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철학에게 '도움'을 외치다
이빨빠진 호랑이가 된 신학, 철학에게 SOS를 치다
존재론이 무엇인지는 이제 대충 이해가 간다고 쳐도 현대 예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존재론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유럽, 특히 서유럽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철학의 발전 배경을 알아야 한다. 신학과 철학, 예술 간의 위계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겠지만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은 이 셋의 확고한 위계질서와 상호작용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그 순서를 예술 – 철학 – 신학의 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세 유럽에서 이 셋의 서열은 철저하게 신학 – 철학 – 예술의 순이었다.
권력을 가진 신학은 철학을 신학의 개념을 보완하는 시녀로 부렸고, 예술은 시녀인 철학이 주인인 신학을 위해 사용하는 빗자루나 냄비 같은 도구에 불과했다.
중세에 철학이 신학의 시녀가 된 이유는 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만드는 데에 철학이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교부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만들기 위해 당시만 해도 잊혀져가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존재와 표상이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이 것이 바로 신플라톤주의의 시작이다.
존재론, 즉 Ontology라는 단어는 17세기 무렵 처음 나오기 시작했지만 Being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어왔다. 이데아론이 바로 Being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그림자는 실재하는 존재 Being을 우리 눈 앞에 그려놓는 표상 ‘Representation’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바로 존재 Being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관심은 Being에 그치지 않고 윤리학과 수학적 진리, 논리학,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있었다.
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쯤에 와서는 아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반기를 들고 주 관심사를 자연과학과 정치학 등 현실적인 분야로 돌렸다.
만물박사라는 명칭이 가장 잘어울릴 법한 이 대철학자에게 존재 Being가 어쩌고 표상 Representation이 어쩌고 하는 이데아론은 귀신씻나락 까먹는 말장난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세가 되자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한물 간듯 보였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갑자기 신플라톤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반면 인류 최고의 철학자 반열에서 하루아침에 찬밥신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암흑기를 거치며 논리학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저서 대부분이 소실되는 굴욕을 맛보았다. 그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대부분 잊혀졌고, 르네상스가 되어서야 다시 이슬람으로부터 역수입되었다.
그렇다면 왜 인류에게 필요한 거의 전 분야를 섭렵하며 동시대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각광을 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작 그리스와 로마를 계승한 중세유럽에서는 철저히 외면을 받았고, 이에 비해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벙벙한 소리의 향연일 뿐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중세에 와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주일마다 통기타치고 복음성가 부르던 전직 교회오빠였던 나는 모태신앙이었던 관계로 성경의 가르침을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비판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반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야 기독교 신앙을 접한 이들은 이러한 질문을 수시로 던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데 그럼 그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이리저리 둘러대기 바쁘다. 가장 흔한 설명은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야. 그냥 믿어라’이다.
중세 유럽에서 신부님들이 도서관 장서고를 뒤적이며 해묵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끄집어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 창조 이전의 존재에 대한 신자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서기 392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제국은 이런 신자들의 원초적 궁금증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굳이 좋은 주먹 놔두고 입 아프게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군대를 병풍으로 세워두고 ‘예수천국 불신지옥’ 한마디만 던져주면 앞다투어 구주를 영접하는데 굳이 밤새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썰을 풀 이유가 있었을까?
하지만 서기 457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계열의 여러 왕국들이 난립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로마라는 큰 산이 사라지고 바티칸에 홀로 남은 교황은 주변의 이교도들뿐 아니라 성왕을 자처하며 왕권에 이어 신권까지 넘보는 게르만 왕들과의 권력다툼에서 무력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된 것이다.
특히나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 본토를 넘보던 이슬람세력을 피레네 산맥 너머로 쫓아버리고 나자 서유럽의 수호자는 더 이상 허울뿐인 교황이 아니라 실제 무력을 가진 왕이 되어 버렸다.
이들이 서서히 자국내 교회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교황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적어도 자기 나라 안에서는 주교를 임명하고 교회의 헌금을 걷을 권한이 이들 개별 국가의 왕들에게 넘어가 버리면 지금처럼 말 안 듣는 왕족 귀족들에게 서슬 퍼렇게 ‘너님 파문’만 외쳐도 알아서 기는 좋은 시절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바티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실제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교황에게 이혼 허락을 못 받은 헨리 8세가 아 일없다며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해 나갈 때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왕은 성공회의 수장, 즉 영국 내에서 교황의 역할을 겸임하고 있다.
