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샘살롱 06] 루벤 플로라, 비에호 페오
와인바를 열 때, 제일 먼저 정해야 했던 것은 '하우스 와인'을 무엇으로 쓸 것이냐였다. 호불호가 없어야 하고, 가성비가 좋아야 하고, 글라스로 팔기도 해야 하니 보관성도 좋아야 했다. 나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녀석이 하나 있었다. 와인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경주의 주류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레드와인이었다. 처음에는 빨간색 레이블과 그 위에 있던 그림이 단박에 눈에 들어와서 사봤던 칠레 와인이었다.
아, 그런데 이 녀석이 병만 멋진 게 아니라 맛이 좋은 거다. 이름은 <루벤과 플로라>였는데, 설명을 찾아보니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부부가 각자를 부르는 애칭으로 만든 이름이란다. 게다가 이 멋진 레이블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내의 작품이라고 했다. 약간 '미녀와 야수' 풍의 느낌인데, 눈길을 잡아챌 만큼 매력적이었다. 초보자의 입맛에도 화사한 향에 미묘한 맛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는 복합적인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가격대가 낮아지면 보통 와인은 매우 단조로워진다. 신맛이 강하거나, 너무 달달하거나,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평탄하게 한 가지 맛뿐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이 가격대에 이런 정도의 품질이 나오다니?' 싶은 와인들을 만난다. 그런데 가격대도 낮다? 그러면 횡재하는 기분이다. 요즘 유명한 미국 와인들의 가격은 하늘을 날아다닌다. 칠레 와인은 단지 가격이 싼 것이 아니라, 훌륭한 와인을 저렴하게 판다. 공들여 뒤져볼 만하다.
와인은 우선 색(color), 향(nose), 맛(palate)을 구분해서 보고, 맛은 첫맛(attack), 중간 맛(mid-palate), 끝 맛(finish)으로 나누어서 묘사한다. 피노 누아(Pinot Noir)로 만든 와인은 매우 엷은 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짙은 붉은색을 띤다. 오래된 와인은 좀 탁한 갈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쌩쌩한 젊은 와인은 선명한 붉은색을 보이곤 한다. 어떤 와인은 짙은 자주색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어떤 와인은 빛이 통과해 보일만큼 여리여리한 색이다. 화이트 와인은 때론 황금색에서 청량한 녹색 느낌까지 다양하다. 로제와인 종류는 벚꽃 느낌의 분홍색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와인 글라스에 부어 빙빙 돌리다 살짝 들어서 와인의 색과 농도를 살펴보고 나서 맛을 보는 순서로 이어가면 된다.
와인 글라스가 여러 다양한 모양을 갖게 된 것은 그 향을 맡기 좋도록 하려는 의도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보르도 와인은 보르도 글라스, 부르고뉴 와인은 부르고뉴 글라스에 마시면 아무래도 그 향을 가장 잘 모아서 전달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모두가 그런 호사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므로 비싸지 않은 와인잔을 장만해 놓고서, 잔의 가장 볼록한 배 부분에 약간 못 미치게 부어 마시면 된다. 잔의 나머지 공간은 와인의 향이 가득 차도록 공간을 비워둔다. 와인을 마시기 전 와인잔에 코를 박으면 그 와인 특유의 향을 한껏 음미할 수 있다. 향을 먼저 느껴본 후에 첫 모금을 마시면, 코로는 와인의 향을, 혀로는 와인의 맛을 풀스케일(full scale)로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맛은 처음에 입술과 혀끝에 닿으며 느끼는 '첫인상'과 와인을 입 안에 머금고 있노라면 시시각각 변해가는 다양한 맛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는 '메인 경기'와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여운을 느끼는 '목 넘김'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첫맛은 혀의 앞부분에서 감지하는 단맛(sweet)과 신맛(acidic)이 우선적으로 들어온다. 중간맛은 입 안에서 본격적으로 와인이 요동을 치며 얼마나 복합적인 맛을 풀어내는지 경험하는 것인데, 가끔 와인 고수들이 입술을 모아 후루룩거리거나, 입안에서 가글을 하듯 공기와 섞는 행위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여기서 주로 바디감이 가볍다거나 무겁다거나 하는 표현을 쓰며, 여러 풍미를 지칭하는 다양한 묘사어(주로 과일 계열, 꽃 계열, 그리고 탄닌 맛 등)를 쓴다. 맛이 단순하지 않고 시간의 전개에 따라 여러 종류의 맛을 보여주는 복합미도 여기서 느낄 수 있다. 끝맛은 뒷맛이기도 한데, 어떤 여운을 남기는지가 중요하다.
병 안에 밀봉되어 있던 와인은 공기를 만나면서 일종의 산화 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간 닫혀있던 다양한 맛과 풍미가 발산된다. 대체로 고급 와인일수록 '에어링(airing)'이라고도 하는 이 과정을 충분히 잘해야 최대치의 풍미를 뽑아낼 수 있다. 가끔 비싼 와인이라고 받았는데 따서 바로 마시려들다가 낭패를 겪는 경우가 있다. 우선 공기와 만나 그간 억제되어 있었던 산화 과정이 적절한 수준까지 진행되어야 제 맛이 난다. 물론 대중적 와인들은 따서 바로 마셔도 크게 문제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경우에 조차도 따서 약간 기다려주거나, 플라스크에 넣어 흔들어주는 '디캔팅(decanting)'을 거치면 탄닌 성분도 부드러워지고, 전체적인 맛도 균형감이 살아난다. 온도도 중요한데, 화이트 와인은 좀 차게 '칠링(chilling)'해서 마시기도 하지만, 레드 와인은 상온이 적절하다. 날이 더운 여름에는 와인도 방치해 두면 끓어오르거나, 풀어지는 느낌이 있다. 시원하게 보관해 두면 와인도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균형 잡힌 맛을 보여준다.
