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참 역시 쓰촨성에는 술이 좋아 타지역 술이 못들어 오네요. “
중국 거리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식 주류전문점에 함께 들어가서 술 구경을 하던 중국인 직원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마디였다.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의 일이다.
나는 당시 청두에서 중국 국영기업과 합작회사 설립작업을 하다보니 거의 매달 청두에 가다시피 했다. 또 한 번 가면 2~3주씩 지내야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북경이나 상하이보다 청두가 더 친숙했다. 사실 청두에 있다가 일이주씩 서울에 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런데 북경에 있는 중국직원들에게 청두를 간다고 하면 무척 부러워했다. 중국 역사에 대한 약간의 이해와 함께 중국 지도를 보면 금방 수긍이 간다 우선 북경에서 청두까지는 비행기로 서너 시간을 가야 한다. 같은 나라지만 무척 먼 길이다.
단지 멀다고 해서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쓰촨성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근거지인 익주의 일부로 위촉오 삼국 중 촉나라에 해당한다. 당시 중원에서 촉으로 가려면 사진과 같은 유명한 잔도를 지나가야 했다. 이를 두고 중국 옛사람들은 장수 하나가 능히 대군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라고 했다. 장판교의 장비 실사판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장수 하나는 과장이겠지만 실제로 유비의 촉군 3만이 이곳에서 조조의 위군 10만을 막아냈다. 출사표를 올린 제갈공명도 북벌을 위해 이 검문관을 지나 위나라로 진군했다.
사방이 험한 산으로 둘러쌓인 쓰촨 분지는 이러한 지리적 여건덕에 중원에서 운이 다한 장수가 몸을 피해 훗날을 기약하며 힘을 기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중원에서는 가기 힘들고 먼 땅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조금 비약을 하자면 런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정도 되려나.
위에서 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검문관, Chinadiscovery
쓰촨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최변방이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쓰촨성은 서쪽 변방보다 한참 안쪽으로 들어와 있지만 이는 중공이 들어선 후 티벳과 위구르를 포함한 서역지방을 병합한 이후의 일이다. 티벳과 위구르뿐 아니라 내몽골 등 전통적으로 중국과 싸움을 벌이던 주변국가들을 2차 대전 이 후 혼란기에 모두 힘으로 편입시키며 중국의 지도는 이전보다 두배는 커졌다.
중국 지형도, 가운데 아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쓰촨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쓰촨은 늘 머나먼 변방의 땅이다.
삼국지 덕후들에게 인기있는 캐릭터 중 한명인 마초는 서량의 호족으로 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강족은 티베트인이고 당시 서량이라고 부르던 지역은 티벳 고원지대 일부와 몽골에 걸쳐있었다. 중앙아시아계 혼혈의 서구적인 외모로 서량옥마초라고 불리던 마초는 훗날 유비에게 복속되어 흔히들 ‘관장황마조’라고 하는 촉의 핵심 다섯 장군의 일원이 되었다.
티벳을 근거로 하는 봉건제후가 쓰촨성의 제후에게 투항한다는 구도는 현재 상황을 봐도 매우 그럴듯한 설정이다. 청두는 언제나 티벳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특히나 서장자치구(티벳)에서 청두까지 철도로 연결되면서 청두 북역 근처는 리틀티벳을 연상하게 할 만큼 티벳사람들이 하는 식당과 가게가 줄지어 있다. 티벳에서 중국으로 돈을 벌러 오는 사람들이 티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청두로 몰려드는 것이다. 티벳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대도시이니 반대로 중원에서 볼 때는 가장 먼 곳에 있는 도시가 청두인 셈이다.
두보초당이 있는 시성 두보의 고장인 동시에 판다의 고향이기도 한 청두는 이런 역사적 배경까지 갖추고 있어 많은 중국인들에게 한번쯤 가보고 싶은 장소로 꼽힌다. 그리고 호수와 강이 많은 지역적 특성 상 (인근도시 충칭은 장강이라고 불리는 양쯔강이 지나는 내륙 물류의 중심이다) 매우 건조한 중국 동북부와 달리 피부좋은 미인이 많다고도 한다.
실제 동북부 지역 출신이 다수인 북경의 현지 여직원들은 청두에 다녀왔다고 하면 ‘진짜 거기 여자들 피부 좋아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여담이지만 청두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농담삼아 미인이 많다던데 다 어디갔어요라고 물어보면 말떨어지기가 무섭게 북경이랑 상하이로 돈벌러 갔어요라고 대답한다. 즉 미인 이야기는 청두 사람들도 늘 듣는 말이다.
