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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11. 2020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몇 달 전 국감장에선 놀랍지도 않은 그림이 중계되고 있었다.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아하게 멋지게 묻는 이는 여전히 없었다. 고성에 윽박지르며, 정부를 향한 근거 없는 비난과 트집거리를 펼쳐놓기 바빴다.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보는 참 피곤한 풍경이었다.


한 야당 의원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질의 중이었다. 의원은 크게 화를 냈다. 의사들이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왜, 어째서’ 복직이 가능하냐 따져 묻고 있었다. 현 정부가 왜 그리 유독 의사 집단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쩔쩔 매냐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박능후 장관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처음엔 “예, 저도 유감입니다만, 앞으로 방안을 마련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장관은 예의를 지키려 했던 것뿐인데 이 때다 싶었는지 의기양양해진 야당 의원은 같은 질문을 또다시 반복했다. “어? 대체 이게 왜 그런 거냐고요? 현 정부가 의사 집단에, 기득권층에 이렇게 약해서 되겠냐고요!”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장관은 의원의 같은 질문이 세 번째 반복되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아니, 지금까지 의사들이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질러도 복직할 수 있었던 건 입법부(국회)에서 법을 그렇게 만들어놓아서 그런 거고, 저는 그 법을 현장에서 이용하는 자리인데…” 그때 그 의원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순진하게 폭력적인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의사 집단에게 특권을 준 건 대부분 국민의힘 의원들이었다. 꽤 통쾌하고 낯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국회에서 입법이 한창인 시기에 박 장관에게 호통 치던 그 진상 의원이 떠오른 건 당연하다. 입법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를 국회의원들로 가득한 국회가 오늘도 ‘생쇼’를 하고 있다.


‘독재의 원조’인 야당 영감들이 적법하게 절차를 밟아 통과하는 공수처법 개정안을 두고 현 정권에 ‘독재’라는 단어를 쓴다. ‘독재’라는 그 무거운 단어를 이리도 아무 때나 갖다 붙이니 그만큼 가벼이 여겼기에 그 독재의 꿀로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온 이들인 것이다. ‘독재로 흥한 자는 독재로 망한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야당 의원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지지자가 아님에도) ‘제발 머리를 잘 써라’ 조언해주고 싶다.


공수처법은 이미 지난 7월 통과됐다. 야당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수처장 임명을 미뤄온 게 지금 12월이 됐다. 여당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국민들이 속 터져하니 눈치 보다 이제야 밀어붙인다. 모든 절차와 과정에 위법은 없다. 그런데 야당이 이걸 ‘독재’란다.


국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국회의원으로 가득한 야당인만큼 ‘독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이들도 많다. 독재 정권 시절, 야당 의원들, 혹은 그의 아버지, 아버지에 아버지, 아버지의 친구, 선배 등등은 민주화 운동을 한 이들은 결코 아니니 모를 만도 하다. 오히려 사회의 혼란과 미성숙함에서 기득권으로 취할 수 있는 모든 특권은 다 누린 이들이라 ‘독재’란 단어를 쓰기 쉽다. ‘독재’로 피 흘리고 탄압받던 이들, 혹은 그들의 정신을 잇는 사람들은 그 말이 목에 컥 막혀 소리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 아직도 그렇다.


아나운서 출신에 KBS에서 ‘우리말 고운 말’ 상까지 받았던 배현진은 ‘귀태’라는 말로 현 정권의 책임자를 ‘아예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라 모욕한다. 말과 글이 사람을 베는 칼이 될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일 텐데 그걸 알기에 이용하고 계산해 상대를 찌르려 작심하고 뱉은 말이다. 그냥 멋모르고 소리만 지르는 국회 영감들보다 더 나쁘다. 의원이라는 호칭도 아깝다.


공수처법은 90년대부터 시민 단체가 끊임없이 요구해온 법안이다. 야당이 저리 동네 양아치처럼 깽판을 부리는 건 공수처법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 먹었고 앞으로도 해 먹어야 하는데 자꾸 장애물을 만든다니, 시대는 바뀌고 시민들은 똑똑해져 힘에 부친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편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이래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외엔 모두가 보수 독재 정권이었고, 오래오래 잘 해먹어온 터에 정권을 못 잡아도 검찰이 알아서 춤을 춘다. 언론도 그렇다.


