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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와인을 판다는 것"

[쪽샘살롱 02] 와인과 지역 문화

by Harry Yang

소주, 막걸리 말고 와인과 위스키

쪽샘살롱을 열면서 제일 먼저 결정해야 했던 것은 무얼 팔고, 무얼 팔지 않을 거냐는 것이었다. 나는 와인과 위스키를 팔고, 소주와 막걸리는 팔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자는 술 자체를 파는 것이고, 후자는 안주를 파는 장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렇게 구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와인과 위스키는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술을 선택하는 분위기라면, 소주와 막걸리는 술 자체에서는 취향의 분화가 크게 일어나기 어렵고 주로 어떤 안주를 먹느냐에서 차별성을 만들어 내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물론 최근 로컬 양조장의 증가 흐름은 다양한 지역 술의 등장을 불러왔고, 취향에 따른 선택지를 대폭 늘려놓았다.) 그러니 소주와 막걸리로 가려면 음식 장사에 가까워지는데, 그러면 주방의 부담이 커진다. 작게 시작하려고 했던 애초 취지에 비추어 보면 후자의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가면, 타깃으로 삼는 손님의 구성이 아예 달라진다. 몇 년간 처절히 실감을 했는데, 지방의 소도시에서 와인과 위스키를 즐기는 인구는 매우 제한적이고 확장성이 떨어진다. 아무리 경주가 관광지라고 하지만 와인과 위스키를 즐기는 관광객이 항상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단골과 지인 장사가 기반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내가 아는 주변 지인들은 압도적 다수가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가 주종이었다. 맛난 안주에 이런 술들을 엄청나게 마셔대는 것이 이 동네의 음주 문화인 셈이니, 술 자체를 종류를 따져가며 음미하며 마신다는 것은 참으로 생소하고 어색한 문화였다.


경주는 상권이 분리되어 있는 측면도 있다. 관광객들은 황리단길 주변에 미어터지게 찾아오고 거기서 대부분 숙식을 해결한다. 바로 지척의 구도심으로는 거의 넘어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오래되다 보니 구도심에는 저녁 8시만 넘으면 소수의 가게를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경주 시민들은 시청이 있는 동천동 같은 신도심이나, 외곽의 아파트 단지 주변 상업지구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 장사는 황리단 및 그 인근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지역민 장사는 신도심과 아파트 단지 쪽에서 해야 유동인구를 만날 수 있다. 쪽샘살롱처럼 구도심 지역에서도 약간 외진 위치는 관광객도 오지 않고, 지역민도 거리가 멀어서 양쪽 대상 모두에게 접근성이 떨어지는 취약점이 있다. 물론 이를 극복하려면 광고 홍보에 엄청 공을 들이고, 맛집이나 핫플로 이름이 나야 한다. 쪽샘살롱은 그런 모델을 취하기 어려웠다.


내추럴 와인 말고 전통 와인

돌아보면 그 무렵이 전국적으로는 내추럴 와인의 붐이 한참이던 시절이고, 경주에도 황리단길 인근에 와인 보틀샵이 여러 곳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1-2년 사이에 트렌드를 좇아 창업했던 그 많던 와인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장사로서의 자생력을 충분히 갖추고 살아남은 곳은 몇 군데에 불과했다. 쪽샘살롱도 그 가운데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분투를 했고, 어쨌든 겨우 살아남은 축에 들어갈 뻔했을 것이다. 나는 쪽샘살롱이 술만 마시는 공간으로 사용되지 않고, 지역의 문화적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게 굳이 ‘살롱’이란 이름을 상호에 갖다 붙이면서 지향했던 방향이기도 하다. 즐겁게 와인을 마실 수 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곳을 하나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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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샘살롱에서 잘 팔았던 와인들. 리치텔리 말벡, 로제, 오 비뇨블, 루벤&플로라.

시장에서 와인바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아주 고급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곳이다. 국내에도 고급 와인을 즐기는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경주에서 시도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충분한 규모의 저변이 형성된 대도시에서 지속 가능할 것인데, 좋은 와인의 공급과 향유층이 동시에 확보되어야 하는데 경주는 향유층도 극소수일 것이고, 내 역량으로는 고가의 다양한 와인을 구비하는 것에도 한계가 분명했다. 어느 정도는 고급한 취향을 담아낼 여지는 있어야 하지만, 가성비를 잊지 말자고 생각했다.


둘째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인데, 당시 트렌드는 내추럴 와인이었다. 내게는 생소했으므로 이를 취급하는 레스토랑이나 수입사를 통해 테이스팅을 몇 번 해보았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품질의 편차가 너무 컸고, 마셔보고 좋다고 느낀 와인들은 대개 소매가 10만 원을 넘기는 것들이었다. 대중성이나 가성비를 찾아가기엔 제약이 많다고 느꼈다. 국내에서 내추럴 와인은 크게 붐이 일었으나, 불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기세가 꺾이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아직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한 전통 와인이 갖고 있는 장점을 끄집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추럴 와인은 하나의 추세로는 유지가 될 것이고, 전통 와인은 향유층을 더 넓혀가는 방향으로 장기적인 방향이 잡힐 것이라 보았다.


