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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Nov 27. 2019

흉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나라

'흉기' 없이 '의도'도 없이 '인지' 없이, 그래서 더 나쁘다.


한국을 떠나 태국 동남부 외딴 섬, 바이크 타고 북에서 남을 가로지르면 20분도 안 걸리는 작디 작은 꼬따오로 온 게 5년 전. 가장 큰 이유는 다이빙을 매일 하고 싶었고, 좋은 다이버가 되기 위해 트레이닝에 집중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해도 되는 걸 굳이 힘든 타향 살이를 선택한 번외 이유는 다양하다.


꾸준히 내 블로그를 구독해온 친구들은 알겠지만, 나는 한국에서 꽤 '팬시'한 삶을 살았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삶을 살았다.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국내외 유명인들은 죄다 만났고,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하는 쿨하고 폼나고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게 내 일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진로 상담 메일을 보내오곤 했다. '기자님처럼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 지 몰라요. 내 주제에 남의 인생, 남의 꿈, 남의 진로에 뭐라 훈수둘 수가 없어요. 실은 삼십대를 질주하고 있는 나도, 아직도, 여전히, 삶이라는 걸, 인생이라는 걸 잘 모르겠거든요. 여전히 나도 방황하고 흔들리고 의심하고 불안합니다. 그냥 하루 하루 집중하며 살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솔직히 답했다. 나는 감히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계발서에다 내 인생 봐라, 니들도 날 따라해봐라, 나처럼 된다, 하는 사기를 칠 배짱이 없다. 그렇게 거대한 사기를 치고, 그로 인해 쌓은 명성과 부를 누리며 살다, 나중에 돌아올 카르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인생, 이렇게 살면 성공한다 떵떵거리는 사람 치고 제대로 사는 사람 못 봤다.


유명한 K팝 스타, 아이돌부터 인디 아티스트들까지 내 인터뷰이 대상은 다양했다. 잡지사 기자로서 커리어의 시작은 다행히 엄청나게 가난한 인디 매거진이었기에(지금 생각하면 너무 탁월한 선택이었다), 메이저 대형 패션지로 옮기고서도 내 심지를 갖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나 역시 거품으로 가득찬 샴페인 같은, 공기로 가득찬 풍선 같은 삶을 지금까지도 살고 있었을 거다. 인디 매거진으로 시작했으니 인디 아티스트들을 많이 만났다. 앨범을 듣고, 영화를 보고 작품이 좋으면 만났다. 그래서 내 인터뷰이들의 폭은 장사익, 최백호부터 빅뱅까지 넓고 깊었다. 메이저 패션지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편집장에게 얻은 약속은 '인터뷰이나 기획에 있어서 데스크에서 푸쉬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나름 밸런스를 잘 유지하며 내가 만나서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만났다.


그 중엔 K팝 스타들도 있었고, 인디 뮤지션도 있었고, 해외 유명 뮤지션도 있었다.(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는 내 기자 커리어의 마지막이었는데, 전까지 늘 나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얘기하고 다녔다. '언젠가 내가 노엘 갤러거와 인터뷰 하게 된다면, 그게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야.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다. '말이 씨된다'는 한국 속담은 나에게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K팝 스타들은 대부분 아이돌이고, 십대부터 혹은 나이가 한자리수일 때부터 아이돌이 되기 위해 트레이닝을 받았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아이돌'이 되길 강요한 한국 사회는 무대 위에서 엉덩이와 가슴을 까발리고 '섹시'의 정의가 뭔지도 아직 모르는 아이들에게 '섹시하다' '요염하다'며 찬사를 퍼부었다(대부분 아저씨 일간지 기자들이다). 


자,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알겠는가?


나는 K팝 스타나 아이돌과의 인터뷰를 즐기지 않았다. 일단 인터뷰 자리부터 불편하다. 매니저가 옆에 앉아 눈치를 준다. 내 질문에 자기가 대답을 하거나, 내 질문 자체를 사전 체크하고, 어떤 질문은 안 했으면 좋겠다거나 어떤 질문은 이런 식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거나, 훈수를 둔다. '네가 기자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지만, 그럼 우리 편집장님은 그 소속사로부터 컴플레인을 들을 거고, 그 소속사 아티스트들은 앞으로 인터뷰 못 할 할거라 나는 참았다. 갑과 을의 사회에서 을이었던 나는, 나름의 트릭을 썼다. 매니저가 동석한 인터뷰 초반엔 안전하고 형식적인 질문들로 마음을 놓게하고, 매니저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기사에 안 쓸테니 솔직히 말해봐라'로 아이들을 꼬신다. 어딘가, 누군가에게 말할 곳이 필요한 친구들은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면 정말 솔직하게 술술 얘기한다. 하지만 약속대로 기사엔 쓰지 않았다. 