대한민국 헌정 역사 내내 나라 곳곳 보이는 곳이든 안 보이는 곳이든 거미줄처럼 야당 인사들의 손이 뻗어있다. 유일하게 어쩌지 못한 게 대패한 총선이었는데 여태 야당은 상황 파악 못하고 이걸 마치 안타깝게 진 게임처럼 미화시킨다. 그 사람들, 다음 정권도 어림없다. 2014년 세월호 사고로 사람 304명이 내 눈 앞에서 죽었다. 박근혜가 최순실에 놀아나고 이명박이 나라로 장사해 돈 챙긴 걸 다 퉁 친다 해도 나는 세월호만은 용서 못한다. 수학여행 보낸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사그라졌는데 자식 잃은 부모가 야당 의원들의 온갖 모욕을 참아가며 6년이 지나서도 국회 앞에서 단식하고 농성을 한다. 어제도 세월호 특별법 통과에 야당은 필리버스터로 입법을 막았다. 대체 이들이 어떤 끔찍한 짓을 했는지, 대체 어떤 걸 감추려고 하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필리버스터에서 발언하는 야당 국회의원은 세월호 사고 발생 연도를 잘못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이거다. 최근 윤석열이 ‘자랑스러운 서울대 동문 1위’로 뽑혔다. 80%에 가까운 서울대 졸업생들이 윤석열이 자랑스러워 죽겠단다. 의료, 행정, 법조, 정치, 경제 등 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특권 의식에 빠져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놀이나 하고 있을 서울대 출신 인간들의 검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정확한 표정은 떠오르지 않는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고졸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칼을 빼들었을 때 검사들은 대통령 앞에 앉아 학번을 언급하며 키득거렸다. 대한민국 보수 엘리트 집단의 역사의 ‘어깨들’이었던 검사들이 대통령을 그저 기분 나쁘고 신경 쓰이는 모기쯤으로 취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의 실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노무현은 스스로 링 위에 올라 나쁜 패를 쥐고도 경기를 치렀고 참패했다. 그래서 문재인은 절대 검찰과 ‘맞짱’ 뜨지 않는다.


조국으로 펀치 한 방 맞은 문재인이 추미애를 내세웠다. 추 장관이 노무현을 탄핵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무모함이었다. 감히 검찰을 건드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엘리트들이 닌자처럼 일사불란하게 방패를 꺼내 들고 윤석열을 호위한다. 아니, 그의 뒤엔 대한민국 정부 역사 내내 호위 호식해온 보수 엘리트 집단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설령 그가 추락해도 매트리스 역할을 해주겠노라 고고하게 버틴다. 분명 술 접대를 받았는데 11시에 집에 가서 4만 원이 모자라 기소가 안 된 2명의 검사들, ‘절대 내 새끼들은 그렇지 않아, 어디 감히 검사를 건드려!’ 자신하던 윤석열은 ‘국민, 국민’ 하더니 결국 검사 비리엔 침묵이다. 검사의 기고만장한 특권 의식은 지금 국회에서 공수처법은 안 된다 생떼를 부리는 야당 국회의원들과 데칼코마니다.


야당은 지금도 법안 통과를 막겠다며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는데 토론을 해봐야 하는 법을 알지, 8시간은 버텨야 하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법안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아녀자(여자를 얕잡아 이르는 말)’ 같은 단어를 쓰고, ‘문재인이 잘 생겨서 좋아했던 30대 여성이 요즘 마음을 돌렸다’는 말을 토론이랍시고 아무렇지 않게 떠든다. 부끄럽다. 우리가 뽑았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기자, 법을 수호하지 않는 검사, 국민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 아픈 이를 외면하는 의사, 노동자를 죽이는 기업인. 이 모두 ‘사회의 리더’라는 포지셔닝에 속한 이들이다. 나는 이 암묵적 합의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대한민국에 몇 안 남은 비평준화 지역에 산 탓에 성적순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생각해도 중학교 때 공부를 엄청 잘했는데 결국 성적 1등급만 갈 수 있다는, SKY를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지역 명문 여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10시까지 자습을 시켰는데 나는 예체능으로 대학에 가겠다고, 레슨 받아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매일 학교에서 도망쳤다. 당시, 혹은 그 이후 내가 만난 SKY 지망생이나 재학생들 대부분은 끔찍하게 따분하고 재미없는 인간들이었다. 내가 SKY 출신이 아니라서 자격지심 부리는 거라 비난한다면 달게 받겠다. 분명한 건 학창 시절의 나에게 SKY 세계는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 사람들과 평생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세계에 들어가려 노력한 적도 없다.


“동네 슈퍼를 해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던 ‘고졸’ 엄마의 말은 역시 맞았다. 그래서 내 인생 가장 오랜 시간을 낭비한 대학을 졸업했다. 나 역시 비겁했다. 시스템에 맞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 졸업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말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 SKY를 가지 않고도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체험한 경험으로 공감하는 법을 배웠다. 그 힘으로 인정받는 에디터가, 인터뷰어가 되어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스카웃 받았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며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나 학문, 학벌, 인맥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별로 큰 영향력이 없는 대학이기도 했고, 또 내가 졸업 이후 유독 그런 길만 골라 다닌 것도 이유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만들어온 삶이다.


내가 경험한 SKY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책상에 앉아 보내 직접 경험도 풍부하지 않고,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레 스며든 특권 의식 덕에 간접 경험을 해야겠다는 필요성 자체도 못 느낀다. 말 그대로 ‘그들이 사는 세상’에 갇힌 이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SKY를 욕망하는 이유는 사회 시스템에서 엘리트 집단의 특권과 혜택이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지 실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 엘리트 집단의 비뚤어진 특권 의식에서 출발한다. 특권을 만들어 누리는 자들과 그걸 욕망하며 특권에 복종하는 이들의 서포트가 완벽하게 밸런스를 이루는 시스템이다. 유난히 끈끈한 집단이 있다. 카르텔 저리 가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뭉치는 이유는 그래서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은 생명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구성원들에게 특권 의식을 강조하며 세뇌시킨다.


