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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r 11. 2020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화해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엄마와 딸의 관계.

   

가까스로 운 좋게 한국을 떠났다. 미국을 거쳐 멕시코로 가는 내 비행기가 항공사의 일방적인 취소로 출국 며칠 전 모든 계획이 뒤집혔을 땐 코로나에 신천지에 빌어먹을 타이밍에 내 운에, 별 게 다 원망스러웠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취소 직후 예매한 캐나다 경유 멕시코 도착 비행기 편이 결국 버텨줘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에어 캐나다 역시 4월부터 6월까지 한국발 비행기는 모두 캔슬한 상태라 지금 나가지 않으면 수개월 한국에서 하는 것 없이 발이 묶여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케이브 다이빙 스케줄을 예약하고 디파짓까지 지불한 다이브 센터에서 코로나 때문에 현재 한국뿐 아닌 대다수 나라에서 오기로 한 다이버들이 예약을 취소하는 중이니 한국 코로나 사정으로 예정된 트레이닝 스케줄을 지키지 못해도 괜찮다는 이해 어린 메시지를 받았지만, 나는 웬만하면 계획은 계획대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데다 남 민폐 끼치는 건 죽어도 싫은 사람이라 하루하루 에어캐나다가 내 비행기를 취소하지 않길, 부디 캐나다나 멕시코 정부가 한국인 입국 금지나 제한을 실행에 옮기지 않길, 부디 트럼프가 한국에 심사가 뒤틀려 입국 제한/금지 조치를 하지 않길 맘 졸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꼬따오에서 만난 미국 친구들에게 나는 꽤 삐딱한 사르카즘으로 반응하곤 했다. ‘한국은 미국의 또 다른 주나 마찬가지’이고, 한국의 의사 결정 프로세스는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게 절반 이상이며, 왜 남북한 통일 안 하냐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니들(미국) 때문에’라고 답한다. 그게 사실이다. 다행히 트럼프가 코로나바이러스로 대선의 입지가 좁혀질까 걱정하는 가운데 미국 여론이 트럼프를 ‘쥐뿔도 모르면서 설레발 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너무 낙관적이다, 소극적이고 나이브하게 대응한다’라며 떠드는 와중에도 “한국은 우리의 동맹, 당분간 한국인 입국에 특별한 조치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걸 보니 트럼프가 한국에서 코로나 진단 키트를 싼값에 공급받기로 밀실 약정 같은 거라도 했나 할 정도다. 아님, 일본에 이리 치이고 중국에 저리 치이는 우리가 말 그대로 딱해서 챙겨주는 걸 수도. 어쨌든 나는 땡큐다. 멕시코 또한 한국처럼 미국에 단물 빨리는 나라라 미국이 한국인 입국에 대해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안 하는, 아니 못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가 됐다. 한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이탈리아와 이란이 앞서기 시작했고, 중국도 아닌 선진 유럽 국가인 이탈리아가 무너지면서 한국은 오히려 ‘방역을 잘 하는’ 나라가 됐다. 2주 전만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하나 보다.     


공항은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인다. 내 생에 이렇게 빠르고 쉬운 체크인과 검색대 통과는 처음이다. 공항 곳곳에서, 검색대 통과 전, 통과 후 불시의 체온 검사를 받았다. 내가 ‘바이러스 캐리어(Virus Carrier)’가 아니란 걸 증명해야 했다. 공항은 한산했지만 내가 탄 비행기는 꽤 북적인다. 이래저래 수많은 항공사의 비행이 취소되며 결국 운항 진행 항공기에 사람이 몰리는 거다. 비행기 탑승 후 내 자리를 찾아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나누며 혹시라도 이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 보균자는 아닐까, 확진자인데 검사를 안 받은 게 아닐까 등등 갖가지 종류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주고받았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이기도 하고, 각 23kg, 2개의 위탁 수화물까지 무료인 에어 캐나다라서 짐을 이래저래 많이 쌌는데(다이빙 장비만 캐리어 하나다), 비도 오고 짐도 많다며 엄마에게 공항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도 마음이 많이 약해져 NO란 말을 잘 안 한다. 엄마 아빠의 시골집에서 인천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나는 김밥에 육개장에 김치에, 내일이면 그리워질 한국 음식을 쉬지 않고 먹었다. 새 모이 같은 아침 조금 먹은 이후 아무것도 안 먹는 엄마에게 “엄마 배 안 고파?” 물었더니, “너 가는 거 서운해서 뭐가 안 먹히네” 하는 거다. 갑자기 김밥을 삼키는 목이 커억 매였다. 엄마에게서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관계는 엄마와 딸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분명 다들 아닌 척하고 있겠지만 적지 않은 이 세상 엄마와 딸들이 정의할 수 없고 결론 내릴 수 없는 희한한 관계에 힘들어한다. 엄마와 나는 같은 여자이고, 사회에서 가정에서 겪어내고 참아내고 당하는 일들 역시 시대만 달랐지 여전히 같을 텐데, 왜 이렇게도 애증의 감정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엄마가 되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엄마는 엄마가 되었는데도 답을 못 찾은 걸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홍성에서 인천공항까지 2시간 반.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지만 역시 잘 진행되진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최대한 차분하고 진솔하게 설명하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부재로 인한 나의 상처는 엄마를 비난할 아무런 충분조건을 갖추지 않는다고, 더 이상 내 외로움과 방황과 결핍의 근원을 엄마로부터 찾지 않기로 했다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며 느끼는 건, 엄마도 여자였고, 또한 어렸고, 또한 답이 없었고 방황했고 버거웠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겠노라고.      