대부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니면 조울증이거나. 무대 위에서의,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 말고, 무대만 내려오면 돌아오는 페르소나가 따로 있었다. 이걸 건강하게 풀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르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거기서 혼란을 겪는 듯 보였고, 어떤 게 진짜 자기 모습인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리얼'이기나 한 지, 힘들어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아 정체에 대해 혼란을 겪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일찍부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아이들에겐 그런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유명해져버렸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고, 그 관심이 사랑인 줄 알고 좋아했지만, 금새 등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에 상처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시간도, 도움도 없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어떤 이들은 살아 남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인터뷰 중간 중간 화장실에 들어가 구토를 하던 여자 아이돌이 있었다. 소속사에서 준 다이어트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 아이의 부러질 듯한 잘록한 허리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섹스 산업과 다를 게 뭐가 있나. 남자들은 스트립 클럽에 가는 죄책감 대신 우아하게 TV 앞에 앉아 고상하게 돈을 쓰고, 사회와 시스템은 이를 돕는다.


여기서 굳이 성별 이야기를 하자면(공교롭게 세상을 떠난 설리와 구하라 모두 여자다), 여자로서 한국 사회, 그것도 연예계 사회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오랜 시간 살아왔고, 연예계 사회는 당사자와 제3자 사이의 중간 정도의 거리로 관련되어 있었다. 아직 안 터진 문제들이 많다. 성차별, 성폭행, 성추행 문제들은 방송/잡지사를 둘러싸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내가 만난 유명 포토그래퍼들의 여자 어시스트, 말 그대로 권력 게임에서 약자인 여자들은 지속적인 폭행에 시달려도 입을 못 연다. 여자들이 폭로하면 그 여자들이 수장된다. 한곳에서 터지면 다른 곳에서 터져야 하는데, 터지다 만다. 동종 업계에서 모두들 쉬쉬하고 입막음한다. 왜냐고? 내가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값진 사실은 한 포토그래퍼 어시스트가 성폭행을 폭로해도, 다른 포토그래퍼들이 조용하다는 거다. 왜냐고? 그 포토그래퍼들도 그랬으니까. 몇 년 전 잡지사 어시스트들 '열정 페이'니 뭐니 했을 때 나는 잡지사에서 시니어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잡지사가 어떻게 했냐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결국 여전히 어시스트들은 보상 없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 왜냐고? 한국 사회 대부분 잡지사들이 그랬으니까. 일 키워서 좋을 거 없다고, 쉬쉬하고 묻은 거다. 그래서 아무도 선뜻 나서질 못한다. 그렇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암묵적 보호다. 그리고 여자들은 이걸 너무 잘 안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 여자들이 비겁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지랄 발광을 하고 힘들다고 해도, 이건 공평하지 않다고 해도, 결국 내가 '더러운' 사람으로 남고 결국 이 시스템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 여기서 많은 여자들은 절망한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으면 인생은 살아볼 만한 거다. 지금 죽을만큼 힘든데 내일은 더 죽을만큼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답이 없는 거다. 


