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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Apr 06. 2017

시민과 국민


세월호가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냈다. 3년 동안 바닷속에서 그 안에 갇힌 아홉 사람의 이야기를 내내 들어준 배다. 제주로 떠나는 수학여행에 들뜬 마음으로 배에 오르던 아이들의 까르륵 웃음소리가 비명과 절규로 바뀌는 걸 모두 지켜본 배다. 1073일. 참 오래도 걸렸다. 세월호가 수백 년 전 보물을 잔뜩 싣고 수장된 배였다면 이리 오래 걸렸을까, 억지도 부려본다. 삼백이 넘는 사람이 전 국민,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바다에 가라앉은 배. 거기서 빠져나오려 손발이 휘도록 유리창을 때렸던, 이 마지막 한숨으로 구조될 때까지,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을 아이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세월호를 둘러싼 수많은 악마들의 욕망과 범죄와 인멸 시도.       


나는 4월 16일 그날, 발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패션지 피쳐 에디터로 일하던 나는 4월 16일 발리로 향했는데, 인천공항 체크인 카운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였지만, 그때는 그게 진짜인 줄 알았다. 저 큰 배가, 저 수많은 사람이 배에 탔는데 전원 구조가 당연하지, 하고 스마트폰을 닫았다. 자카르타에서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옮겨 타기 전 다시 접한 뉴스는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발리에 도착하고 나서 커다란 식당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검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그 배를 봤다.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나에겐 트라우마다. 발리에서 바다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가라앉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를 봐도 속 시원히 알 수 없었고, 모두들 우왕좌왕 이랬다 저랬다 보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뉴스에는 ‘골든타임’ ‘에어포켓’ ‘다이빙벨’ ‘선장 탈출’ 등의 헤드라인만 무성했다. 정작 배와 함께 가라앉은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내가 사는 부천과 안산의 거리는 멀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안산 합동 분향소에 찾아갔다. 아이들 하나하나 얼굴을 보니 뉴스로 접했던 ‘단원고 아이들’이라는 커다란 이미지 대신 이름 하나, 얼굴 하나가 와닿았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음에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촛불을 드는 거였다. 친구들과 “가만히 있으라”라는 세월호 안에 울려 퍼졌던 경고 방송 문구를 배지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홍대에서 촛불 집회와 자유 발언을 진행했던 그 소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무능하고 비겁하고 탐욕스러운 이 나라의 죄에 꽃다운 아이들의 목숨이 희생됐고, 다신 이런 참사를 번복하지 말자, 책임 있는 어른이 되자며 진상을 촉구했던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정부는 벌금형과 구금형을 내렸다. 그때 내가 느꼈던 무력감과 죄책감과 분노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든 그 발화선에 불만 붙으면 폭발할 것 같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보통 사람’인 나도 4월 16일, 그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내 삶에 알게 모르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온 국민 중 그 여자만 모른다. 그날 뭘 했는지, 뭘 해야 했는지, 그 여자만 모른다. 아니, 그 여자만 모르는 게 아니다. 해경, 해수부, 청와대 모두 몰랐다. 세상 처음 국가를 건립하고 재난을 맞이한 건국 한 돌도 안 된 나라처럼 무책임하고 몰상식하고 무능력했다. 이후 세월호 유족들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나, 유족들을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는 자칭 보수단체들을 뒤에서 돈 줘가며 부추긴 것도 정부였다. 그 여자였다. 이미 자식 잃은 상처로 찢긴 상처에 소금을 들이 붙고 벅벅 문질렀다. 어른들은 이 보다 더한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 보다 더 한 시대도 있었다며, 그 시대를 안 살아본 너는 복에 겨워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해먹은 돈에 비하면 세월호 유족 보상금이나 인양에 드는 비용은 손톱의 때만큼도 안 된다. 세월호 인양에 돈이 많이 든다고 볼 멘 소리를 해대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람들은 정말, 이런 말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신이 그들의 목숨을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거뒀으면 한다. 이 미친 세상에서 3년 동안 수면 아래 말없이 누워 있던 그 배는 끄응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는 태국 꼬따오에서 다이빙 강사로 생활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다이빙을 할 때마다 바다를 볼 때마다,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 바다로 가다 보면 그 배가 있는 곳과 맞닿을 텐데. 나는 이리 바닷속에 자진해서 내려가 예쁘고 아름다운 건 다 보고 있는데, 그 아이들은 억지로 바다로 끌려들어 가 고통 속에 마지막을 맞이했으니 얼마나 한스럽고 화가 날까. 일부러 배를 가라앉혀 다이브 사이트로 만든 난파선 사이트에 가면 늘 세월호와 분향소에서 눈에 담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양 과정에서도 여전히 정부는 헛발질이다. 그리고 그걸 비판하는 언론과 시민 단체엔 감추느라 바쁘다. 침몰 당시와 마찬가지이다. 유족들은 여전히 차가운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기다리라’고만한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애초부터 이 참사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평소엔 한국의 골치 아픈 뉴스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나 세월호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는 게 JTBC 뉴스룸 다시보기이다. 인양이 시작되면서 미수습자 유족 중 한 아버지는 “지금까지는 하루라도 빨리 인양되길 바랐지만, 인양이 시작된 이 시점부터는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좋으니 온전히, 무사히만 인양되길 바란다”라고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인양을 지켜보기 위해 미수습자 유족들은 직접 작은 통통배를 구했다. 그리고 직접 배를 운전하는 법을 배워 인양되는 세월호 옆을 돌아가며 맴돈다. 이 소식을 전하고 안나경 앵커는 벌게진 눈으로 목이 메어 멘트를 흐렸다. 유족들은 세월호가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는 3년 동안 그곳이 보이는 산자락에 컨테이너 박스를 지어 놓고 생활했다. 얼마나 정부가 하는 일이 못 미더웠으면,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으면, 얼마나 무능했으면, 이제 세월호 유족들은 인양에 대한 전문가가 다 됐다.      