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버리면 이제 교황은 왕들의 자비심에 기대어 생활비 받아쓰는 신세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몇푼 안되는 때묻은 동전을 십일조로 내는 할머니들의 신앙심에 전적으로 살림살이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순순히 권력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무력으로 현실의 왕들과 맞설 수 없었던 교회가 기댄 곳은 펜대였다. 상당수가 문맹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왕들을 상대해 펜으로 맞서는 교회의 전략은 의외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중세의 교회가 라틴어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각국의 현지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조차 금지한 배경에는 다 이런 다급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여전히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 세속의 왕들과의 경쟁에서 위협을 받지 않던 동로마 제국의 교황은 각국의 현지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허락했다. 따라서 서유럽의 로만카톨릭과는 달리 동방정교회에 속한 나라들은 일찌감치부터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결국에는 서유럽의 로만카톨릭이 종교개혁이라는 역풍을 맞으며 오늘날의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지는 동안, 동유럽의 정교회는 동서 로마를 모두 다스렸던 콘스탄티노프 대제 이래로 신앙과 형식에 큰 변화 없이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올바른 종교 - 정교 Orthodox라고 부르는 자부심은 여기에서 나왔다. 정교회가 각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물론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러시아, 세르비아, 조지아 등 독립 총대교구가 각자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을 갖도록 인정하는 여유를 보일 수 있게 된 배경도 다름아닌 무력의 보유, 권력의 독점이었다.
반면에 더 이상 닥치고 구원받으시라는 로마의 무력에 기댈 수 없었던 중세 서유럽의 성직자들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유럽의 사상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모든 초심자들이 한번은 묻고야 마는 창조 이전의 존재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의 Being에서 찾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존재 그 자체 말이다.
먼 유럽까지 건너가 교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의 신부님 한분은 ‘성경이 뿌리라면 교부는 줄기’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무리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도 줄기인 교부가 없었다면 열매인 현재의 신앙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기독교는 예수 탄생과 함께 완성된 종교가 아니다. 원시기독교는 그 당시에 이미 숱하게 존재하던 유대교 아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를 처음으로 종교의 모습을 갖추게 해준 이가 사도 바울이다.
교황청은 고사하고 교황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살다 죽은 바울이 초대 교황의 반열에 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예수 사후 바울을 위시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종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문자 그대로 기독교의 아버지 역할을 한 교부들은 로마 멸망 이후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권까지 노리던 게르만 왕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남아있던 토착종교들과의 세력다툼을 위해 그 누구도 함부로 시비걸지 못하게끔 교리를 갈고 닦아나갔다.
결국 펜이 칼을 부러뜨렸다. 프랑스의 중세학자 미셀 파르투로는 ‘곰, 몰락한 왕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곰으로 상징되는 유럽 본토의 여러 토착신앙들이 사자를 앞세운 기독교의 공세에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직립하는 유일한 맹수이자 여러모로 인간과 닮은 모습의 곰은 곰이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다. 인간과 곰이 결합한 웅녀의 다양한 버전은 문화권마다 존재한다.
여기에 곰이 존재하지 않던 중동의 기독교 문화가 아프리카 (유대인의 히브리어는 아프리카계 셈족의 언어이다)의 사자를 상징으로 앞세워 침투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수많은 북유럽과 중부유럽의 토착신앙들을 한데 엮어 교황에게 대항하려던 문맹의 왕들은 교부들에 의해 원시종교에서 탈피해 탄탄한 철학적 기반까지 갖추게 된 정통기독교에 굴복했다.
물론 교부들은 융통성을 발휘하여 이들 토착종교의 기념일을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등으로 제목만 바꿔서 지역마다 뿌리깊은 전통 축제를 그 날짜에 맞추어 계속 열게끔 허용해주었다. 또 토착종교의 신들에게는 수호성인이라는 명찰을 달아 기독교 체계 안으로 흡수시켜 계속 숭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이러한 융통성의 배경에는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었던 무력의 부족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어느정도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해주고 타협을 해야지 토착세력들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놓고 양학을 할만한 무력이나 자신감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파르투로는 이 과정을 폐위당한 곰과 사자의 대관식이라고 표현했다.