그래서 나는 죽음 대신 한국 사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이빙을 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한국에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리는 유명한 작가, 정치인들도 많이 만났다. 모두 실망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이끌어간다니, 여긴 정말 희망이 없는 곳이구나. 기자 생활이 이어질수록 나는 삶의 생기를 잃어갔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남으려면 그 사회에 흡수되어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겁쟁이라고 해도 신경 안 쓴다. 적어도 나는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나는 꽤 똑똑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고를 다녔는데, '가정'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말이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난다. 너희들의 임무(그녀는 여자면서도 정확히 이런 단어를 썼다)는 결혼해 남자를 잘 보필하고, 아이를 낳아 잘 기르는 것이라고. 내가 공부하고 직업을 갖고 꿈을 찾는 이유는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학교에서 진로 상담을 하는데도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객체보단 사회에 나가 짝짓기를 하고 가정을 만들어 가정의 버팀목인 '남자'를 보필하는 여자로서의 상담을 받았다. 어린 나이엔 그게 맞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때 몇 번 사귄 남자애들 역시 대부분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항상 헌신적이고, 서포트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대학 새내기 때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명목으로 트립을 떠나는데, 거기서 선배들은 밤새 여자 새내기들을 붙잡고 술을 먹이고, 추행하고 다음 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남자 여자 짝을 지어 게임을 시키는데, 남자 아이들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그걸 여자 아이들 입으로 더듬어 찾게 했다. 당시 내 남자친구는 군대에 있었고, 스스로 느낀 굴욕감에 울면서 '나는 이거 못 하겠다' 했는데, 그 게임을 처절하게 거절한 건 내가 새내기 중 유일했다. 그 뒤로 나는 학교에서 '이상한 애' '고집 센 애' '기 센 여자'라는 낙인을 받았다. 어차피 대학은 관심이 없었기에 일찌감치 대학 다니며 밤엔 알바를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소위 말하는 '밤 일'이었다. 바텐더를 꽤 오래했는데, 술 따르고 손님들이랑 술 마시는 소위 말하는 '섹시바'가 아닌, 일부러 칵테일 쇼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클래식바에서 일했다. 나는 네 술 시중으로 돈버는 여자가 아니다, 라는 의미를 더 부각시키려고 칵테일 전문 학교도 다녔고, 조주사 자격증도 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바를 찾는 남자들에겐 그저 '한 번 자고 싶은' 어린 여자였다. 


내 나이가 스물 일곱이 되던 해, 나는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여자 나이에 'ㅂ' 들어가기 시작하면 퇴물된다, 더 늦기 전에 시집 가라, 돈 많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게 내 면전에서 하는 남자들을 보며, 나는 더 수동적이고 나약하고 늙은 '퇴물'이 된 느낌이었다. 그게 내 삶을 좀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존감을 가지려고 해도, 집 밖 한발자국만 나가면 나란 인간을 '여자로서의 생식 능력'과 잠자리 상대로 평가질을 해대는 남자들을 대면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작전을 바꿨다. 회사에선 남자 동료들을 '오빠' 대신 '형'이라고 불렀고, 담배도 많이 폈다. 한국 사회 남자들의 사교 시간은 대부분 술/담배로 이뤄지니까. 적어도 피해자가 되진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술은 유전적으로 못 먹는 체질이라 직장 술자리는 나에겐 지옥이었다. 맨 정신으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상대로 하는 짓거리들을 모두 지켜봐야 했으니. 술만 취하면 더듬는 남자 상사에게 '저, 술 안 마셨어요. 계속 이러면...' 했는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계속 이러면...'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지? 이걸 공론화시켜서 이 남자를 회사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처벌 받게 할 수 있을까?이 남자가 술만 먹으면 이 지랄 안 떨게 거세 시킬 수 있을까? 대체 내가, 이 사회가 어떻게 할 수 있지? 답이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배실 배실 웃는 그 남자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회식 땐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야겠다는 다짐 정도뿐이었다. 이게 얼마나 나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했는지 모른다. 왕복 3시간이 넘는 출퇴근 길에 전철을 탈 때마다 여기 저기서 뻗어나오는 남자들의 손을 피하느라 너무 서러워 운 적도 많았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 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게 출근한 직장에선 하루 종일 남자들이 내 외모나 몸매에 대해 평가하는 걸 하루에 수십 번씩 들어야 했다. 내 능력이나 내 영혼을 보려하는 남자를 찾긴 쉽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보면 남자들만의 탓도 아니다. 내 또래, 내 세대 남자들(내 전 세대는 더 했겠고) 모두 내가 받은 교육을 똑같이 받았으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대한 권력 구조를. 이건 사회의 책임이다. 이걸 방관하고 방조하고 발전시킨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우리 아빠가 장남인데 내가 무남독녀라는 사실은 할머니가 우리 엄마를 괴롭히기에 좋은 구실이 되었다. 내가 내 성별을 선택하지 않았고, 우리 엄마 아빠가 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 엄마 아빠가 나 하나로 행복하다는데, 할머니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심술이 난다니. 할머니도 여잔데.


