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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Aug 30. 2021

행복은 순간의 합, 넷플릭스 <더 체어>

부서진 의자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당신을 향한 위로.


메디컬 막장 미드의 레전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산드라 오는 언제나 탄산 가득한 소다수 같았다. 그녀는 2005년, 이 작품으로 <골든글러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019년, 영국 BBC 드라마 <킬링 이브(시즌 4는 내년 방영 예정)>로 산드라 오는 아시안으로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1989년 브라운관 데뷔 이후 30년 만의 일이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이민자 2세인 그녀가 서툰 한국어로 수상 소감 끝에 외친 말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산드라 오가 한국계라는 걸 알았다는 북미 팬들이 많았다. 팬데믹 속에서 부각된 ‘Stop Asian Hate’ 시위에서 산드라 오는 확성기를 들고 시내 한복판 군중 속으로 들어가 “Proud to be Asian”이라고 외쳤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문화를 선도한다 자부하는 백인들에게 여전히 아시안은 흐릿한 존재다. 해외에서 백인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하는 나에겐 더욱 피부로 와닿는다. 내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태국인이든 그들은 관심이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설령 아시안의 특정한 출신 국가를 안다 해도 어차피 그 나라 문화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대다수의 백인들에게 ‘한국인’보다 ‘아시안’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산드라 오가 주연한 <더 체어>를 보며 조금 흥분했다.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향력 큰 배우가 한국식 이름 ‘김지윤’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시대가 되었구나, 감회가 새롭다. 미국에 사는 한국계 이민자 2세는 언제나 ‘지미’ ‘브라이언’ ‘대니’ 같은 이름으로만 나오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드에서 한국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한국어는 민망하고 낯 뜨거울 정도였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때론 중국인이 한국인을 연기하기도 하고, 한국인이 일본인을 연기했다. 영화를 만드는 백인 제작진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한국어 대사 장면에서 한국어를 제대로 구현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고, 또 아무도 신경 안 썼기 때문이다. 아시안 커뮤니티의 영향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무시해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체어>에선 한국어 대사를 구사하는 한국인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고, 미국식이 아닌 한국식 이름이 강조된다. 한국의 돌잡이 문화, 음식주 문화 또한 정성스럽게 잘 표현됐다. 산드라 오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작품 전체의 그림을 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드라마 시리즈 전반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의 디테일을 잘 잡아냈다. <더 체어> 기획과 극본을 맡은 아만다 피트가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이기 때문에 산드라 오와의 유대감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산드라 오라는 배우, 그리고 그녀의 문화와 백그라운드에 대한 존경과 배려로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산드라 오는 정말 대단한 배우다.



<더 체어>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유서는 깊지만 인기가 없는’ 유명 대학 펜브로크에서 한국계 이민자 2세이자 여성으로서 최초 영문과 학과장이 된 ‘김지윤’에 대한 이야기다. 취업에 도움 안 되고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라는 이유로 인문학이 무너져가는 IT 시대, ‘우리도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는 중’이라며 보여주기 식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영문과 백인 노교수들은 김지윤을 학과장 자리에 앉힌다. 전임 학과장이 물려준 명패 ‘머저리들의 우두머리 머저리’가 놓인 책상, 지윤이 앉자마자 부서지는 의자로 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쇼를 시작한다. 30분 남짓,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더 체어>는 풍자 가득한 코미디 드라마다. 인문대학의 낡은 사고와 지루한 교육법,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를 뒤엎어버리고자 학과장이 된 지윤은 결국 모든 면에서 반대쪽에 서는 교수들에 의해 다시 자리에서 내려온다. 



지윤의 삶은 어찌 보면 고달프다. 한국인 이민자 2세로 홀로 된 아버지와 가까이 지낸다. 이들의 대화는 언제나 아빠는 한국말로 묻고 딸은 영어로 답하는 식이다. 이민자 1세와 2세가 함께하는 가정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아시안 여성 최초로 영문과 학과장이 되었는데, 수강생은 없고 연봉은 높은 ‘공룡’ 같은 종신 교수들에게 은퇴를 권유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아내와 사별한 슬픔에 빠져 사는 동료 교수이자 절친 ‘빌’이 사고를 치면 뒤치다꺼리도 해야 한다. 멕시코계 딸을 입양해 키우는 싱글맘인데 딸은 좀처럼 마음을 안 연다(한국인 아이를 입양하지 못한 이유가 한국에선 싱글맘은 아이를 입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입양한 멕시코계 아이와 만든 가족’, 지윤의 가족은 현대 사회의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된 이민자 가정을 상징한다. 지윤의 삶에는 젠더 갈등, 인종 갈등, 이민자 갈등, 문화 갈등, 인문학의 위기, 세대 갈등, 언론 문제, 노인 문제, 입양가족 문제 등 2021년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갈등과 이슈들이 모두 녹아있다. 