철학, 신학의 시녀가 되다
이렇게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마따나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에 철학은 시녀 신분에서 독립하여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확립해나갔지만 시녀 시절 몸에 배인 습관이 쉽게 변할리 없었다. 근대까지만 해도 서양철학의 주류는 이런 지난한 역사를 가진 존재론에 기반하였다.
이런 철학의 굴욕적인 역사를 빗대어 캠브리지 대학의 철학교수였던 알프레도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신의 존재, 창조 이전의 세계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존재론은 철학이 신학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자가발전을 지속해 니체와 하이데거를 거치며 근대까지도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들은 최대한 단순하게 말하자면 절대왕정과 시민사회를 거치며 이제는 교황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라는 그 ‘존재’의의를 상실한 존재론의 형이상학적 이원론 (존재 Being와 표상 Representation)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론은 단지 교회에 권력을 가져다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까지 과학과 분리되지 않았던 철학은 과학적 발견에 많은 개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이 시공간에 대한 데이비드 흄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지만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나 존재론에서 빌려온 빅뱅이론의 철학적 배경이다.
빅뱅이론은 기독교의 창조의 순간을 문자 그대로 카피해서 옮겨왔다. 창세기를 처음 접한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빅뱅이론을 접한 많은 이들 역시 똑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럼 빅뱅 이전에는 우주가 어떤 모습이었나요?”
교부철학자인 히포의 아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시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 이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이 주장은 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빅뱅 이론을 주장하는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복붙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빅뱅 이론을 처음 주장한 물리학자가 바로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황청의 과학원장을 역임한 벨기에의 신부, 조르주 르메트르였기 때문이다.
르메트르는 우리가 흔히 허블법칙으로 알고 있는 V=r*H 라는 은하의 후퇴속도를 구하는 공식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허블은 르메트르가 발표한 개념을 실제로 관측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카톨릭 신부인 르메트르가 누가 보아도 천지창조에서 개념을 따온 이 가설을 처음 발표했을 때만 해도 당시 천문학계의 주류였던 정상우주론을 신봉하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신부님이 또 한건 하셨네’ 하는 반사적인 거부반응부터 보였다.
아인슈타인 역시 처음에는 우주의 탄생에 대해 카톨릭 신부님이 만든 이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허블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팽창을 실제로 관측하고 이를 학계에 발표하자 입장을 바꾸어 르메트르의 우주론을 ‘현재까지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우주론’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관측에 의해 입증이 된 빅뱅이론 만큼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지금도 ‘비이성적인 종교에 대한 인간 이성의 승리’라는 프레임을 선호하는 과학자들로서는 현대의 물리학을 지배하는 이 가설을 신부님이 성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는 사실 만큼은 굳이 널리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빅뱅이론이라는 단어는 누구나 들어보았지만 정작 그 창시자의 이름은 그 업적이 빅뱅이론을 만들어낸 르메트르보다 꼭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는 호킹이나 허블 같은 이들만큼 대중에게 친숙하지는 않다.
르메트르가 만들었으나 한 때 허블법칙이라고 불리우던 이 공식을 이제는 많은 과학자들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부르고는 있지만,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망원경은 여전히 허블 망원경이라고 부르지 르메트르 망원경이라고 고쳐 부르지는 않는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교부들의 치열한 고민이 결국 빅뱅이론을 탄생시켰다. 창조 이전에도, 빅뱅 이전에도 존재하던 상태가 바로 Being이다.
그런데 이 존재에 대한 교부철학자들의 천년에 걸친 담론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 이 땅에 상륙하면서 단 두마디로 열화되었다. 바로 ‘믿쑵니까? 아멘’이다.
자손들의 복을 빌기 위해 예배당을 찾아온 촌부를 붙잡고 우리말로는 설명할 수도 없는 이 창조 이전의 존재, Being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구원받겠다고 제발로 찾아온 새신자를 극락왕생하시라고 절로 쫓아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믿습니까 아멘’은 존재를 둘러싼 천년에 걸친 교부들의 고뇌만큼이나 치열했던 이땅의 목사님들의 고민과 번뇌가 탄생시킨 명문인 것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