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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깃발을 달았더니...”

[쪽샘살롱 03] 공간 만들기

by Harry Yang

옥상 정원 만들기

쪽샘살롱은 루프탑의 고분 뷰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사실 일 년간 옥상에 손을 대지 못했다. 처음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를 둘까 했는데 햇볕을 막을 길이 없어서 난관이었다. 천막이나 타프를 설치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건물 사방에 거치는 것 없이 휑하니 뚫려있다 보니 한번 바람이 불면 장난이 아닌 강풍이었다. 한 번은 3 mX3 m 크기의 파고라 천막을 사다가 설치했는데, 바람이 부니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는 낭패를 만났다. 결국 철거하고 그 천막은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했다. 옥상에 바비큐 시설도 해놓고, 의자도 늘어놓고 일광욕을 하며 느긋이 쉴 수 있는 공간을 펼쳐보자는 애초의 구상은 막상 지내보니 일 년 중 상당수의 날이 비, 바람, 황사 등으로 옥상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현실 앞에 좌절되었다. 필요한 시설을 더 설치하려니 비용도 그렇고, 안전문제에서도 자유롭기 어려웠다. 그렇게 처음의 의욕이 꺾이자 공간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인데, 어느 날 귀인이 나타났다.


경주에서 다양한 지역 활동을 하던 목사님 한 분이 루프탑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자기가 거기 꾸며볼 테니 허락을 할 테냐고 물어왔다. 정확히 어떤 구상인지 다 듣지도 못한 채 그분의 의욕에 설득되어 그러시라고 답을 했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트럭을 몰고 여기저기서 자재를 구해 오고, 혼자서 들통을 지고 옥상을 오르내리더니,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무 자재가 올라왔고, 화물 운반용 나무 팔레트도 생겼다. 거기서 몇 날 며칠을 목공을 해서 나무 화분을 짜고, 테이블을 설치하고, 앉을 의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또 어디서 흙을 한 트럭 구해와서 혼자서 등짐을 지고 져날라서 화분에 채워 넣었다. 주변의 원예업 하는 분에게 부탁해서 심을 꽃모종을 구해오고, 물을 줄 수 있도록 호스까지 연결해 주었다. 작업이 한두 주 걸리기는 했지만, 옥상은 텅 빈 공간이었다가 꽤 구색을 갖춘 공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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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탑 라이프

봄에서 가을 시기에 옥상은 푸른 기운이 가득했다. 밤에 노란 전구들이 옥상을 가득 채우면 화분에 심은 갈대며 몇몇 꽃들이 보기 좋은 풍경을 연출했다. 쪽샘살롱을 사랑하는 지인이 바비큐 그릴을 선물해 주어서 해지는 풍경을 보며 고기 구워 먹어 보겠다던 소원을 그렇게 성취했다. 여러 번 지인들을 초대해서 장작불 피워놓고 바비큐를 해서 먹었다. 정면으로는 쪽샘고분군과 멀리 경주 남산까지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저녁 무렵에는 서쪽으로 발갛게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며 우리는 고기를 종류별로 굽고, 과일과 야채와 와인과 맥주를 원 없이 먹었다. 음악, 음악이 곁들여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게에서 스피커를 들고 올라와서 청아한 음색의 재즈가 퍼져나가면 이미 어둠이 깔린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어느 시기에는 외국인들이 꾸준히 저녁노을을 보러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매일 저녁 문 열 시간 즈음에 와서 하이볼 한 잔이나, 맥주 한 병을 챙겨 들고는 옥상에 앉아 한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서쪽 하늘을 보고 갔다. 이것은 분명히 그들의 여행 문화였다. 보기 좋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저녁 무렵의 하늘을 배경으로 혼자서, 혹은 친구와 한 잔 나누며 대화하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경주에서 그런 모습이 연출되는 장소가 달리 있었던가?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초저녁 시간을 채워줄 공간으로 쪽샘살롱이 눈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경주의 특정한 시간을 포착하는 공간이라니, 그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역할이다.


지역의 동호회 모임들 중에도 쪽샘살롱을 잘 활용해 준 이들이 있었다. 암호처럼 '알모임'이라고만 부르는 한 그룹은 두어 번 이벤트를 벌였는데, 옥상 공간에서 어쿠스틱 콘서트를 열었다. 얼추 30여 명이 늘어앉아서 초저녁부터 밤까지 야외 콘서트 겸 파티를 즐겼다. 기타로 음악을 연주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모임도 있었고, 음질 좋은 스피커를 설치해서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원 없이 음악을 들은 날도 있었다. 나는 지금에야 아쉬워하는 바이지만, 작은 콘서트를 꾸준히 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양의 고분군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라도 하나 남겨두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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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8750.JPEG '알모임'의 어쿠스틱 콘서트 파티가 루프탑에서 열렸다. 아, 가을이었다!



레인보우 깃발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앞에는 긴 나무를 하나 세워놓았는데, 거기에는 레인보우 깃발이 달려있다. 쪽샘살롱 첫 해에는 핼러윈 파티를 거하게 했는데, 그날 밤 이태원에서 대형 참사가 벌어져서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그다음 해부터는 핼러윈은 더 이상 파티를 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연말의 크리스마스 시즌이나 연초가 조금 북적거리며 파티를 할 수 있는 시기이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무슨 핑계든, 명분이든 필요한 법이다.


매년 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라고 해서 LGBTQ 권리 신장을 기념하는 시즌이 한 달간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이런 주제로 일을 벌이는 것은 꽤나 이질적이거나 논쟁적일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여기서 그런 몸짓 하나쯤 있다고 그렇게 큰 일일까 싶기도 했다. 내가 했던 생각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자신이 LGBTQ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이 사회가 그들에게 적대적 공간이 아니라고 천명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일 년에 한 달 정도 그런 의사표시를 하는 시즌을 빌어 표현해 보는 것이 취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정도의 생각과 태도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깃발 하나정도 거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역사회에, 혹은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작은 친절과 개방성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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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달아놓으니 ‘왜 그런 깃발을 달았느냐? 무슨 의도냐? 너도 게이냐?’ 같은 류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내게 그리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동성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이라고 조심스레 서두를 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이런 것을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당혹감과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호의적인 반응을 접했다. 지나가다 깃발을 보고 맥주 한 잔 마시러 왔다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외국 관광객도 있었다. 깃발 사진 찍어서 자기 소셜미디어에 올리겠다고 왔던 외국인도 있었다. 한동안 쪽샘살롱 옥상에 한 잔 하면서 일몰을 보러 오는 외국인들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옥상에 레인보우 깃발이 휘날리던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레인보우 깃발은 원래 한 달 정도 달아두려고 했던 것인데, 정작 내리려고 보니 옥상이 썰렁해 보일 것 같아서 몇 달 더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낡고 헤어져서 깃발을 내렸는데, 원래 주문할 때 1+1으로 하나가 더 왔던 것이 있어서 다시 새 걸로 달아둔 상태이다. 레인보우 깃발은 그렇게 쪽샘살롱이 문 닫을 때까지 걸려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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