지윤의 아버지는 한국어도 못 하는 애를 어떻게 보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죽은 자의 날’ 리드를 맡은 손녀딸을 위해 멕시코풍 복장을 기꺼이 입는다. 일본 브랜드 ‘키티’가 지윤의 아버지는 죽도록 싫지만, 지윤의 딸은 그의 맘도 모르고 ‘키티’ 노래를 부른다. 돌아가진 외할머니 이름을 따 ‘주희’라는 이름을 줬지만 지윤의 딸은 자신을 ‘주주’라며 고집을 부린다. ‘할아버지’를 스패니시 이름 ‘하비’와 비슷하게 부르며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반항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마음을 열지 않고 내내 지윤의 애만 태우던 딸은 ‘죽은 자의 날’, 세상을 떠난 지윤의 엄마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주희’의 영혼을 기리고,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는 지윤을 말없이 꼭 안아주기도 한다. 결국 학과장 자리에서 내려온 그녀는 그제야 삶의 순간, 순간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었다. 뻔한 여성 중심의 쇼였다면 최초의 아시안 여성으로 올라간 학과장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독하게 안간힘을 쓰는 인물로 지윤을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체어>는 그녀를 미련 없이 학과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했다. 그리고 지윤에게 세상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는 책망 대신 따뜻한 위로와 감사를 보낸다.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 이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고, 그리고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젊은 세대를 시의 아름다움과 고전의 깊이를 즐기고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세대라 개탄하는 백인 노교수들은 이미 ‘콘텐츠’의 시대로 바뀐 지금, 여전히 ‘텍스트’의 시대에 갇혀 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지식과 정보가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한 현시대, 대학은 과연 지속되어야 하는가, 인문학은 지속될 수 있는가, <더 체어>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에게 <모비딕>을 가르치는 노교수는 작가의 여성 폭력 전력에 대해 토론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로부터 귀를 닫는다. 젊은 세대는 빚에 허덕이며 대학에 입학하는 동시에 돈 벌 궁리부터 해야 한다. 노인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쓸모없다는 자괴감과 불안으로 괴로워하며 결국 젊은 세대를 위협으로 간주하거나 무시해버린다. 대학 영문과 종신 노교수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자신이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이들에게 모르다고 인정한다는 건 곧 자신이 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의미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희 세대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며 젊은 세대가 자신의 공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자신들이 창조한 시대의 어두운 면과 과오, 실수는 인정하지 않아서다. 



이 세계를, 이 사회를, 이 커뮤니티를 오랜 시간 지탱하고 이어지게 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학과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윤은 “그래도 적어도 시도는 해봤잖아”라고 말한다. 조앤 교수를 다음 학과장으로 지명하는 ‘연대’와 ‘포용’을 선택하며 여전히 세상에 대한 반항을 멈추지 않는다. 지윤은 첫 발을 디뎠고, 아주 작은 물꼬를 틔었으며, 시작을 행했다. 지윤이 ‘더 체어’에 앉지 않아도 그 자리는 그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는, 그래서 조금씩 변화가 이뤄질 거라는 희망이 흐릿하게 보인다. 충분히 가치 있는 시도와 경험이었다. 지윤은 학과장 자리에 앉을 때나 아닐 때나 여전히 온갖 난장판 속에서도 끊임없이 골칫덩어리 친구 ‘빌’을 챙기고, 한국인 아버지와 멕시코계 입양 딸, 동료, 후배, 학생들을 도우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여전히 집에 들어오면 한국식으로 신발부터 벗고, 멕시코에서 온 입양 딸의 문화를 배우려 노력하면서도 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지윤, 선명한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정신없는 삶 속에서 한 순간, 한 순간이 아름답다. 행복은 그 어떤 거대한 것이 아닌, 순간이 모여 이루는 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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