이런 연유로 중국직원들과 청두로 출장을 오면 북경에 있을 때 보다 재미난 일이 가끔 있었다. 비유하자면 한국에 출장오는 외국인이 늘 서울 잠깐 찍고 바로 전주로 출장을 가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들이 볼 때는 한 번쯤 같이 가보고 싶지 않을까?
북경에서라면 얼른 퇴근하고 집에 가거나 친구들 만나러 가야 하지만 어쩌다 온 청두에서는 이들도 나보다 더한 관광객 모드로 변한다. 그날도 퇴근 후 나 못지 않게 청두의 거리를 둘러보고 싶은 중국직원과 여기저기 쏘다니다 술 구경을 하러 주류전문점에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타 지역 술은 못들어오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
무식한 이방인의 질문에 친절한 중국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을 해준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내 법인카드로 저녁을 먹고 출장비 처리를 할텐데 이정도 쯤이야.
중국 내에서도 쓰촨성 일대는 술로 유명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바로 인근의 귀주가 마오타이로 유명한데 쓰촨의 명주도 중국내에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꼭 명주가 아니라 보통 등급의 쓰촨 백주들도 타지역에 비해 가성비가 높은데 그 넓은 땅에서 굳이 타 지역의 술을 쓰촨까지 들여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귀주의 마오타이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술이라면 (어쩌면)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중국술은 바로 쓰촨에서 나온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마셔보았을 수정방이다. 수정방은 출시된 이후 특히나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면세점에서는 거의 마오타이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한때 중국 출장을 가면 수정방을 꼭 사와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전통 명주에게 ‘출시된 이후’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다른 명주들에 비해 수정방은 그 역사가 매우 짧기 때문이다.
수정방은 1998년에 명나라 유적지를 발굴하다 발견된 술도가에서 출토된 술을 빚는 용기들과 누룩 등을 복원해서 만든 술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다른 명주 못지않게 오래되었지만 시중에 판매된 역사는 매우 짧다. 그런데 이 수정방에 대해 많은 중국인들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다. 바로 한국사람들이 이 술을 왜 그리도 좋아하냐는 것이다.
“근데 한국사람들은 왜 그렇게 수정방을 좋아해요? “
청두에서 만난 한 중국기업인의 질문이었다. 한국사람들과의 저녁식사이니 술은 당연히 수정방이 나왔고 쓰촨의 매운 요리들이 이어졌다. 한국음식에 고추가루나 고추장이 많이 들어가서 한국인의 매운맛이니 이런 표현들도 있지만 실제 매운 음식은 한국보다 외국에 많다. 고추라는 작물자체가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멕시코 음식 역시 매운 고추로 유명하고 중국에는 쓰촨음식이 맵기로 유명하다. 한국인의 매운 맛 컨셉처럼 쓰촨사람들 역시 남자라면 매운 음식을 잘먹어야 한다며 어깨뽕을 잡는다.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의 원조가 바로 쓰촨성의 샤브샤브인 훠궈이다. 중국 훠궈집에 가면 마치 짬짜면처럼 둘 (보통 태극 형태로 나뉜다)로 나뉜 용기에 한 쪽에는 매운 국물 (홍탕), 다른 한 쪽에는 사골국물처럼 구수한 국물 (백탕)을 나눠서 담아준다.
훠궈 말고도 쓰촨 요리는 매운 향신료를 많이 쓰는데 한 번은 정말 매운 개구리 요리를 먹고 며칠 동안 배가 아파서 귀국 후 내과에 갔다가 위출혈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쓰촨이 명주의 고향이 된 데에는 장강의 상류지역이라 수질이 좋은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이런 자극적인 음식과의 궁합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곁다리설이 길었는데 아무튼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한국인이 왜 수정방을 좋아하냐고? 유명한 중국술이라서 다들 마시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은 조금 달랐다. 수정방이 좋은 술은 맞지만 중국에는, 아니 쓰촨에만도 이보다 더 싸고 좋은 술이 많은데 왜 그 돈을 주고 수정방만 찾느냐는 말이었다. 중국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인들도 특별히 수정방만 찾는 경우는 드문데 왜 한국인들은 술하면 무조건 수정방만을 외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이국땅에서 좋은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현지인에게 듣는 전통주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탄력받은 왕서방 (미안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이름은 기억도 안난다)에게 계속 술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이 분 말로는 쓰촨성에는 4대 명주가 있다고 한다. 이 중 원탑은 우리에게도 비교적 잘알려진 우량액 (오량액)이다. 우량액은 쓰촨사람들에게는 귀주의 마오타이에 비할만한 자부심을 가진 명주인데 농향형 백주라는 특성상 향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다음으로 마오타이, 분주와 함께 중국 3대 명주로 꼽히기도 하는 노주노교가 있고, 검난춘과 량주가 뒤를 잇는다.