'루벤과 플로라'는 비냐 티나하스 (Viña Tinajas)라는 칠레의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레드와인인데, 일단 빨간색 레이블이 매우 감각적이라 눈에 쏙 들어왔고, 맛이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맛이었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르메네르를 반반 블렌딩한 와인인데, 맛은 풍부하고 화려하면서 균형감이 좋았고, 기본적으로는 드라이하고 탄닌도 진한 편이지만 과일향이 향긋하게 올라와서 기분 좋게 달다는 느낌을 주는 와인이다. 색은 검붉다고 할 정도(deep ruby red)로 진하고, 향은 블랙베리류와 바닐라향을 느낄 수 있다. 바디감도 탄탄해서 너무 무겁지도 않지만, 가볍지도 않다. 웬만해서는 향이 이만큼 압도적인 와인을 만나기 어렵고, 복합적 풍미를 느끼는 와인 찾기가 쉽지 않다. 와인을 음미할 감각의 경험치가 충분치 않은 시절에는 가성비가 좋은 와인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가성비는 단순히 싸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아야 한다. 향이 매력적이고, 풍성하고, 맛으로는 첫맛, 중간맛, 뒷맛이 충분히 복합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좋다.
쪽샘살롱에서는 '루벤과 플로라'를 하우스 와인으로 내놓았다. 흔히 하우스 와인으로 많이 쓰는 종류보다는 가격이 위에 있고 품질이 뛰어났지만, 이 정도를 맛보면 와인 초보자들도 와인의 세계로 훅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와인을 맛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특징이 뚜렷하다 보니 단독으로 마시기에도 모자람이 없고, 이후에 다른 와인으로 이어갈 때에도 무리 없이 잘 어울렸다. 나는 쪽샘살롱을 접은 지금도 '루벤과 플로라'를 몇 병 챙겨서 내 와인셀러에 넣어두었다. 언제든, 누구와 마셔도 좋을, 실패 없는 선택지 하나가 있는 셈이다.
비에호 페오(Viejo Feo)
'비에호 페오'란 '늙고 못생긴(Old Ugly)'란 뜻인데, 블렌딩이 아니라 단일 품종으로 만든 와인 브랜드이다. 쪽샘살롱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갖다 놓았는데, 이게 물건이었다. 레드 와인을 마시게 되면 결국 카베르네 소비뇽을 비껴갈 수가 없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까쇼 한 종류를 챙겨둘 수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넉넉할 수가 없다. 대형 마트 와인 코너에서 레이블도 보고, 스위트한 지 드라이한 지 보면서, 대강 감으로 사다가 먹는 시절이 좀 지나고 보면 그간 마신 이력 덕분에 대략 어느 와인은 맛이 이렇고, 저 와인은 어떻고 하는 기초 데이터가 쌓이게 마련이다. 그래도 그 수많은 와인들은 선택장애를 일으키기 딱 좋은데, 언제든 내가 신뢰하는 와인 몇 종류를 발견해 놓았다면 자신이 마시든, 누군가에게 선물하든, 너무나 든든한 것이다.
비에호 페오는 내게는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이다. 거의 자주색에 가까운 빛깔에, 바디감은 묵직한데, 화려한 풍미와 딱 좋은 수준의 탄닌감을 갖고 있다. 와인앱 비비노에서 4.3/5점까지 나온 것을 봤다. 파티에서 와인을 내놓을 때, 초반에는 가볍고 화려한 와인들을 마시다가, 중후반으로 가면 제대로 무게감이 있는 대표 선수들을 출전시켜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비에호 페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맛을 보고서는 이구동성 탄성을 지르며 분위기는 피크로 치고 올라간다. 어떤 경우이건, 어떤 음식이건 밀리는 법이 없다. '늙고 못생긴'이란 이름을 달고 '그랑 리제르바'급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놓는 패기는 언제나 그 값을 했다.
대형 와인 수입사들은 보통 전국의 주류 도매상을 통해 대규모 유통을 한다. 그런데, 와인 쪽은 작은 수입사들이 많다. 어디서 어떤 와인을 취급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 와인 리스트를 갖출 때, 자칫하면 도매상에서 주로 추천하는 것이나 다른 곳에서 많이 파는 것을 갖다 놓기 일쑤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와인을 들여다 놓고 싶었으므로, 직접 수입사를 찾아서 연락을 했고, 시음을 거쳐서 납득이 된 것만 주문을 했다. 루벤과 플로라, 비에호 페오는 메르뱅(Mervin)이란 곳에서 수입을 한다. 테이스팅 할 와인을 먼저 청해서 시음해 보고 결정을 했는데, 그리 거래량이 많지도 않은 지방의 작은 와인바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히 응대를 해주었다. 나중에 여러 다른 수입사를 경험해 보니, 메르뱅이란 수입사가 전 세계 곳곳에서 발굴한 와인 리스트를 단단하게 갖추고 있는 안목이 있는 곳이란 인상을 받았다. 쪽샘살롱은 여기서 스테디셀러로 팔 수 있는 와인을 몇 종류 건졌다. 쪽샘살롱을 접고 보니, 새삼 이런 파트너들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될 필요가 있겠다 싶어 꼭 언급하고 지나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