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예술을 가스라이팅하다 II

예술을 뒤에서 조종하는 철학, 그리고 철학을 지배하는 신학

수많은 현대미술은 아름다움 보다는 사상과 철학을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수지 호지, 예술사학자


예술의 철학적 배경, 그 시작은 존재론으로부터


이렇듯 현대예술이 등장한 배경을 알려면 예술의 뒤에 숨어있는 서양 철학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왜 존재라고 불리우는 Being에 대한 논의가 서양철학에서 그리도 중요한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 시작은 놀랄만큼 간단했다.


서양 사상사의 큰 흐름은 우리 모두가 매일같이 고민하는 밥그릇 싸움에서 시작되었다. 로마라는 큰 산이 무너진 후에 남은 고만고만한 왕들과 교황 간에 유럽의 부와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도토리 키재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밥그릇 싸움에서 무력이 부족한 교황의 이론적 무기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신학과 철학이다.


존재론은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대변되는데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세상의 궁극적 근거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한다.


설명부터가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신은 있는가, 우리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의 기원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등등 도대체 비싼 밥 먹고 왜 저런게 궁금할까 싶은 벙벙한 명제들로 가득차 있다.


아니 어쩌다 등따시고 배부른 한두명이 이런 걸 궁금해할 수는 있다. 왕과 교황 사이의 밥그릇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철학사조는 쭉 존재해왔다.


그런데 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있어왔던 이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중세에 들어와서부터 철학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 후 천년에 걸쳐 정치와 사상, 예술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 예술 사조의 흐름은 그냥 이해가 된다. 예술가들이 들으면 기분나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은 그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을 하자면 서양 철학에서 존재론은 창조 이전의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위해 발전해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데 그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힌트를 찾은 존재론이다. 바로 존재, Being이다.


근원적인 존재 Being에 대한 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그 결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 (신, 천상 등등)를 충실하게 현실에서 ‘표상’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예술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후 자연과학과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설 자리를 빼았겼고, 인간의 이성과 감각에 기반한 인식론이 철학의 대세가 되었다. 그러자 이에 발맞추어 예술에서도 인간의 감각에 기반한 주관적인 독창성이 예술의 주가 된 것이다.


이제 이 존재론이 어떤 것인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골치아픈 이야기이지만 존재론에 대한 이해없이 서양 예술의 흐름을 논하는 것은 정말이지 껍질만 핥으면서 수박맛을 평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는 지금도 서양철학의 근본 명제 중 하나이지만 이 ‘존재’라는 한국어 단어가 서양철학의 핵심인 존재론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다시 말하지만 Being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다 배우는 Be동사의 분사형인 Being 말이다. 누구나 쉽게 아는 단어같지만 존재 Being에 대한 서구의 열띈 토론이 한국에서는 전혀 납득이 안가고 뜬구름잡는 소리로 들리는 이유는 다름아닌 Being의 번역에 있다.


이 Being은 한국어의 ‘존재를 과시하다’라는 말처럼 적극적인 의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Be 동사는 그냥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을 말한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동양인의 개념에서는 무 無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이 서양철학의 Being이다. 앞서 말한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이 있었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이 바로 Being이다.


빅뱅 이론을 다름 아닌 교황청의 과학원장을 역임한 벨기에의 신부 르메트르가 만들어 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MIT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신부님은 성경의 천지창조에서 우주의 탄생, 빅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의 책만 읽다 보면 물리학자와 신부님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존재같지만 우주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모두 한 점에서 만난다. 빅뱅 이전 혹은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가 바로 Being이다.


몇 년 전 대히트를 친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 도깨비역을 맡은 공유에게 삼신할매로 분한 이엘은 ‘이제 그만 무無로 돌아가’라는 대사를 수시로 던진다. 이 말을 나보고 영어자막으로 번역하라고 하면 무無를 Being이라고 번역할 것이다. 실제 검을 뽑고 소멸된 도깨비가 돌아간 곳은 신도 존재하지 않는 저승도 이승도 아닌 곳이다.


무로 돌아간 도깨비에게 신의 목소리는 말한다. ‘이 곳에는 이제 나도 없다’고 말이다. 김은탁은 공유를 빅뱅 이전, 혹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려보낸 것이다.


한국어의 존재하다에 해당하는 영어는 Be가 아닌 Exist이다. Be라는 개념을 가진 동사는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그렇다고 또 딱 무의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존재론에 대한 여러 글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땅에서 단군 이래 가장 유명한 오역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누구나 잘 아는 셰익스피어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쓴 적이 없다. ‘To be or not to be’라고 했을 뿐이다. 존재론에 나오는 그 Be 동사다.


