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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Sep 28. 2021

상처 많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00학번으로 이번 생을 살게 된 나는 이십대에 김대중과 노무현을, 삼십대에 이명박과 박근혜를 차례로 겪었다. 파란색 당과 빨간색 당이 도긴개긴으로 자신들의 무능과 무식과 무력함, 거기에 더해 각종 부패와 부정을 겨뤄온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에 나는 어떤 당을 지지한다기보단 한 사람을 지지한다.


한국에서 잡지사 에디터 일을 할 땐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압구정동에서 부티 나는 스트리트 문화를 누리던 강남 부자 금수저 아들딸들이 삶이 지루해 만든 독립잡지부터 돈 놓고 돈 먹으려는 대형 언론사가 운영하는 패션지까지 두루 경험하면서다. 잡지에 내가 쓴 칼럼이 들어갈 때면 편집장은 가끔 “하나야, 이건 표현이 좀 세지 않아?”라며 우회적인 디렉팅을 내렸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라도 하면 내 밥줄은 여기에서 끊기는 거구나, 내가 얼마나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에디터든 상관없이. 편집장도 나에게만 보스였지, 피라미드 사회 권력 구조에서 그 역시 누군가의 디렉팅을 따라야 하는 처지였다. 우리 모두에게, 말하지 않아도 들리고 압박이 없다 해도 부담이 큰, 검은 그림자 같은 게 항상 느껴졌다.


에디터로 일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처음 느낀 건 이명박, 박근혜 정부였다.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에디터 두세 명의 몫을 해야 했던 독립잡지에서 독립 아티스트들을 지지하고 지원한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오히려 그들의 삥을 뜯는 모습에 신물이 난 이후, 나도 자존심이고 콧대고 뭐고 큰 회사에서 돈이나 좀 벌어보자, 하는 생각에 마침 제안이 들어온 대형 잡지사로 옮긴 직후였다. 나도 이제 한눈 안 팔고 앞만 보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면 좋은 풍경을 보며 살 때가 오지 않을까, 내 주변 많은 이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다들 “Yes”를 외칠 때 혼자서 “No”를 외치면 망하는 거구나, 갈팡질팡하던 어리석고 연약한 시절이었다. 나도 이제 ‘사회’라는 것에 더 이상 반항하지 말고 편입되어 순종적으로 시키는 대로 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었던 삼십 대 초반이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고 안 치고 지루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가늘고 길게 산다면 집 한 채에 차 한 대는 굴리며 살겠지, 한숨 섞인 희망을 품기도 했다.


마침 그때, 처음으로 혼자 방콕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난생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선 기간이었고, 박근혜가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됐다. 카오산 로드 서점 가판대에 <타임> 매거진이 쫙 깔려 있는데, 박근혜의 상반신 사진이 ‘The Daughter of Dictator’ 타이틀과 함께 커버를 장식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이었는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대한민국에 드디어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그 표지 안의 여자가 한국이 아닌 태국 밤거리를 걷고 있는 나에겐 같은 여성으로서 수치였다. 거리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이 이젠 꽤 발전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독재자의 딸을 선거로 뽑을 수 있어?”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나는,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부합하는 리더를 얻는다”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해 답하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시민으로서 나도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 당시의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사회는 우리 세대에 ‘88만 원 세대’라는 특별한 애칭을 지어놓고, 우리 윗세대에게만 눈먼 돈을 갖다 바치기에 바빴다. 그 사이 우리는 스멀스멀 양지로 드러나기 시작한 성차별, 지역차별, 빈부격차, 열정 페이, 비정규직, 실업률 상승, 노동환경 문제 등등 더 먼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폭탄처럼 터지는 가운데, 가림막 하나 없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쏟아지는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시대는 겉으로 보면 평온하기만 했다. 정치에 눈 어둡고 무지한 나는 여전히 그나마 좋은 정권엔 이것 저것 사회문제가 많이 튀어나오는 법이라 믿는다. 이명박, 박근혜 때는 아무도 제대로 말을 못 했다. MBC가 제대로 입을 틀어막혔고, 누구든 반정부 의견을 피력하면 매장됐다. 그 뒤로 아무도 용기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아래 튀어나오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이명박, 박근혜 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한편으론 현재의 이십대들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이십대였을 때도 군대 내 괴롭힘은 물론 직장 내 괴롭힘, 성폭력, 성차별, 갑질 등 문제가 널렸지만 아무도 그걸 수면으로 끌어내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끔찍하게 말을 잘 들었다. 반항하지 않았다. 의견을 피력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었다. 그 사이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측근들은 해먹을만큼 신나게 해먹었다.