우량액, 노주노교, 검난춘, 량주 이렇게 네 가지 술이 쓰촨사람들이 생각하는 쓰촨 사대명주이다. 수정방은 좋은 술이긴 하지만 이 사대 명주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노주노교나 검난춘은 브랜드명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등급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발렌타인도 12년이 있고 30년이 있는 것처럼 노주노교도 특곡이니 이곡이니 하는 등급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높은 등급의 수정방은 낮은 등급의 량주 보다 좋을 수 있다.
가끔 현지인에게 들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특정 국적의 외국인이 한국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막걸리 브랜드에 꽂혀 매번 사먹는 통에 그 막걸리가 메이저 반열에 올랐다고 하자. 우리도 당연히 그 나라 사람을 만나면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까?
그런데 대답이 궁했다.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한국사람들에게만 중국 백주에 대해 특이한 입맛이 있어 수정방의 맛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건 분명히 아닐 것이다. 면세점에서 수정방을 찾는 한국 관광객에게 무작위로 중국 백주 네 종을 시음하게 한 후 수정방을 골라내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맞출까? 중국 출장만 수십번을 다니며 중국사람들과 수정방을 비롯한 백주를 정말 다양하게 마셔본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구별 못한다.
흔히들 말하는 장향형과 농향형, 청향형 등의 백주 타입도 우량액같이 특이한 한 두 종이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은 구분하기 힘들다. 이게 장향형인가, 청향형인가? 향이 좀 길게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른 백주에 비해 특별히 맛이 좋아서 수정방을 선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순간 수정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거였나?
수정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일까?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수정구슬 같은 보석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영어로 크리스탈이다. 세대에 따라서는 예쁜 여자아이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다. 크리스탈 역시 여돌들이 예명으로 선호하는 예쁜 영어이름이다. 수정방은 수정으로 된 방이다. 방안이 온통 크리스탈로 가득찬 수정방이라니 투명한 병에 담겨있는 더 투명한 백주의 이름으로 이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반면 중국에서 수정방은 정말이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여기서 수정은 크리스탈이 아니라 물수자에 우물정. 즉 우물이다.
수정방의 원형인 전흥대곡이 발견된 곳이 명나라 유적지의 우물 안이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된 이름이지만 크리스탈룸과는 전혀 어감이 다르다. 한자교육을 받은 우리는 술병에 쓰인 한문을 읽을 수는 있지만 수정방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혀끝에 맴도는 어감은 분명 우물이 아닌 크리스탈이다.
아마도 수정방을 만드는 회사에서는 마케팅과 브랜딩에 매우 고심을 했을 것이다. 쓰촨성은 과거 촉나라이기도 했지만 삼성퇴로 유명한 고대 유적이 있는 곳이다. 20세기 처음 발굴된 청두의 삼성퇴 유적은 마치 우주인을 연상시키는 청동상과 황금지팡이 등이 나오면서 화제가 된 곳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왕국 상나라, 하나라와 비슷한 시기인 약 4천년 전의 유적지라고 하는데 이들 고대왕국과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쓰촨성과 청두는 중국인들에게 뭔가 역사적 장소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도시에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그러나 아직 밝혀지지는 않은) 고대 문명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발굴된 삼성퇴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1990년대에 들어와 청두의 유적지에서 지금은 잊혀진 과거의 술이 나왔다.
주류회사는 기록에 나온 전흥대곡 대신에 이 술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브랜드를 짓고 싶었다. 그래서 명나라 시절 우물에서 출토된 것에 착안하여 물수자, 우물정자를 써서 수정방이라고 지었다.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스토리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근데 이 술은 왜 이름이 우물이야? “
“아 그건 말이야, 이 술이 발견된 곳이 명나라 유적지인데…“
그러니까 중국인에게 수정방이라는 이름은 역사적인 뉘앙스를 갖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크리스탈룸이라는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삼성퇴 유적, 청두 삼성퇴박물관
“아하,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크리스탈룸이라니 이해가 됩니다. “
왕서방은 막힌 혈이 뚫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수정방 병을 들고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직장인은 어딜 가나 다 비슷한 모양이다. 보스가 흡족해하니 그 자리에 있던 중국인들 분위기가 눈에 띄게 편해졌다. 다들 크리스탈이라는 말이 들어간 중국어를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기분좋게 웃기 시작했다.
한 중국 여자분은 ‘Crystal room, it’s so romantic’ 이러면서 보스가 내려놓은 술병을 들고 역시나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마치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