공항에 도착해 서둘러 짐을 내리는데 엄마가 울먹이는 걸 봤다. “에이, 엄마, 울지마” 일부러 웃으며 큰 소리 떵떵거렸는데 엄마가 어설프게 나를 안으려다 마는 걸 보고, 우리가 포옹조차 어색한 모녀구나, 하는 마음에 공항에 들어가 혼자 한참을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비행기 안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자는데) 혼자 훌쩍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콧물 훌쩍거리면 코로나 증상자로 오해받아 입국 거절될까 봐 눈치 보고 있다. 인생은 코미디다.     


내 평생 ‘엄마’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제 와 드는 생각은 나는 엄마를 찾으려 할수록 힘들어진다는 거다. 엄마를 버려야 엄마도 나도, 서로 쿨하고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을 거다. 또한 나는 내 평생 ‘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Home’이라 부를 수 있는, 마음 둘 곳을 찾다 보니 결국 바닷속까지 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제 와 드는 생각은 나는 ‘Home’이라는 집착을 버려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엄마’를 찾으려는 혹은 소유하려는 생각을, ‘집’을 찾으려는 혹은 소유하려는 집착을 버릴수록 나는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나의 갈등의 원인은 피해 의식이다. 엄마가 나를 키우며 희생했다는 피해 의식, 내가 엄마의 딸로 살며 희생했다는 피해 의식. 두 자아의 피해 의식의 충돌은 영원히 결론 나지 않을 이야기다. 오랜 시간, 엄마도 나도 그걸 하며 살았다. 공항에서 엄마와 헤어지며 역시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모녀의 어색한 작별 인사를 통해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에게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고, 그걸 의심하는 딸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거라고. 같은 여자로서 의리를 지키지 않은, 편 들진 못할망정 늘 비난의 대상으로 몰아세운 나를, 그래도 받아주는 건 엄마뿐이라고.      


결국, 나에게 ‘집’은 ‘엄마’다. 뒤틀렸던 건 ‘집’이 곧 ‘엄마’라고 생각했던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겪은 시집살이나 이상적이지 않았던 결혼 생활의 고통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지만 ‘엄마…. 그래도 나는…?’ 하고 묻지 못했다. 엄마의 자신의 고통 자체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어린 나에겐 그게 엄마가 엄마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거라 생각했다. 고로, 엄마는 나를 저버렸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엄마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은. 엄마는 나를 지키려고 싸워왔다는 걸. 그녀만의 방식으로.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벽히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말을 믿는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해 못 해도 사랑하는 게 ‘가족’이라는 것. 내 인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 동안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 ‘엄마’ ‘아빠’라는 단어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나는 이 두 단어를 ‘가족’이라는 한 단어로 묶지 못했다. 나에겐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엄마와의 관계와 아빠와의 관계가 각각 존재했다. 이젠 조심스럽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내 삶에 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족은 반평생 서로 징그럽게 상처만 주고받다가, 남은 반평생은 그 상처를 아물도록 노력하며 사는 시간으로 채우는 집단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화해 중이다. 우리는 반평생 열렬히 사랑하고 아껴주지 못했으니 남은 시간 동안 열렬히 화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0년 3월 10일, 한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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