자, 여기서 또 문제가 나온다. 내가 한국 살 때 입버릇처럼 한 얘기가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영화는 대부분 같은 성을 가진 커뮤니티의 연대와 서포트가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 할머니가 그랬듯, 우리 엄마도 전통적 한국식 교육을 받은 보통 여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돈 많은 남자 만나 결혼해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때마다 벙 찐 내 표정을 보고도 엄마는 뭐가 잘못된 지 몰랐다. 엄마가 날 서포트해줘야지, 엄마도 남들이랑 똑같이 그러면 내가 누굴 믿어. 나는 그말을 차마 입밖에 꺼내진 못 했다. 내가 당한 모든 차별과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엄마 역시 그녀의 인생 통틀어 겪어온 걸 테니. 하지만 엄마와 나의 차이점은, 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기로,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으로 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기자로 살 때만큼 나는 잘못된 사회의 고정 관념과 부당한 차별이나 폭력에 'no'란 말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골칫덩이'였고,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 당시 남자친구와 사귈 때도, 처음엔 '넌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 나한테 징징대지 않고, 나한테 해결책을 찾지 않고 독립적이야. 그래서 좋아' 하다가 결국 '넌 너무 기가 세. 말을 안 들어. 까다로워. 그래서 컨트롤하기가 힘들어' 하며 뒷걸음쳤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큰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아, 내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는 게 '기 센 여자'가 되는 거구나. 그럼 안 되는 거구나. 그러다 생각을 고쳐 먹었다. 좆까. 그 생각은 남자들이 만든 사회와 시스템과 기준이지, 그걸 나한테 끼워 맞줘서 내가 기준 이하의 인간이라는 듯 자기 비하를 하게 하는 사회와 시스템은 절대 건강한 게 아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사회가, 이 시스템이 잘못된 거다. 그래서 나는 그 시스템을 떠났다. 


재밌는 건, 싫다고 떠났지만 여전히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고충은 해외에서 유러피안들과 섞여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이빙 업계 자체가 남성이 주로 주도하는 사회다. 내가 일하는 다이브 센터는 전세계에서 모인 강사들이 있는 초대형 규모인데, 여기서 여자 강사의 비율은 10프로 정도다. 요즘은 내가 맡는 교육생들에게 'Dive like a girl'이라는 철학을 설파 중이다. 여자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여자라서 더 잘 하는 거라고. 다이빙하는데 여자, 남자 따로 없지만, 여전히 남자가 더 잘 한다(다이빙이 몸을 써야 하는 일이라 더 그런 걸 거다)는 오랜 고정 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 나는 누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만큼 내 다이빙 실력과 지식을 계속해서 키워나가고 있다. 여기서도 여전히 '여자 강사는 싫다'는 남자 교육생들이 가끔 있고, 거기에 '아시안 여자 강사'라는 더블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정말 굳건히 씩씩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끔 6명의 유러피안 교육생들과 다이브마스터 훈련생들까지 모두 내 지시를 따라는 걸 보면 스스로 감정에 복 받혀 오를 때가 있다. 내가 남자 강사였다면 이런 건 느낄 필요도 없었겠지. 한국 다이빙 커뮤니티는 더 하다. 99%가 남자다. 가끔 여자 강사에 대한 포스팅이 올라오면 '최고 미녀 XX 강사' 같은 수식어가 올라온다. 다이빙 강사도 예쁘고 안 예쁘고, 몸매가 남자들이 보기 좋고 나쁘고, 하는 식이다. 브라보.


차별이라는 게 별 거 아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똑같은 자격을 가진 남자 강사들에 비해 나를 더 증명해야 하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차별이다. 여자 강사들은 남자 만나 임신하면 오래 일하지 못하니까 센터 입장에서 남자 강사들을 더 선호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내가 일하는 센터 보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 여자, 인종, 국적 상관 없이 철저히 실력으로 가린다. 잘 하면 살아남고 못 하면 짤리는 거다. 그래서 여기선 할 만하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물이 정직하게 나오니까. 그럼 세상은 살만해진다. '행복'이라는 단어도 살짝 꺼낼 수 있다. 그럼 내일은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도 갖을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필요한 건 이거다. 