JTBC 뉴스룸을 보며 흥미로운 지점을 느꼈다. 손석희는 <뉴스룸>을 통해 하루에 한편씩 이야기를 내놓는다. 세월호가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내던 날, 이 뉴스 다음으로 박근혜 뉴스를 다뤘다. 뉴스의 순서나 헤드라인, 앵커의 언어 선택에서 언론사는 드러나지 않는 ‘의견’을 내놓는다. 손석희는 어떤 언론사보다 세월호 참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 취재를 하던 김관 기자는 내 오랜 친구다. 그 친구는 가끔씩 서울에 올라와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아비규환과 같았던 참사 현장, 유족들의 절규, 참사 이후 쏟아지는 비리와 은폐 등 그 모든 사실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했던 기자로서 그 친구는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 친구는 지금 JTBC를 나왔다. 세월호 참사 보도로 기자상을 받고 여기저기 러브콜도 받고 사람들의 관심도 많이 받았지만 그 친구는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기자를 그만뒀다. 왜 인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손석희 역시 세월호 참사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가 진행하는 뉴스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언제나 ‘국민’ 대신 ‘시민’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사전에 찾아보면 ‘시민’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 권력 창출의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일종의 특권 계급으로 존재하였고, 근대에는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시민 혁명을 주도한 계층을, 현대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 전체를 의미한다. 자발성과 보편성이며,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 의사 결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국민’은 소재지와는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일정한 국법의 지배를 받는 국가의 구성원. 국가를 구성하는 각 개인을 가리키는 경우와 소속원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주권자로서의 자각을 지닌 국가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명확히 인식하는 의미에서 국민이라고 쓴다.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민은 국권(國權)의 지배를 받는 객체일 뿐만 아니라, 국권의 담당자 또는 국권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풀이된 사전의 개념을 이해하면 어렴풋이 ‘시민’과 ‘국민’의 차이점이 보인다. ‘국민’은 정치인이 많이 쓰는 단어다.      


손석희는 <뉴스룸> 내내 시청자들에게 ‘시민’이 될 것을 강조한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도, 이 사달이 난 것도 얼핏 보면 개돼지만도 못한 썩은 정치인들과 정부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판을 만든 것도 우리 모두라며 책임감을 가지라 종용한다. 이 판을 뒤집고 새로 짜는 것도 결국 이렇게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이 아닌 그 정치인을 뽑는 우리 모두의 역할이자 의무라 조용하고 부드럽게 외친다. 우리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나는 ‘시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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