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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an 21. 2022

마흔이 되어 스물에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주제넘게도, 내 인생 하나 어쩌지 못하고 늘 방황하고 여전히 쩔쩔매고 있는, 갓 마흔 번째 생일을 지낸 대한민국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의 이십 대 친구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쓰는 마음의 편지이다.


내가 스물일 때도 그랬다. 00 학번인 우리에게 사회는 ‘밀레니엄 세대’ ‘X 세대와도 다른 Y 세대’라는 이름표를 선사했다. 당시 어른들은 IMF를 이겨낸 긍정적인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우리 세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몰고 올 후폭풍과 쓰나미는 보지 못한 채 어른들이 우리를 치켜세우니 그런가 보다 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가 되지 못한 의사, 변호사, 혹은 삼성 직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고 배웠다.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를 대단히 잘못 배운 셈이다.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기 위해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공부하다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우리는 내 다르고 있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어른들도 옆에서 훈수 두는 어른들도 개의치 않고 엑셀만 밟았다. 


대학 졸업 즈음, 우리 세대가 대학 생활을 시작할 때 펼쳐진 정책의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취업률은 바닥을 쳤고, ‘신’ 자유, ‘신’ 경제, ‘세계화’라는 키워드 아래 온갖 거대 기업들은 법의 근거와 뒷받침 아래 비정규직과 불공정 노동 계약의 폐해로부터 짜인 단물을 즐겼다. 한국 사회에 대학 졸업자 백수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게 우리 세대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잉여 백수’ 콘셉트가 우리 세대가 이십대로 살았던 한국 사회를 대변한다. 한국 사회는 우리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자 바로 손절했다. 갑자기 어른들은 우리를 ‘시대의 희망’이라 부르던 스탠스를 180도 바꿔, 우리를 ‘잉여 세대’ ‘88만 원 세대’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선 때니 반짝이지만, 현 정치인들도 좌든 우든 젊은 세대에 큰 관심이 없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이해할 생각이 없으니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시도조차 만무하다. 젊음은 늘 무시당한다. 우리가 이십 대일 때도 대한민국 사회는 우리를 마치 언제든 쉽게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처럼 여겼다. 


다행인 건, 한국 사회에서 이십 대 젊은이로서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내 인생 처음으로 나의 투표권을 행사한 날, 나는 주저 없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아직도 내 인생 첫 투표권을 행사했던 날, 장소,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빠와 함께 투표장까지 걸어가 각자 투표를 하고 나와 “누구 뽑았어?” 물었을 때, 아빠와 나 동시에 “노무현”이라 답했다. 나에겐 특히 행복한 기억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 전까지 TV에서 봐왔던 대통령은 ‘머리 벗어진 사람’(전두환), ‘잘생긴 사람’(노태우), ‘콧구멍 큰 사람’(김영삼), ‘무릎이 붙는 사람’(김대중)‘이었다. 어렸던 나에겐 모두 ‘판타지’ 같은 사람이었는데,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같은 정치인이었다. 대학을 안 가고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일찌감치 단념한 겁쟁이였던 나로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은 이 사회나 어른들이 나에게 가르친 것과 달랐다. 생애 처음으로 ‘아! 나는 저런 대통령을 원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내가 원하는 대통령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정치적 관심과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개념과 인식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이 노무현이다. 


하지만 그를 선택한 결과는 혹독했다. 백도, 돈도, 권력도 없던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무시당했다. 기득권 정치인들은 검정고시 출신에 돈 없고 백 없는 집안 출신인 노무현을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물고 뜯었다. ‘그냥 꼴 보기 싫어서’라고 했다. 이후 십 년 넘게 한국 정치를 지켜보고 있지만, 노무현만큼 동료 정치인, 심지어 같은 편, 같은 당에서조차, 그리 심하게 무시당하고 방해받은 정치인은 없다. 그 당시 국민도 그랬다. 심지어 동네 개가 짖어도 ‘노무현 잘못’이라는 농담이 가득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견뎌왔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잘 버텨냈다. 그의 도전, 성취, 좌절, 패배를 대한민국 이십 대 국민으로서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이후 나는 정치에서 멀어졌다. 정치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상적인 정치는 한국에 없었다. 소중한 한 표 따윈 없었다. 힘 있는 자의 한 표가 힘없는 자의 수천, 수만의 표를 짓눌렀다.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88만 원 세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치가 어찌 되든, 일단 오늘을 위해 먹고살아야 했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먹고산다는 건 슬픈데 슬픈지도 모르고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건조한 삶을 의미한다. 그렇게 이십 대 말, 삼십 대 초반을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아래 보냈다. 잡지 일을 오래 했다. 그 정권 아래 연예계와 화류계, 패션계, 방송계를 가까이서 봤다. 그때 사회 분위기라는 게 분명 있었다. 사회 구성원이 드러내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따르는 분위기.


