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Apr 16. 2021

외로워마소, 물 밖도 차고 깜깜하오

바닷속에 304개의 거품이 피어난 날.



나의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은 IMF로 제주도에서 경주로 바뀌었다. 이후 지금까지 제주 한 번을 못 내려갔다. 제주도는 어린 나에게 꿈같은 곳이었다. 7년 전, 그 아이들도 난생처음 제주도 놀러 간다고 신이 났겠지. 수학여행에서 입을 예쁜 옷도 챙기고, 내년이면 고3이라며 툴툴 거리기도 했겠지. 며칠밤 자고 돌아올 집이고, 다시 볼 가족이니 대충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겠지. 7년 전 그날 아침, 집을 나선 아이들 중 304명이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안산 단원고의 한 학년이 사라져 버렸다.


시꺼먼 바다에 고꾸라져 박힌 하얀 여객선, 헬리콥터가 빙빙 그 배 주위를 도는 장면과 ‘세월호 선박 사고,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함께였다. 나는 잡지사 해외 출장으로 발리에 있었다. 일정 중 식사를 하다가 레스토랑의 대형 스크린으로 그 장면을 봤다. 전원 구조라고 했다, 전원 구조. 나는 잠시 놓았던 밥숟가락을 들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식사를 마쳤다. 그날 밤, 숙소에 들어가 TV를 켜니 지옥이 펼쳐졌다. 수백 명이 갇힌 배가 바닷속으로 1센티미터씩 잠기고 있는 1분 1초를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장면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분 매초 나를 따라다닌다고 하진 않겠지만, 노란색을 볼 때, 교복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 바다를 볼 때, 배를 볼 때, 바닷속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난다. 


2014년 4월 16일, 바닷속에 304개의 거품이 피어난 날이다. 며칠을 바닷속에 있다 나온 아이들은 신원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나마 그렇게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그 차가운 바닷바람 부는 팽목항에서 금쪽같은 새끼 수학여행 보낸 것밖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젊은 엄마, 아빠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나랏일 한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던 모든 인간 하나하나가 단체로 멍청하고 게으르고 사악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바닷속에 아이들이 산 채로 배에 갇혀 수장되는 걸 본 것만큼이나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잔인하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꼴을 보는 것도 큰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됐다. 


안산 합동 분향소에 갔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아니 수많은 신호를 받아왔다. 사회 이곳저곳 삐걱대고 고장 나있다는 신호를. 하필 아이들이 수천, 수만 번의 어른들의 탐욕과 무능과 게으름의 대가를 받은 것이었다. 그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죄책감은 충분했다. 그 후로 1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304명의 생명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며 떠나야만 했는지,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밝혀야 하는 게 상식이고 뒤늦은 사죄라도 될 텐데 괴물들은 뭐가 그리 구린 걸 숨겨놓았는지 누구도 얼씬 못하게 막아섰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출근길 지하철에서 무심히 집어 든 <메트로> 표지를 보는 순간, 나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신경 안 쓰고 꺼억 꺼억 울어재꼈다. 외로워마소, 물 밖도 차고 깜깜하오. 


세월호 1주기 <메트로> 표지



친구들과 집회에 여러 번 나갔다. 세월호 사고가 있던 날, 선내에 울려 퍼지던 문장 ‘가만히 있으라’로 배지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눴다. 또래의 죽음을 이해시켜달라고 침묵시위에 나온 고등학생들을 경찰은 이유도 없이 연행해갔다. 정부는 대답 대신 차벽을 세웠고, 유족들을 차가운 바닥에 내팽개쳤다. 사람들이 ‘지하철 찌라시’ 같은 거라고 무시하던 <메트로>가 백배는 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인간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외면하고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우울하고, 누구는 체념한다. ‘세월호 지겹다’ ‘네 가족도 아닌데’ ‘사람은 매일 죽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트라우마의 다른 표현이라 믿고 싶다. 하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 직접 겪은 이들의 아픔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당시 정부가 모든 것을 숨기려 한 미심쩍은 행동이나 합리적 의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식 잃은 부모, 엄마 잃은 자식, 남편 잃은 아내 같은 유족들의 마음에 좁쌀 한 톨만큼의 공감이 없었다는 것은 나에게 이를 갈 정도의 충격과 분노였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수학여행비 받는 것도 미안해하던 아이가 안내방송 잘 듣고 선내에 가만히 있다 배 안에서 익사했다. 그런 아이를 위해 진상을 밝혀달라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를 위해 앙상한 뼈가 드러나도록 단식을 해야만 했던 유민이 아빠 앞에서 괴물들은 피자와 치킨을 시켜먹고 아이를 떠나보낸 죄만으로도 이미 괴로워 바싹 말라죽어가는 사람을 괴롭혔다. 지금도 빨간색 점퍼를 입고 국회에 한 자리 차지한 인간들은 7년이 지난 지금도 국회 앞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세월호 유족들에게 자식 팔아 장사한다며 대체 얼마나 더 받아먹으려고 하냐고 모욕한다. 그래도 자식 잃은 부모의 죄는 그 개돼지들보다 큰 것인지, 괴물들의 개기름 흐르는 면상 앞에서 제발 법 좀 통과시켜 달라고, 진상을 밝혀달라고 손이 닳도록 빌고 허리가 꺾이도록 고개를 숙인다. 


