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샘살롱 04] 살롱 역할하기
쪽샘살롱은 처음에는 목금토 3일 저녁만 장사를 했다. 얼마나 건방진 전략이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가 없다 싶긴 하다. 원래 구상에는 온갖 변수가 다 들어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의욕적으로 매주 1-2회 발송하는 글 메일링 리스트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읽기와 쓰기를 위한 컨디션을 잘 유지하려면 매일 저녁 장사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몸에 밴 오랜 관행도 존중해야 했고, 주초에는 손님들이 별로 없는데 가게 지키느라 시간 쓰는 것이 좀 주저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장사는 주 후반으로 몰아서 하고 다른 시간은 대관이나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비워놓아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비즈니스의 지속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목금토 저녁만 영업을 하는 것으로 정하고 시작했다. (이 영업시간은 곧 하루가 늘어서 수목금토가 되었다.)
그다음 과제는 그러면 월화(수) 저녁시간과 주 중 낮시간에 이 공간은 뭘로 쓸 것이냐, 뭘로 채워 넣을 것이냐가 된다. 나는 지역 내에 그만한 수요가 있거나, 그게 아니면 내가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채워 넣을 수 있을 줄 생각했었다. 이 판단은 즉각적으로 잘못된 과대망상임이 드러났다. 연결할 만한 몇몇 모임들을 알아보았는데, 이미 지역활동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거지가 있었다.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는 경우가 아니면, 이미 형성된 네트워크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비는 시간대를 꽉꽉 채울 정도로 나의 에너지나 활동성이 높지도 않았다. 나는 외부 자극이 크지 않는 한,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었다.
결국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콘텐츠로 시작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독서 모임'이었다. 지역 내에 이미 몇몇 독서모임이 존재하고 있고, 꽤 활동이 활발한 곳도 있었다. 괜히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해서 경쟁관계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내용에서 차별성을 두고, 약간의 진입장벽을 만들어 두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철학책 독서모임>이었다. 일차적으로 '철학'을 주제로 정한 것은, 그것이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방장, 셰프 박 선생은 사실 영어와 프랑스어 철학책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친구다. 서울서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였는데, 고향인 경주에 왔더니 그가 경주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유(Alain Badiou)를 전문으로 번역하는 국내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주요 번역자이고, 그 외에도 주요 인문사회 출판사와 두꺼운 책들의 번역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 어렵지 않은 철학책을 하나 정해서 읽어 나간다면 그의 도움과 후광을 입기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처음 같이 읽자고 추천해 준 책의 제목이 마침 <철학책 독서모임>이었다. 국내 주요 인문학출판사의 젊은 편집자들이 모여서 철학책을 같이 읽고난 뒤 한 챕터씩 정리한 포맷이었다. 최근 10년 사이에 국내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철학 공부한다고 덤벼들었다가 자칫 방대한 철학사나 복잡한 철학자의 사상에서 길을 잃기 쉬울 텐데, 약간은 수박 겉핥기식의 구성도 마음에 들었고, 최근 출판 트렌드를 이해할 수 있다거나, 젊은 편집자들의 관심사와 감각도 엿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게다가 덤으로 저자 박동수 편집자는 우리 셰프 박 선생과도 교분이 있고, 경주 출신이기도 했다. 독서 모임에 직접 초대를 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경주 고향집에 올 때 두어 번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2023년 상반기부터 쪽샘살롱을 기반으로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 <철학책 독서모임 I>(2023.02.14-04.18), <철학책 독서모임 II>(2023.10.17-11.28)가 훅 지나갔다. 2024년에는 다른 활동이 증가하면서 독서 모임은 소강상태였다. 그러다가, 연말부터 불이 붙어서 2025년 상반기 내내 <삼국사기 독서모임>이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두 명의 혁혁한 기여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역사 박사과정을 수료한 또 다른 박 선생과 도자기 평론가이자 온갖 역사와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한량 이 선생. 이 두 분 덕에 삼국사기 모임은 정말 쫄깃한 시간이었다. 두 권짜리 <삼국사기>를 6개월 만에 독파할 수 있었다.