셋째는 거래선의 와인 리스트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주류 유통은 각 지역의 주류 도매상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이 취급하는 목록 정도가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와인바를 열기 전에 인근 지역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와인을 마셔보니 와인 리스트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곳이 아니면 맛볼 수 있는 와인이 상당히 일률적이고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만큼 대중들의 호응을 받아서 추려진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맛에서 아쉬움이 많더라는 점에서는 아마 가게 입장에서 수익성 높은 종류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직접 여러 수입사를 컨택해서 테이스팅을 하고 주문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해서 꽤 여기저기 샘플을 받아서 맛을 보기도 했고, 매년 주류박람회에 참석해서 시음을 하고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서 최소한 나의 입맛은 통과한 와인으로 리스트를 만드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쪽샘살롱에다가 가성비 좋은 와인들을 가격대별로 갖추어 놓으려 노력했다.


미니멈을 설정하자

대략의 방향은 잡았지만, 그것을 얼마나 깊고 넓게 관철해 내느냐가 장사의 관건이었다. 장사가 성공하려면 예상한, 혹은 예상 못한 모든 제약과 장애를 뚫어내야 한다. 나는 대략 3년째 이 언저리를 헤매어 보았다. 장사가 충분히 성공적이지 않고, 상황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았다. 나는 꽤 이른 시기에 내가 이 업에 그만큼 많은 것을 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시간과 에너지 면에서 전력투구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쪽샘살롱을 오픈했을 때에 온라인 연재글을 쓰고 있었고, 1인출판사를 만들어 직접 단행본 하나를 출간했었다. 그런 일들이 내게는 여전히 중요했고, 모든 것을 다 잘할 만큼 에너지가 충분치 않았기에 나는 쪽샘살롱을 수목금토 저녁에만 열고 있었고, 그 외의 시간은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찾아본 장사 천재들의 조언은 예외 없이 압도적인 ‘몰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의 안팎의 조건이 그런 수준의 몰입이 가능하지 않았으므로, 장사가 원하는 수준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보상 수준이 충분치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이나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개인사도 편치 않은 시절들이었고, 객관적인 장사의 조건도 여유롭지 않았기에 쪽샘살롱은 늘 서바이벌 모드를 넘나들고 있었다. 열심히 장사를 하는 이들을 보면 나는 자괴심을 느꼈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아닌가 해서다. 지금은 마음이 훨씬 잘 정돈되었다. 자기 정당화일지 자기 객관화일지 모르나,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게 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란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와인은 좋은 매개이지만, 결국 나는 사람에 더 끌리는 편이다. 그것에서 남기면 된다는 생각이 한 편이고, 장사에서 아쉬운 것은 내가 감수해야 할 일임을 잊지 않으려 했다. 유지 가능한 선에서 가능한 지점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34AF90FD-129C-4FA6-B7C5-0D7A202843D9.jpeg '와인 동호회'가 두어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즐겁게 이용해 주었다.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란 것이 매우 추상적이고 원대한 이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 나는 사람들이 와인을 매개로 매력적인 대화를 나누고 멋진 분위기를 누리기를 원한다. 쪽샘살롱은 그런 시간을 종종 경험해 왔다. 초기에는 와인 시음회를 여러 번 했다. 와인을 어렵게만 여기던 이들에게는 간단한 배경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와인을 테이스팅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경주의 젊은 친구들이 만든 와인 동호회도 쪽샘살롱을 즐겨 찾았다. 분기에 한 번 정도씩 보았나 했는데, 어느새 그 모임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도 있고 곧 아이가 나온다고 했다. 와인은 진입장벽이 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접해보고 싶다는 매력을 주기도 한다. 와인 초보라고 하면 적당한 와인을 추천해 주고, 간단히 설명을 곁들인다. 맛을 보면서 조금씩 편안해하고, 맛과 향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경주에 사는 어릴 적 친구들도 종종 찾아왔다. 대체로 평소 마시던 주류와 달라서 어색해했다. 어느 날은 서울서 친구가 내려와 한턱을 내겠다고 친구들을 몰고 왔다. 와인잔은 이렇게 잡아야 하냐, 저렇게 잡아야 하냐를 묻던 친구들에게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대화를 많이 나누라고 권했건만, 결국은 익숙한 전통을 따라 한 사람씩 일어나 건배사를 하고 원샷을 하며 파도타기를 하는 것으로 내달렸다. 그날 결국 대여섯 순배가 돌았고, 와인을 처음 맛보았던 몇몇 친구는 그 주간 내내 숙취로 시달렸다면서, 다시는 와인 못 마시겠다는 부작용을 호소했다. 평소 마시던 분위기와도 다르고, 와인 주량도 가늠이 안되니 조절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고 나면 문제는 고스란히 "와인은 문화적 진입장벽이 높다"거나 "나는 체질상 와인이 잘 안 맞다"는 식의 오해로 연결되기 일쑤다. 공장형으로 생산된 술을 많이 마시고, 빨리 마시는 음주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와인을 마시는 경험은 괜히 복잡하고 제약이 많은 이벤트처럼 느껴져서 보통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의 음주문화에 거부감이 있던 이들은 와인을 마시면 자신이 충분히 조절하며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음주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매우 환영하기도 했다. 특히 과도한 음주를 꺼리던 여성들은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 기대 이상의 맛과 향으로 신세계를 경험했다고 하기도 했다.


경주에도 당연히 와인 고수들이 구석구석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만난 대중들에게 와인은 아직도 소개되고, 경험되어야 할 여지가 많은 신세계였다. 와인바를 열어놓고서 그런 사실을 재확인하고 나니, 나는 여기 경주에서 아직은 척박한 땅에서 먼산을 보며 삽질을 하고 있구나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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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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