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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Feb 16. 2022

우리가 가져 마땅한 지도자



돈 걱정 없이 살아온 삶이 어떨지 상상조차 안 된다. 나와는 늘 먼 삶이기 때문이다. ‘사법고시 9수’는 돈 없으면 못 한다, 한국이란 나라에선 절대 못 한다. 10년 가까이 고시 공부만 하며, ‘에이~ 형이라고 불러’ 하며 고시준비생 후배들에 밥 사고 술사며 동네 대장 노릇을 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예예 형님’ 하며 따랐겠지. 그렇게 검사가 되어 지금껏 오랜 시간 그 조직에만 몸담아 왔으니, 이 사람의 인생은 집에서 물심양면 지원받으며 공부한 거 반, 검찰이라는 조직에서 생활한 게 반이다. 그게 전부다.


저기 저 반대편에 선 사람은 인생사 우여곡절이 많다. 나처럼, 그리고 다른 보통의 사람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벗어나려면 공부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 ‘개천의 용’이 되어야 하는데, 당장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도 공장 다니며 공부해 사법고시를 치르고 변호사가 됐다. 뒤봐주는 사람도, 인맥도, 재력도 없으니 검찰에 들어갔어도 따돌림을 당했을 거고, 변호사가 되어서도 비빌 곳을 못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권 변호사가 되었겠지. 변호사로의 성공은 수임료가 아닌 직업의 가치로서 얻는다는 신념일 수도 있고, 자신이 이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치고 나가려면 돈보다 더 큰 것, 즉 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치밀한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사람 속마음은 자신만 아는 법이니.


없이 사는, 그리고 없이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가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지”라는 영화 대사를 좋아한다. 그는 스스로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대에게 책잡힐 부패를 일부러라도 안 만들었을 사람이다. 공장에서 경기도지사실까지 볼 꼴 안 볼 꼴 다 보며 스스로 어찌 올라간 자린데, 그걸 망칠 작은 실수라도 용납할리 없다. 그가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존심이 세고 독해서이기 때문이다. 출발선부터 다른 경쟁자를 절대 이길 수 없는 시스템을 직접 경험한 이 사람은 그래서 그 시스템의 실체를 안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기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안다.


해외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에 내 생활도 크게 영향받는다. 박근혜, 세월호, 북풍, 국정 농단은 한국인으로서 외국인을 만날 때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고, K 컬처, 코로나 대응, G8 입성, 문재인은 나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것 같지만 별거다. 트럼프든 바이든이든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극심한 미국의 빈부격차가 갑자기 해소되는 것도, 치솟는 물가가 기적처럼 잡히는 것도, 사회갈등이 없었던 일인 양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태국에 사는 미국 친구들은 트럼프 때보다 해외 살이 마음고생을 좀 덜 한다고 한다. 나 역시올시다. 팬데믹을 한국과 태국, 멕시코에서 각각 지내온 나로선 박근혜 때 코로나19 팬데믹이 오지 않았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박근혜 때 한국을 떠난 나는 내 나라가 한없이 부끄러웠고, 답답한 스타일의 문제인의 팬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 나라가 적어도 부끄럽진 않다.


아니, 여전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스스로 부끄럽다. 대만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에 100년 형을 내린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헤어지자는 여자를 찾아가 때리고 죽이고, 수백수천수만의 성 착취 물을 팔아 이득을 취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겨우 수십 년형 받고 감옥에서 웃고 있다.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나라, 선진국 5위에 들겠다는 대선 공약이 나오는 판에도 매일 현장에서 일하다 죽는 사람이 나오는 나라, 이준석의 정치 명분 ‘이대남 달래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 결국 그가 원하는 건 남성과 여성이 서로 더 혐오하고 분열하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혼이 나가 칼춤 추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 이재용과 박근혜가 사면된 부끄러운 나라, 모순의 나라, 가방끈은 다들 길지만 혜안과 지혜와 덕, 추진력을 가진 리더는 찾아볼 수 없는 나라,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태국 머나먼 외딴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가끔 유튜브로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경악하는 순간이 가끔 있다. 대부분 윤석열의 발언이다. 김건희고 무속이고 뭐고 다 떠나, 윤석열이라는 인간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그의 머리와 입을 거쳐 나온 발언. ‘무지’는 아는 것이 없고 미련하고 우악스러움을 뜻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무식’은 배우지 않은 데다 보고 듣지 못해 아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서울대 나와 사시를 9수 만에 패스하고 검사가 된 ‘무지’한 윤석열이 나라를 빼앗는 군부 세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가 싸우는 미얀마 시민을 향해 감히 ‘무식’한 자들은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윤석열의 무지는 자유를 외치던 광주 시민, 그리고 아직도 그날의 상처를 지우지 못한 광주의 어머니들의 가슴도 후벼 팠다.