올해 6월에 쪽샘살롱을 접게 되면서 우리는 독서모임의 내용을 새롭게 구상하고, 모임 장소도 새로 찾아야 했다. 감사하게도 공간은 금방 연결되어서 현재 경주제일교회 교육관의 작은 도서관 공간에서 매주 1회씩 모임을 하고 있다. 8월 한 달간 <심청전>을 읽었고, 9월부터 <새 고려 왕조사>를 강독형식으로 읽고 있다. 최소 6개월은 하게 될 것 같고, 어쩌면 더 길어질지도 모를 벽돌책인데, 현재 매우 즐겁게 읽고 있다.
2023년 두 번의 독서모임 사이 시간에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경주시에서 진행한 시민 공모사업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제출한 프로젝트가 다행히 선정되어서 우리는 100만 원을 지원받는 작은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구성원은 책모임의 핵심멤버였던 셰프 박 선생과 불교전공자 박 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우리 프로젝트의 제목은 '모던 경주'였고, 목표로 한 결과물은 근대시기 경주의 역사유적을 담아낸 지도를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불교 박 선생은 이미 이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구상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나는 그전 해에 <낭만 경주>란 책을 출간하면서 '근대 경주'에 관심을 두고 언젠가 글쓰기에 도전하려던 참이었으니 이 프로젝트 준비하며 공부하기에 딱 좋았다.
우리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을 투입해서 각자가 잘하는 것을 꺼내놓았다. 근대 경주의 시간을 설정하고, 공간을 지정하고, 거기에 해당되는 현재 경주의 공간을 매칭시켰다. 실제로 그 장소들을 답사하였고, 관련 자료를 섭렵해서 글을 만들었다. 전체 구상이 된 다음에는 내가 원고를 쓰고, 세 사람이 그 내용과 진행 상황 전반을 검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불교전공자 박 선생이 디자인을 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이 프로젝트 지원금은 디자인, 일러스트, 인쇄비를 감당하기도 턱없이 적은 것이어서 우리는 시제품 약간만 제작할 수 있었다. 주변에 나눠주고, 피드백을 받아보는 용도로 사용했다. 조만간 이를 제대로 다듬어 대중들에게 선 보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때 공부하고 정리한 내용으로 10여 회 분량으로 이메일 연재를 했다. 그 내용은 2024년 상반기에 온라인 플랫폼 브런치스토리로 옮겨서 <모던 경주>란 제목 아래 총 13 챕터 분량의 브런치북으로 완성했다. 근대 시기 경주를 주목한 희소성 때문인지 지금도 꾸준히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내용은 앞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2022년 11월에 경주에 대한 나의 첫 책 <낭만 경주>를 출간했었다. 쪽샘살롱의 정식 오픈 직후라서 어수선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미루지 말고 무조건 책을 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강행을 했고, 이 책은 꽤 널리 사랑을 받았다. 이 책의 원고 역시 나의 예전 이메일 연재를 초고로 삼아 발전시킨 것이다. 경주에 관한 책은 여행 가이드 혹은 특정 주제를 다룬 에세이 류가 전부였던 터라, 경주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을 만한 책이 드물어서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내 책은 특히 경주 출신들이 좋게 읽어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줄 몰랐다'거나, '경주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거나, '경주를 보는 태도나 시선이 매우 독특한데 공감이 많이 되었다'는 내용 등이었다.