아이들을 수학여행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엄마, 아빠들은 이제 투사가 되었다. 나는 이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고요한 깊은 바다로 떠났다. 세월호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세월호가 전혀 이유가 아니라곤 말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꾹꾹 참아왔던 한국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아이들의 희생으로 드러났지만 이후 사고 수습 과정 역시 희망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에 나가지 못한 나는 나만의 피켓을 만들어 바닷속에 들어갔다. ‘박근혜 OUT’. 그땐 그 사람만 내려오면 모든 게 끝나진 않더라도 지지부진한 진상 조사가 탄력은 받을 줄 알았다. 그러면 유족들을 자신들의 표 깎아먹는 벌레 취급하며 조롱하고 모욕했던 빨간 당 국회의원들도 사라질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순진했다.  


나는 무언가를 잊고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간 것이 아니다. 잊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간 것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아픔이든 고통이든 후회든, 잊고 싶다 잊히는 게 아니란 걸 이제 안다. 다이빙이 너무 좋아 바닷속에서 살면서, 나에겐 그 편안하고 고요한 바닷속이 그 아이들 떠날 땐 얼마나 무섭고 차갑고 시꺼맸을지, 지금은 그 아이들이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 바닷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닐까 생각한다. 그 아이들을 구하려고 수많은 다이버들이 뛰어들었다. 나중엔 시체라도 찾자는 마음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감압병과 우울증으로 고통 속에 산다. 행복과 평화를 느끼는 마음조차 죄스럽다 한다. 이 많은 한과 상처를 어찌하면 좋누.


7년 후, 유민이 아빠가 단식농성을 할 때 함께 열흘을 단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 임기 1년을 남기고 있는데 해마다 이 날이면 “세월호 진상조사, 끝까지 밝혀 내겠다” 공허한 약속만 한다. 빨간 당 사람들은 7년이 지나도 감추고 싶은 게 많아 정치 계산기를 두드리고 대통령 기록물 열람을 끝까지 반대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세월호 추모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로 비칠 것을 우려해 나타나지도 않았다. 7년이 지나도 세월호 참사 원인을 못 밝히고 있고, 원인을 못 밝히니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진상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더 힘이 세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하기 때문이다. 파란당이 빨간 당만큼이나 무능하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도 발뺌하며 뻔뻔한 악취를 풍기는 악함은 빨간 당을 따를 수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40년 전에 일어났는데 아직도 북한군, 폭도 어쩌고 하는 괴물들이다. 나는 서울 집값이 지금보다 10억이 더 오른대도 그들에게 투표할 일은 내 생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미약하나마 나의 신념이고 자존심이며 의무이다. 


7년 동안 한국 사회에 ‘사회적 참사’라는 말이 생겼다. 그저 우연히, 재수 없게, 그날, 그 시간에, 거기 있어서 생긴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단지 그 사람의 운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곳에, 그날, 그 시간, 거기에 있었다면 그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러니 더욱더, 치사하고 더러우니 권력을 가지려, 부자가 되려, 기득권이 되려 노력하는 편을 택한다.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게 더 쉬울까, 사회적 참사가 발생하는 걸 최대한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게 더 쉬울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 계산을 해봐도 후자가 훨씬 기회비용도 덜 들고, 많은 이가 행복하고 안전하다. 세월호가 침몰된 지 7년 후,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과 청년, 아이들, 여성들, 성소수자들, 장애인들이 생명을 잃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최대한 그 카테고리를 비켜가려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살뿐이다. 어디 한 번 해볼 수 있으면 해 보라, 그 모든 걸 비켜가며 잘 먹고 잘 살아보라.


세월호를 잊지 않으면 파란당이고, 세월호를 교통사고쯤으로 치부하면 빨간 당인 게 아니다. 나는 빨간 당이 싫지만 파란당 팬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국뽕에 취한 사람들은 선진국의 의미를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사회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자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 이를 기준으로 나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한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다. 후진국인데 선진국 인척 해서 더 비열하고 쪽팔리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나는 지금껏 그랬듯 해마다 이 날을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아이들이 더 이상 그 차가운 바닷속에서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할 때가 있다. 내 삶에선 세월호 아이들이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틀랜타의 백인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