세상의 부조리에 직면한 젊은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던진 화두는 오랜 기간 서양철학의 기본 명제였던 존재 Being의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햄릿의 오역은 원뜻을 완전히 왜곡한다. 형이상학의 가장 큰 주제인 세상의 궁극적 근거 Being에 대한 고민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세상살기 힘드니 마포대교 위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땅의 영문학자들도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의 이상섭 교수는 얼마전 셰익스피어 전집을 발간하며 이 부분을 ‘존재냐 비존재냐 이것이 문제로다’로 아예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어의 존재는 영어에서 Exist라는 동사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 Being을 표현할 우리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을 한참 하다말고 한국말로 불쑥 ‘존재냐 비존재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대사를 던지면 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은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햄릿이 도깨비로 빙의해서 ‘무냐 유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해버리면 말 그대로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다.


의역을 하면 오역이 되고 직역을 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다른 예로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인 ‘소유냐 존재냐’를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의 제목을 들어봤겠지만 정작 읽어본 사람은 드물고 번역본이라도 읽어본 사람 중에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이유가 바로 이 책이 존재론의 ‘Be’에 관한 언어철학적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냐 존재냐’에 대해 철학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쓴 해설을 봐도 대개 작금의 물질문명이 소유욕을 강조해 인간 본연의 존재의 중요성을 잊고 있다는 도덕경 식의 썰을 풀고 있다.


‘소유냐 존재냐’의 원제목은 ‘To have or to be’, 즉 존재론에 나오는 Be이다. 문제는 앞에 나온 have 동사의 해석이다. 프롬은 Be 동사와 대척에 선 개념으로 Have 동사를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소유와 존재는 서로 대척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 프롬이 왜 소유와 존재가 왜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았는지 한국어로 아무리 썰을 풀려고 애를 써봐야 로댕이 오뎅으로, 오뎅이 뎀뿌라로 바뀌는 촌극에 불과하다.


그런데 Be 동사와 Have 동사가 왜 대척점에 있다는 말인가? 독일인인 프롬이 영어로 쓴 이 제목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어로 설명할 때 가장 쉽게 이해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어로 배가 고프다를 J’ai faim이라고 한다. 직역하면 나는 배고픔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하면 I am hungry가 아닌 I have hunger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 너 몇살이냐는 말은 Quel age avez vous, 역시 직역하면 너는 몇 살을 가지고 있니, 영어로 What age do you have이다.


모두 be 동사가 아닌 have 동사를 사용한다. 반면 영어는 같은 뜻을 모두 be 동사로 표현한다. 왜 그럴까?


Being으로 설명되는 존재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라틴어에서 be 동사는 변하지 않고 영속적인 속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틴어에서는 바로 없어지는 속성에 이 신성한 be 동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배고픔은 뭔가를 먹으면 바로 없어지는 순간의 속성이다. 나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가 바뀌기 전에라도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 나이이다. 그렇기에 라틴어에서는 이런 순간의 속성에는 존재를 표현하는 be가 아닌 have 동사를 사용한다.


반면 그녀는 아름답다 Elle est belle, 장미는 붉다 La rose est rouge 같은 문장에는 라틴어에서도 be 동사를 사용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고 추해지거나 붉은 색도 바래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움과 장미의 붉음은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늙고 주름지더라도 내 눈에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be 동사를 쓴다. 하지만 내가 우긴다고 그녀가 영원히 스무 살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녀의 나이에 대해서는 be동사가 아닌 have 동사를 쓴다. 프랑스어로 ‘Elle a ving ans’이라고 말이다. 직역하면 ‘그녀는 스무살을 가지고 있다’이다.


이제 우리는 라틴어가 가지고 있는 be동사와 have 동사의 용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라틴어의 be 동사는 존재론의 개념을 현실에서도 충실히 구현한다


재미있는 것은 시간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사람의 나이를 말할 때는 have 동사를 사용하는 프랑스어지만 시간을 말할 때는 be 동사를 사용한다. 지금 몇시냐는 프랑스어는 Quel heur est il, 영어로 what time is it과 동일한 구조이지 what time does it have 같이 have 동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자들이 벌여온 수많은 논쟁과 정의를 보면 이해가 된다. 존재론에서 시간이란 우리가 속한 차원에서는 변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는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몇시냐’는 질문에서 ‘지금’은 말하는 순간 지나가버린 순간의 속성이다. 지금 몇시냐는 질문을 한 순간 더 이상 그 때 말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역시 빅뱅 이론과 원자론을 비롯한 물리학의 다른 수많은 이론들처럼 서양철학의 근본인 존재론에서 그 발상을 얻었다.


‘소유냐 존재냐’라고 번역된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 본성에 충실하려면 소유욕을 절제하라는 도덕적인 설교가 아니라 이 세상을 have 동사의 관점에서 볼 것이냐 be 동사의 관점에서 볼 것이냐하는 언어철학적인 내용이었다.


이렇듯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소유냐 존재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등 우리에게 잘 (못) 알려진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존재론, Being에 대한 서양철학의 천년에 걸친 논쟁의 산물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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