책이 나왔고, 그 책을 좋게 읽은 사람들이 생기면서, 실제 저자의 안내를 따라 경주 여행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물론 이 책은 그간 경주를 다녀간 이들을 내가 안내하면서 구상한 것이었기에 주변 지인들 중에는 경주 여행을 이미 여러번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낭만 경주>란 이름을 천명하고 새롭게 여행을 만들어서 앞으로 이런 모델을 잘 발전시켜 보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 함께 했던 여행클럽 '재열투어'에서 홍보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렇게 10여 명의 멤버들이 구성되었고, 각자 경주를 찾아와서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2박3일 이내의 일정으로 경주 구도심과 남산을 중심으로 돌아볼 수 있는 코스를 짰다. 저녁 식사는 쪽샘살롱에서 경주의 맛집에서 별미 음식을 공수해다 차려놓고, 저녁 내내 식사와 와인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포항, 울산 등지의 지인들도 맛있는 음식 한두 가지를 들고 찾아오고, 경주의 지인들도 모여들어서 <낭만 경주> 투어 참가자들과 어울렸다. 여행자와 로컬의 지인 커뮤니티가 만나는 기회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2024년 상반기에는 브런치스토리 연재와 <서악마을 이야기> 출간 업무 등이 걸려 있어서 다른 활동을 할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경주 지역의 도자기, 특히 해겸 김해익 선생의 고려청자 재현 작업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렇게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영역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해겸 선생의 청자 재현 작업을 소개하기 위해 경주 구도심의 작은 공간을 하나 빌려서 두 달 반 동안 도자기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전시회는 '한국 도자기 연대기'란 이름으로 2024.07.15-09.28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국 도자 역사 강의를 같이 진행시켰다. 이런 전시와 강의는 도자기 평론가 이 선생님의 기량이 발휘되어야 할 일이었다. 전시회의 기획, 홍보, 운영 등은 쪽샘살롱-해리하우스의 몫이었다. 루프탑 정원을 만들어 준 김 목사님의 배후 활동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해겸도요의 가마 작업도 보러 가고, 전시회를 위해 공간도 정비하고, 여기저기 알리고 홍보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2024년 여름에는 또 다른 공모전이 있었다. 경주에서 프리미엄 여행 상품을 만들어 보는 프로젝트 공모전이었는데, 해커톤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우리 팀은 '경주 도자기 만찬'을 구상해서 내어놓았다. 기획안은 너끈히 수상을 했고, 우리는 5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지원금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파일럿 이벤트를 한 번 만들어 보았다. 경주 남산의 육부전 한옥 공간을 사용해서 한식 코스를 제공하는데, 경주에서 난 도자기나 놋그릇 등을 사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미식 체험을 위해서는 '흑백 요리사'에 출연해서 깊은 인상을 남긴 셰프 2분을 초청했다. 경주와 도자기는 이렇게 미식으로 확장될 수 있고, 박물관 본관 전시실과 수장고 모두에 차고 넘치게 전시된 도자기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도자기와 관련된 전시회와 행사 경험은 2025년 5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대형 전시회가 성사되는데 매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쪽샘살롱이 이 전시회 시기에 막을 내렸으니 <한국 도자 연대기> 전시회의 성사는 쪽샘살롱이란 공간이 노력한 1년 정도의 공이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쪽샘살롱은 숱한 기획 회의와 실제 전시 준비로 차고 넘치게 많이 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내가 쓴 <낭만 경주>나 <모던 경주>의 내용을 바탕으로 매주 토요일 오전에 90분짜리 토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았다. 이것은 누군가 경주에 여행을 오게 되면, 으레 들러서 경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서 팁을 얻어 여행 일정이나 내용을 짤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면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취지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사람들은 경주 여행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에 굉장히 많이 올라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엔 비슷한 내용의 반복과 피상적 정보의 과잉이 심각한 상태이고, 한 단계 더 들어간 퀄리티 높은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카페나 강연장을 하나 정해 놓고, 누구든 거기에 와서 준비된 내용을 듣거나 궁금한 것을 질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2024년 7월부터 쪽샘살롱에서 약 3개월 정도 <딮경주>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았다. 우선 일정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쪽샘살롱에서 첫 한 달은 무료로 운영하고, 그 다음부터 유료화하는 것으로 구상했다. 이를 위한 예약 시스템도 '카카오 예약'으로 만들었다. 온갖 것을 혼자서 다 만들어야 하니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첫 달에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토크에 참여해 주었다. 이런 모델의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료화로 이어가는 작업은 지속적인 홍보, 공간의 활용, 운영방식 등 고민할 바가 많았다. 내가 매주 90분 토크를 체력적으로나 기타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시간이었는데, 혼자서 다 운영하기에는 좀 버거웠다. 마침 '한국 도자 연대기' 전시회를 같은 기간에 벌여놓았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더 가벼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런 시도를 통해 쪽샘살롱에는 새로운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쪽샘살롱이 경주를 '더 깊게' 여행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곳이 되기를 기대해 보았다. 필요를 드러내고, 시도를 해보았으니, 더 나은 방식으로 대중들을 찾아갈 방법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쪽샘살롱 운영한 기간은 2년 반 가량. 준비 시간까지 다 합해서 3년이라고 볼 때,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저냥 흘러온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것저것 많이 일을 벌였다. 합이 맞는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한다. 돌아보니 나는 그동안 자주 설레고, 늘 무언가를 도모했구나.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