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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02. 2020

겨울잠 자는 사람들

나는 어쩌면 팬데믹 이전부터 겨울잠을 자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같은 이름 맥주의 본고장인 멕시코에서 글로벌 팬데믹을 겪고 있는 나로선 참 안타까운 이름이다. COVID19에 세상이 송두리째 휘둘렸을 땐 코로나 맥주는 망했다, 생각했는데 팬데믹 한 두어 달 지나니 오히려 사람들은 오히려 코로나 맥주를 더 찾을 것 같다. 짠- 하면서 우리가 모두 함께 겪은 이 경험을 되살리며 웃겠지.


지난 두어 달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래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최대한 정신줄 안 놓으려 하루하루 나를 다독이고 돌보며 살아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 ‘Anyways life goes on.’ 어떻게든 삶은 계속된다. 코로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동안 누려온 일상의 경험을 박탈했다. ‘자유’의 역사가 깊은 프랑스 같은 유럽 몇 나라들, 미국 바보들은 지금도 ‘freedom’을 외치며 한국 같은 나라가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 전염병 확산을 막았다, 비판적이기도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구상 각각의 나라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제각각 대책도 대응 방식 접근법도 달랐지만,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라는 종은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바이러스에게 경험을 박탈당했다 책임을 물을 순 없는 일이니, 어떤 사람들은 중국을 재판한다느니 아시아를 재판한다느니 헛소리다. 책임은 묻고 싶은데 소재는 분명치 않고, 서구 문명의 콧대 높은 우월감이 바닥에 주저앉고 있으니 괜히 엄한 소리다. 서구권이든 동양권이든 우리는 결코 그 책임의 소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우리가 바이러스의 이유와 책임, 그 자체이니까. 인간은 결코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할 것이며 설령 그렇다 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모른 척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 유령 도시처럼 휑한 곳에 야생 동물이 출몰하고 바닷속은 더 조용해지고 깨끗해졌다. 지구에서 인간의 생산 활동을 멈추니, 오존층 구멍이 메워지고 온갖 공해로 메워졌던 위성사진이 깨끗해졌다.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지구에 큰 해를 가해왔는지 깨닫는 듯했다. 이제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많은 나라가 봉쇄를 완화하고 있다. 내가 있는 멕시코 킨타나오루 주 역시 관광 사업에 모든 걸 의지하고 있는 곳이라 6월 1일에 모든 걸 재오픈하겠다 이미 확실시했다. 사람들은 몇 달 멈춘 만큼의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 두 배로 공장을 더 돌릴 거고, 몇 배로 유해 물질을 배출할 거다. 나는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는’ 사람이다. 좌절하진 않지만, 모든 걸 긍정적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2차, 3차 웨이브가 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딱 한 달 봉쇄령을 버틴 미국인들이 총을 들고 거리고 뛰어나와 ‘freedom’을 외치고 그들에 대한 저항으로 병원에서 뛰쳐나온 프런트라인 의료진 얼굴에 침을 뱉고 죽이겠다 위협하는 영상을 보면서, 나는 낙담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당장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먼 곳에서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기에 내 일 같지도 않다. 그냥 ‘제길’ 하고 스트롤을 내릴 뿐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은 동시간에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지금도 여전히 문을 나서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텅 빈 길거리를 보면서 대체 바이러스는 어디에 있는 거야, 혼잣말을 내뱉는다. 실체가 없는 바이러스. 그래서 나는 더 혼란스럽고 어렵다. 인터넷을 열면 전 세계는 지금 난리인데 내 가까운 사람들 중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은 감사하게도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바이러스가 더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저 내가 인터넷에서 본 뉴스들과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들의 영상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 팬데믹을 겪는 깨어있는 사람으로서 상식적인 반응과 행동을 하려 노력 중이다. 웬만하면 안 나가고, 나가도 혼자 다니고, 사람 안 만나고, 마스크 착용하고. 지난 몇 달간 멕시코에 온 이후 만난 사람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하지만 여전히 바이러스는 나에게 실체가 없다. 내 머릿속에 그 실체를 인식시키려는 노력만 있을 뿐.


