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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21. 2021

지천이 흔들릴 때 우리는


유튜브로 한국 시사 프로그램 라이브를 보는데 갑자기 앵커가 당황한 듯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제주 해상에서 시작된 강진이 큰 규모로 제주와 남서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속보였다. 


시청자 제보 CCTV 영상이 무한반복 재생됐다. 속보에 대응하는 앵커의 순발력은 한참 아쉬웠다. 부랴부랴 전화를 받은 각종 대학 교수들 역시 시원찮았다. 아직 자료가 충분치 않은데 현 상황 파악과 지진의 원인, 앞으로의 예측까지 묻는 앵커에 교수들은 에둘러 확답을 피했다. 재난 방송의 포맷 그대로를 답습하는 와중, 별 다른 정보도 대응책도 없이 사람들은 알아서 살 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한 반복되는 전국의 CCTV 장면 중 유독 두 사람이 마음에 콕 박혔다.




CCTV는 한 식당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식당에 일하는 종업원들이 진동을 느끼자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얼른 카톡방에 엄마 아빠를 소환해 다들 괜찮은지 안부를 물었다. 


다른 한 곳은 제주 고급 호텔이었다. 호텔 객실 손님들이 가운만 두르고 밖으로 나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 와중에 하얀색 정장을 차려입은 호텔 종업원은 한 무릎을 꿇고 앉아 대피 손님들에게 물을 따라 주며 서비스를 계속하고 있었다. 남들에겐 별 일 아닐지 몰라도, 나에겐 놀라운 광경이었다. 여진이 더 지속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내고 있는 그가 존경스럽기도,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다. 그 역시 쇼크 상태이었을 것이고, 안전한 곳에 대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휴대전화엔 가족들의 안부 메시지가 쌓여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토네이도가 미국 켄터키를 휩쓸었고, 필리핀 중남부 지역은 태풍 ‘라이’로 초토화됐다. 내가 사는 태국 섬 꼬따오 역시 지난달 엄청난 폭우로 수많은 이들이 집을 잃었다. 자연 가까이 살면, 자연의 고마움만큼이나 무서움도 더 가까이 느끼며 산다.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그동안 잘난 척하며 지은 집도, 도로도, 전기도, 수도도, 자연은 눈 하나 깜빡 않고 휩쓸어버릴 수 있다. 그런 힘을 갖고도 자연이 인간을 보듬는 건 인간이 잘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없이 연약하고 안쓰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아주머니와 대피한 손님들을 위해 물을 따라 서비스하는 호텔 직원의 모습이 지진 소식이 전해진 지 며칠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내 맘에 떠다닌다. 나는 생사가 걸린 지천이 흔들리는 순간, 어떻게 마지막을 맞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물을 따라 주는 존재가 될까, 물을 받아먹는 존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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