여성들의 인식은 점점 더 선명하고 명쾌해져 가는데 기성세대와 기성 사회는 그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 사회적 약자 집단, 저마다 억눌린 감정과 울분과 불만이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말해도 안 될 거란 학습 효과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그래도 용기 내 나선 사람은 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렸다. 그래서 소름 돋게 조용했다. 


정권 말이 되어서야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나 뮤지션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인터뷰 때 그리 사람들이 말을 조심했던 것도, 알아서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공포 정치는 침묵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알아서 기었다. 그렇게 수면 아래 쌓이고 쌓인 비리와 부패, 아는 사람 눈 감고 봐주기가 조용히 이뤄지며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시위에 나선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죽었고, 많은 시민이 고초를 당했고, 결국 316명의 아이들을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수많은 권력형 성 비위 사건들도, 모두 정권, 아니 정권을 잡은 자들 때문에 수면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그 정권에서 십 대를 보낸 친구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10년 같았겠지만, 나는 그 10년을 끔찍한 침묵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자 그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각계각층의 의견과 요구가 터져 나왔다. 언뜻 보면 문제 많은 정권 때문이라 쉽게 치부할 수 있겠지만, 사회에서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가려진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건 나에겐 그나마 나은 정권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도 그랬으니까. 만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잘되면 자신 탓, 안되면 대통령 탓이다. 한국의 질 낮은 진보는 이미 오래전 갈 길을 잃었지만, 그 와중에 나는 문재인이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팬데믹을 보냈다면 지금 어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노무현을 뽑았던 아빠는 큰 실망이었는지 큰 무력감이었는지, 이명박을 뽑았다고 했다. 그 뒤로 나는 아빠와 정치에 있어서 뜻이 그리 맞질 못했다. 마침내 이명박이 구속되고, 박근혜가 처참하게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올 때 아빠는 나에게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던 나에게 아빠의 실수와 판단 오류에 대한 인정,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는 한국 사회로부터, 한국 정치로부터 상처받은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나는 사과한다. 노무현을 뽑은 대선이 내 생애 첫 투표권 행사였듯, 이번 대선이 또 누군가에겐 생애 첫 선거일 텐데, 이런 저급한 선거를 치르게 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론 이십 대 전반에 걸쳐 좋은 정치 경험을 할수록 삼십 대, 사십 대가 되어서도 올바른 정치 개념과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좌우를 떠나 누가 이기든, 선거 과정만은 시간이 갈수록 세대가 바뀔수록 더 나아져야 하는데 계속 후퇴만 하는 건, 나처럼 마흔이 된 우리 세대의 탓이기도 하다. 우리 윗세대의 탓이 더 크긴 하지만. 


하지만 그대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 우리 역시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바뀌는 건 우리 전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가능할 거야’라는 푸념으로 숱한 밤을 지새웠고, 진정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 세대를 ‘88만 원 세대’라 부르며 손절한 이후, 우리 먹고 살길 찾기 바빠, 다음 젊은 세대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좋을지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너무 순진하고 무기력했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우리는 마흔이 되었고, 여전히 누군가는(아주 소수에 달하지만) 우리가 걱정으로 새웠던 숱한 밤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여전히 우리는 순진하다. 


여전히 ‘82년생’ 우리들은 억지로 끼워 맞추면 ‘MZ 세대’에 들어간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세대가 맘에 드는 건, 그래도 우리는 그나마 아날로그의 맛이라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꼬꼬마였을 때 LP를 만났고, 초등학교 땐 카세트테이프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들었다. 이후 내 학창 시절은 CD, MD, MP3 시대를 차례로 거쳤고, 나는 지금 스트리밍 시대에 살고 있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 태어나 공중전화로 ‘연락방’에 음성을 남거나 삐삐로 호출해 친구들을 만나던 십 대를 보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휴대폰으로 쓰기 시작했고, 지금 나는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의 따뜻한 질감을 기억하며, 그 기억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MZ 세대’로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현재의 이십 대 초반과 한 카테고리로 묶여선 안 된다. 그대들은 우리 세대와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그래야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내 눈치만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방황하다 삼십이 훌쩍 넘어서야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나로선, 해외에서 생활하며 전 세계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로선, 현재의 이 세상 이십 대에게 희망을 본다. 손안에 지구를 담고 다니며,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 친구와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은 우리 세대보다 덜 수동적이고, 더 열려있으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실천할 줄 안다. 나는 핏대 세우며 카메라 앞에서 소리만 지르는 정치인들보다 모금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K-팝 팬들이 더 멋지다. 트럼프 재선을 반대하며 전 세계 BTS 아미 팬들이 트럼프 연설장 티켓을 모조리 선점해 그 공간을 텅텅 비게 만들었던 게 무엇보다 가장 선명하고 희망적인 정치적 행위이다. 그대들은 너무 멋지다. 너무 멋진 정치인이다. 그러니 부디, 이번 선거 투표 멋지게 하시길. 선택의 결과는 결국, 그대들에 고스란히 돌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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