팬데믹 이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미 ‘직접 접촉’ 없이 살 수 있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인간은 직접 만나지 않고도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태국 꼬따오에서 5년, 멕시코 툴룸에서 몇 달을 보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한국 Vans에서 일하는 짹 대리가 서울 남산 타워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으로 이사했고, 그의 와이프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대출을 받았고, 짹 대리는 앞으로도 그가 행복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Vans를 열심히 다닐 것이다. 한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게 붙어 다니며 술 마시고 수다 떨던 오주환은 드디어 ADOY로 빛을 보고 있다. 우리는 정말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마치 온라인에서 보는 친구들의 삶이 실제론 행복하든 말든, 어떤 성질의 기분을 느끼는지 나와는 점점 아무 상관없어진다. 직접 접촉이 아니니 잘 됐단 포스트를 봐도, 안 됐단 포스트를 봐도 ‘좋아요’ ‘슬퍼요’ 작은 얼굴 하나 누르면 내 감정의 소통과 공유는 그걸로 끝이다. 아주 무서운 세상을 맞닥뜨렸는데 거기에 무감각하게 적응해가고 있는 나 자신도 참 무섭다. 


크고 복잡한 도시에 살면 더 그렇다. 도시는 사람의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 같은 장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 결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게 그거다’로 귀결된다. 우리는 모두 ‘아무개’가 된다. ‘어젯밤 뉴스 봤어? XX에서 OO가 살해당했데, 성폭행당했데...’ 등등. 여기서 XX는 이름은 있지만 말 그대로 ‘김 모 씨’ ‘이 모 씨’다. 내 가족, 친구가 아니고선 매일 같이 터지는 인간사 뉴스들에 우리는 결국 무심해진다. 


내가 도시를 떠나게 된 이유다. 하루에 수십 명을 만나는 기자 일을 했지만 내 사람 하나 둘 지키는 것도 힘들었다. 도시를 떠나, 서울을 떠나, 꼬따오에 살면서 나는 초록색 바나나를 사다가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 식탁에 놓아두었다. 며칠 지나면 초록색 바나나가 노란색이 된다. 초록색 바나나가 노란색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삶을 갖고 싶었다. 시골 섬 꼬따오에서 다이빙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먹는 걸 만드는 ‘요리’라는 게 얼마나 고결하고 아름답고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 현대 도시 사람들이 ‘먹방’ ‘쿡방’에 미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다.


‘오늘날 가능한 것은 금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 대한 거절일 것이다. 이제 권력은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고 ‘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형철이 그랬다. 세상 모든 신제품과 신기술에 그동안 마음껏 유혹당해왔던 사람들이 팬데믹으로 인해 갑자기 모든 유혹으로부터 거절당했다는 좌절감을 맛봤다. 인간의 고고한 자존심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경험이다. 


다행히 내 라이프 스타일은 이미 수많은 유혹을 떨쳐내는 방식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다. 팬데믹 이전이든 이후든,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그저 물속으로 들어가 다이빙하고 먹고 자고 쓰는 게 다였기 때문에. 그저 나는 팬데믹 이전에도, 이후에도, 늘 허공을 떠다니는 기분이다. 다이빙을 많이 자주 해서 그런가. 어디에도 두 발 붙이고 산다는 느낌이 없다. 얼마 전 친구와 ‘홈’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에겐 홈이 조국도 아니고 오래 산 꼬따오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이길 바랄 뿐이다. 아직 만나진 못했지만, 나에게 ‘홈’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 역시 결국 어딘가에 정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겨울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뭣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엔 괜히 뭔가 아는 척 지껄였는데 가끔씩은 이 바이러스가 신이 인간에 내린 경고라는 말도 눈 딱 감고 믿고 싶고, 지구가 마지막으로 친절하게 짚어주는 종말의 수순이라는 말에도 슬쩍 숟가락을 얹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겐 바이러스는 실체 없는 허상이다. 이 허상을 공포로 받아들이면 내 삶의 밸런스는 무너질 것이며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조용히 꾸준히 내 할 일 하고, 내 갈 길 묵묵히 걸으면 괜찮을 거라는 것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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