입법, 행정, 사법, 경제, 언론에 관여하는 대부분의 엘리트 집단은 자신을 ‘노동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오직 검사가 만나는 피의자, 의사가 만나는 환자, 국회의원이 선거 때만 악수하는 지역민뿐이다. 그들이 만나는 ‘평민’은 나쁜 사람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무식한 사람이거나 기생충 같은 사람이다.


2020명. 한 해 일하다 산업 현장에서 죽은 노동자 수다. 노동 현장에서 기업이 생산비 아끼겠다고 안전장치 설치나 사고 예방 및 점검을 소홀히 한다. 그래서 발생하는 사고가 대부분이니, 앞으로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망하면 기업에 책임을 지우겠다는 법인데, 민주당은 정의당을 도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과시키겠다고 꾀어 놓고 다른 법 통과와 맞바꿨다. 그리고 민주당은 정의당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 인간들은 야당보다 더 나쁘다. 언제나 의석을 많이 몰아줘도 일을 제대로 못해서 우왕좌왕하다 결국 말아먹는다. 어차피 정치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거고, 괴물인 야당보다 괴물과 싸우겠다고 나선 여당이 나았다. 돈키호테처럼 무능하지만 순진하니 그동안은 봐줄만했다. 그런데 여당이 예전에 야당이 했던 짓을 조금씩 따라 하고 있다. 고상하고 교양 있는 척은 다 하면서 양아치 짓을 똑같이 한다. 돈 많고 학벌에 인맥에 집안 좋은 야당 의원들에 비해 자기들은 민주화 운동 출신이 많아 불합리한 처우를 많이 받았고 동등한 경쟁을 하지 못했다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요즘은 기업 눈치도 잘 보고 여기저기 기득권과 연결 지점도 많이 만들고 있다. ‘민주화 운동했던 잘 생긴 오빠’도 성추행하고 성폭행하면 안 된다는데, ‘뭐 그리 대수냐’ 여태 이해를 못하고 있다.


야당은 세월호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단식하게 만들었는데, 지금 여당은 2년 전 산업 현장에서 컨베이트에 끼어 사망한 김용균의 어머니를 단식 농성하게 만들었다. 무능한데 악하기까지 하다면 여당은 최악의 괴물로 변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가장 마음 아픈 건 국회에서 벌어지는 이 짓거리를 정작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못 본다는 거다. 먹고살만한 사람은 뉴스보다 짜증 나면 TV를 끄면 그만이다. 자신의 현실이 꽤 괜찮은 사람은 뉴스가 현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먹고 사느라 바쁜 사람은 싸울 시간도 없다. 뉴스 보며 화낼 시간도 없다. 또 어떤 이는 현실 자체가 뉴스라 뉴스를 볼 필요가 없다.


택배로 치즈 케이크를 주문한 누군가는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겠지만, 택배 기사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시간이 없다. 어떤 이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한 장만으로 수백, 수천을 벌기도 하는데 택배 기사는 일하다 과로사로 쓰러진다.


경찰과 검찰은 여덟 살 나영이를 수차례 불러 같은 피해 진술을 여러 번 반복하게 했다고 한다. 몇 번은 녹화가 안 되었다고 같은 진술을 또 시켰다. 거동도 불편한 성폭행 피해자 아이를 불러 수차례 모욕하고 기억을 의심했다. 그리고 조두순은 술을 먹었다는 이유로 심신미약이 인정되어 12년 형을 받았다.


그런 법을 만든 국회의원도, 그 법을 등에 업고 권력처럼 부리는 검사도, 법으로 심판하는 판사도 모두 엘리트 집단 특권 의식 안에서 그것을 믿고 지키며 살아왔다. 그것이 무슨 신성하고 정의로운 사명인 듯 착각 빠져.


조두순이 12년을 살고 출소한다는데, 그 괴물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건 결국 시민이지 그를 조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한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아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결코 한 점도 겹치지 않는다.


20대엔 투표를 멋으로 했다. 그땐 시간도 많고, 투표하면 괜히 의식 있는 시민인 것 같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한몫을 한다는 의미 부여도 컸다. 순진하고 낭만적이었다. 30대가 되면 입법부 정치인들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만들고 없애는 법들이 내 삶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새 보유한 부동산, 주식, 재산, 이익이 정치와 깊게 얽혀있어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기 영 힘들다. 사람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온갖 탈세와 위법을 해도 자신이 보유한 주식 올려주는 기업은, 그리고 관련 정치인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그렇게 가진 자들은 보수로, (나처럼) 없는 자들은 진보로 갈라진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야당은 정의롭지 못한 과거와 역사에서 이미 추악한 괴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걸 막겠다는 여당도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도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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