 온 트럭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곳은 코타키나발루 같은 관광지가 아니고 보르네오 섬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국도변이다. 간혹 내륙으로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버스를 타고 코타키나발루 인근의 키나발루산까지만 가지 더 이상은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간혹 트레킹을 하러 온 서양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분명 외국인은 외국인인데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혼자 이 곳까지 트럭을 몰고 와서는 노점에서 두리안을 사간다. 그리고 굳이 영수증을 챙기면서도 비싸 보이는 볼펜을 선뜻 가지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 조금전까지는 관심도 없던 이 낯선 이방인의 정체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두 내외는 두리안 봉지를 들고 서있는 이방인과 낯선 이가 몰고온 트럭, 그리고 이 사람이 건네준 펜을 번갈아 보며 몇마디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Are you…missionary? 혹시…선교사세요? “
뜻밖의 작은 횡재에 기분이 좋아진 노점상 내외를 붙잡고 ‘아니요 한국의 이동통신사가 당신네 나라 오지의 IT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정부와 협조해서 여기보다 더 오지의 작은 마을에 위성을 이용한 인터넷 센터를 짓고 있는데…’라는 말을 늘어놓아 가뜩이나 이 상황이 헷갈리는 내외를 더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명확해진 부부는 다시금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래 우리 동네에 선교사가 왔네요.’
더 이상한 말이 오고가기 전에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트럭으로 돌아왔다. 시동을 걸고 봉투를 열어 갓잡은 두리안 한쪽을 베어물었다. 기대했던 대로 묵직하면서 들큰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동승자가 있었다면 손으로 코를 쥐며 창문을 열었을 순간이다.
내 취향인지 모르지만 두리안은 콜라와 잘 어울린다. 밤에 먹을 때는 꼬냑을 탄 콜라와 함께 먹으면 완벽한 궁합이다. 두리안의 묵직한 뒷맛을 지우기 위해 콜라를 한모금 마셨다.
아마 오늘 저녁이면 마을에 한국에서 선교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