한국에선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어렸을 때부터 차별을 받는다. 남들에게 외모나 몸매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된다. 어느 순간, 남들에 비치는 외모나 몸매에 신경 쓰게 된다. 그게 여자들의 삶을 좀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낸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자존감을 잃고, TV 속 어여쁜 여자 아이돌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울감에 빠진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TV 속 예쁘게 치장한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 지도 모른 채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목격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흉기 없이 죽이는 나라.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더 나쁘다. 의도를 갖고 죽인 것보다 더 나쁘다. 한국 사회 여자들은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게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 일이 나에게 생길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 


밤 길을 혼자 걸을 때 늘 뒤를 돌아봐야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몰카가 있지 않을까 둘러봐야 하고, 여자로서의 행실을 검열받아야 하는 건 한국을 떠나도 마찬가지다. 해외라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보다 더 큰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인데, 아무도 그 시스템을 고치지 못한다는 거다.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큰 성 범죄를 저질렀다. 경찰이 남자고 판사가 남자다. 판결이 남성 가치/사고 중심을 내려진다. 그렇게 무죄가 된 남자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 여태 해온 짓거리들을 똑같이 해댄다. 남성이 만든 법이 남성에 의해 집행된다. 이건 시작부터 틀렸다. 


<언빌리버블>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얼마 전에 나왔다. 성폭행 피해자가 남자 경찰 앞에서 진술을 번복한다. 그 장면을 보면 왜 자꾸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가해자는 거리를 활보하고, 피해자는 집 안에 틀어박혀 삶이 망가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 알게된다. 가해자는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여자 경찰이 수사에 뛰어들기 전까지 남자 경찰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피해자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


구하라가 죽고, 사람들은 구하라가 자살한 이유를 '성폭행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찾는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성폭력'이란 단어로 귀결되고 죽음까지 그렇게 불리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하라는 문제에 맞서기 위해 유명인으로서의 핸디캡을 감수하고도, 여자로서 이런 일이 알려지면 여자 연예인으로 앞으로의 삶이 구질구질 해질 걸 알면서도, 싸우길 원했다. 그런데 판사가 그녀를 막았고, 그 뒤로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비수를 꽂고, 같은 여성이면서도 그녀를 '걸레'네 뭐네 하며 벼랑 끝으로 몰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나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밉다. 여자들이 더 똑똑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기가 세졌으면 좋겠다. 물론, 내 주변엔 그런 친구들이 아주 많다. 자기 일 열정있게 하고 남에 대한 배려와 공감으로 돕고 배푸는 똑똑한 여자들. 특히 어린 여자 친구들에겐 옳은 방향으로 가이드해 줄 좋은 부모와 가정이 필요하다. '여자'라는 성을 '리밋'으로 간주하는 가정이나 사회에선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서른 일곱에 결혼 안 하고, 다이빙하며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더 나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내가 있다. 여전히 두렵고 무섭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끔찍한 성폭행 피해자가 되지 않은 건, 그저 '운이 좋아서'다. 내가 설리고 내가 구하라다. 그들에 대한 연민이나 죄책감은 자신을 제 3 자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을 당사자라고 생각하면 연민이나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당사자는 그렇지 못 하다.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없으니, 그 모든 삶의 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다.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건, 그걸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건 여자뿐이다. 아무리 의식 있는 남자들이 페미니즘 떠들어도 나는 그들 역시 대부분 '남자로서의 우위'를 과시하는 거품 섞인 쇼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페미니즘이건 역차별이건 온갖 지성적인 사회 용어들을 갖다 붙이고 분석하고 떠들고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 역시 대부분 남자다. 여성들의 연대, 여성이 여성의 힘이 되어주고 서포트해주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 출발점은 소용이 없다. 여자들이 참지 말았으면 좋겠다. 분노하고 이야기하고 목소리를 내서 남자들이, 사회가 듣게 해야 한다.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공평치 않은 것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여자들이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 나도 두렵다. 희망이 없다. 하지만 용기를 낸다. 여자라서 못 하는 것 보다, 여자라서 더 잘 할 수 있는 게 많다. 그렇게 증명하며 살아가는 게 지친다. 하루 하루 지치지만, 또 하루 하루 그렇게 강해진다. 그리고 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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