안 그래도 더디 변화하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에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어찌 될까 보자. 가난하고 못 배우면 자유를 모른다는 그의 말은 자신이 ‘유식’한 엘리트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유식’한 줄 알지만 실제론 ‘무지’한 자가 ‘무식’한 자를 무시하고 깔보는 자세다. 자신이 뭘 잘 알고, 뭘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엘리트층보다 답이 없는 사람도 없다. 구제도, 변화도 어렵다. 자신이 뭘 잘못한 지 모르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진정한 지도자 감이었다면, 무지함에도 자유를 열망하고 거리로 나가 싸우는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어떻게 미얀마를 지지하고 도울 것인지, 한국에서 지내는 미얀마 출신 이민자나 난민에 대한 처우를 앞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젠더 갈등의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만든 건 아니다. 한국 사회가 현대화를 제대로 된 속도로 차근차근 밟아가는 대신 고속 질주한 탓에 미처 챙기지 못하고 지나친 고질적인 문제들 중 하나다. 다만 보다 활발한 문제 제기와 담론이 이뤄진다는 건 그 정부가 그만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때는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을 연기한 송강호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불이익을 받았다. 눈치 한 번 주면 알아서 기어 납작 엎드리는 사람들은 정부의 신호를 영리하게 알아챘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수백의 연예인이 방송에서 이유 없이 퇴출되고 사라졌다. 80년대 군사정권 시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문제 제기와 담론이 오가는 것조차 차단되는 사회에서 다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국힘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국민 통합을 바라지 않는다. ‘이대남’을 자극해 “너희들의 군 복무 희생으로 이 나라가 돌아간다"라고 세뇌된 ‘군대 갔다 온, 혹은 앞으로 가게 될 남성’에게 ‘군 복무 희생’ 카드를 계속 써야 하니까. 그들의 탐욕의 배를 채우려 대한민국은 영원히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도 많이 죽고, 폭력도 횡행하고, 전쟁도 많이 하고, 사람들이 법도 많이 어기는 사회가 국힘에겐 비옥한 흙과 같다. 하도 오래전부터 이 비옥한 흙에 끝없이 단단한 뿌리를 내려왔기에 이제는 제 스스로 어떻게 흙을 계속해서 비옥하게 만들 수 있을지까지 터득한 자들이다. 이명박, 박근혜가 망해도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이 이제 윤석열의 껍데기를 앞세워 그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윤석열은 아는 게 없어서 우스운 거지, 정말 무서운 건 윤석열을 국힘 대선후보로 만든 병풍 뒤의 사람들이다.


윤석열 같은 아는 게 없는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혀 놓으면, 당연히 이것저것 돕겠다며 세치 혀에 독을 숨기고 득실대는 세력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부터 국힘의 병풍 뒤 실권자들은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국정 농단. 우리는 역사에서 이를 학습했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얼마나 못났으면 제 당에서 대선 후보 하나 못 내고 여당 정권에서 검찰총장 했던 사람을 꼬셔 데려와 대통령을 만들려 기를 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입으론 ‘국민’을 말하고 머릿속으론 계산기를 몇 번 돌려 자신에게 떨어질 자리와 이익을 따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젠더 갈등, 세대 갈등, 빈부 갈등, 다양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사회에서 나쁜 정치인은 어느 한 편을 들어 무임승차를 한다. 좋은 정치인은 갈등을 부추기거나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이 사회에 젠더 갈등은 분명 존재하며 소수자 차별은 곳곳에 독버섯처럼 피었다. 이미 젊은 남성들은 자신의 실패가 여성 때문이라는 정치 경제 기득권과 언론의 이간질에 넘어갔고, 분노의 대상을 정치 기득권 세력과 권력자들이 아닌, 여성으로 정했다. 여성을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다루는 남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두려움에서 온다. 여성보다 나아야 한다고 강요받고 교육받고 세뇌받은 남성들은 여성이 강하고 똑똑하고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면 두려워한다. 남성은 두려워지면 폭력과 압력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명분도 없는 <오징어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기꺼이 진흙탕 게임을 벌이며 그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준다. 늘 기억하자. 샴페인 홀짝대며 피 튀기는 생존 게임을 즐기는 병풍 뒤 사람들이 있다는 걸.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국민신문고부터 없앨 거다. 그들에겐 국민의 소리는 귀찮은 징징거림뿐이다.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때처럼 언론을 통제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둘, 바로 세워가던 것, 하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아 볼멘소리가 나오는 정책들은 모조리 없앨 거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허락도 없이 일본 정부에 돈 받고 앞으로 다시는 위안부 문제로 시끄럽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한 박근혜처럼 윤석열은 대통령 임명장을 들고 일본에 제일 먼저 허리를 숙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 일본의 돈을 받아 교수로 살며 연구를 했다. 친일의 잔재가 깊고 곧게 뿌리 박힌 국힘은 윤석열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해 중국을 자극하고, 북한도 자극하고, 계속해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공포와 혐오의 정치를 이어가겠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랄 땐 몰랐지만, 해외에 사니 피부로 느낀다. 대한민국은 현재도 전쟁이 진행 중인, 그저 잠시 '휴전' 중인 나라다. 당장 내일 전쟁이 나 내가 돌아갈 고국이 없어진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태국에 돈 벌러 왔다가 고국에 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어디로도 못 가는 미얀마 사람이 여기 한둘이 아니다. 중국과 친한 태국은 그런 미얀마 난민을 국경에서 돌려보내고 있다. 전쟁 중인 나라, 한국인으로 나는 언제든 '전쟁 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살고 있다. 하여 윤석열의 '무지'로 하여금 쉽게 입에서 뱉어지는 '선제공격' '사드배치' '종전선언 반대' 같은 말은, 대한민국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으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인가 싶다. 전쟁 나면 가장 먼저 미국으로 도망칠 인간들이 국힘의 병풍 뒤에 숨은 그 인간들이다. 윤석열이 진정 아직도 북에 가족을 두고 생사도 모르며 70년째 생가슴을 앓는 국민을 생각하는 지도자라면 그리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미 서방 언론은 윤석열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면 G8에서 다시 밀려날 것이라는 결과를 분석해 발표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이 복잡한 외교 문제를 그가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진정 생각하나? 수치와 굴육과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 아닌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이라도 들고 광장에 서면, 차벽을 세우고 사람을 죽일만한 위력의 물대포를 경찰의 손에 쥐어주겠지. 그리고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 시민에 물대포를 쏘라, 손가락을 가리키겠지. 노래에 영화에 정부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면, 다신 그 노래도 뮤지션도 영화도 볼 수 없게 되겠지. 남성과 여성은 서로 죽이겠다 싸우고, 젊은이와 노인은 서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지며 누가 더 이 사회에 기여했는지, 혹은 하고 있는지 의미 없고 소모적인 갈등만 지속하겠지. 국가 행정부에서 더 이상 여성 장관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고, 정치판에서도 여성의 입지는 가장 먼저 줄어들 것이다.


유치원 일반화, 부모 동등 유급 출산휴가 적용, 기업 임원진 내 여성할당제법 시행 등 이 모든 법은 모두 여성 정치인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즉, 이전엔 이런 법이 없었단 말이다. 이런 법이 없이도 문제없이 살아온 남성이 성 평등을 주장하며 이런저런 요구가 많은 여성을 적으로 치부한다. 밤거리를 안심하고 걸을 권리, 클럽에서 술을 마실 때 남자와 엮이려 온 게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될 권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간당하지 않고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 이런 건 남성에게 인류 역사 시작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장할 필요 없는 아주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여전히 여성은 이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지금, 이 문제를 인식하고 제대로 짚고 넘어가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의견을 나누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앞으론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사회적 담론조차 품지 못하는 사회이고, 지도자라면 우리는 미래가 없다.


ln a democracy, people get the leaders they deserve.

Joseph de Maistre(175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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