지금까지의 사회를 만든 윗세대가 낳은 우리 세대는 별다를 게 없었다. 소심하고 무력하고 무능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까지 위기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자는 산업화 시대의 슬로건도 무색해졌고, 먹고 살만해진 우리는 이제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떤 게 좋은 삶인지 충분히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 사이 박근혜는 할머니들 허락 없이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하고, 중국 열병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 자리인지,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 채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시진핑 사이에 서서 히죽거렸고, 304명의 세월호 사람들이 바다에서 절규할 땐 약을 하고 곤히 자고 있었다. 그전까진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이 사회가 바뀌겠나, 했던 내가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정말 나라 하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박근혜가 국제 사회 행사에 나가 다른 국가 정상과 나란히 서서 헛소리를 해댈 때면 애국심이 넘치는 편이 아닌 나조차도 민망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단 하나, 박근혜에 고마운 건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헌법을 내 인생 처음, 피부로 체험할 수 있었단 사실이다.


한편, 김대중과 노무현, 모두 상처가 많았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은 성인군자처럼 모든 걸 용서하려 했다. 김대중이 그동안 자신을, 그리고 많은 약자들을 괴롭혀온 철천지원수들을 다 용서해버리니, 피의 복수극은 아니더라도 통쾌한 한 방은 날릴 거라 기대했던, 김대중을 뽑은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래서 노무현에 거는 기대가 더 컸다. 노무현은 시도는 했다. 그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역사에 큰 점 하나는 찍은 셈이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도와주는 이도 없었다. 검찰을 개혁하려 하자 검사들은 깡패들처럼 서로 손깍지와 어깨 깍지를 꼭 끼고 노무현을 둘렀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검사들과 마주 앉아 맞짱토론을 하던 그 장면은 내 인생의 베스트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는 힘이 약했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고졸에 백도 없고 돈도 없는 노무현이 자신들의 모습 같아, 그의 서민적인 모습에 반해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보통의 사람들이 노무현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얕보며 손가락질을 해댔던 것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당 의원들도 그랬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말이다.


순종과 복종이 자유보다 쉽다. 자신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사람을 찾아 서열과 계급을 정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령하는 사람을 쫓는 게 인간의 본성인 듯 싶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두려워하고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차라리 순종과 복종을 택한다. 언제든 일이 틀어지면 비난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언제든 복종의 대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노무현에 얼굴을 싹 바꾸고는 온갖 조소와 모욕을 일삼다가, 그가 자살하자 또 다시 한 번 얼굴을 바꿔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문재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문재인은 김대중과 노무현, 모두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다른 행보가 결국 어떤 역사로 쓰였는지 알고 있다. 노무현 서거 당시 상주였던 문재인이 최고 권력의 상징 대통령이 되어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는데, 가장 먼저 노무현의 죽음과 관계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목부터 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을까. 문재인은 자신의 힘이 강하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안다. 대통령도 어찌할 수 없는, 혹은 대통령 그 이상의 더 큰 권력이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빼고 수십 년간은 빨간색 당 사람들이 이 나라를 굴려왔다. 그 긴 세월 견고하게 유기적으로 쌓인 적폐, 친일 세력을 어찌 한 명의 대통령과 단 한 번의 임기로 무찌르나. 그래서 문재인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설거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하나 바꾸면서 뭔가 통쾌한 복수극이 벌어질 거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번에도 실망했다. 문재인은 너무 무르고 부드럽고 재미가 없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게 가장 호시절이었단 걸 뒤늦게 알게 된다. 그걸 나는 파란 당 대통령 2명, 빨간 당 대통령 2명을 겪으며, 노무현을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이명박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놀아나다가, 박근혜를 탄핵시키고서야 깨달았다. 지금 이십대가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박근혜가 대통령이었을 땐 대통령 하나 바뀌면 내가 사는 세상이 이리 많이 바뀌는구나 했는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니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더러웠던 한국 정치사가 바뀌겠나 한다. 정치가 이렇게 우습다. 한국에서 살지 않는 한국 사람으로서 앞으로 또 한 번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사는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안다. 부자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건 대통령 하나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이다. 대통령 하나 잘 뽑았다고 집값이 안정되지 않는다. 운과 타이밍이 좋아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남의 집이 생기지 내 집이 생길 리가 없다. 곽상도 아들이 6년을 일해 퇴직금 50억을 받았다고 해서 몇 백도 안 되는 내 퇴직금에 나비 효과처럼 영향을 끼쳤다고 징징거리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진즉에 ‘오징어 게임’을 참여를 포기했고, 한국을 떠났다. 4대 보험과 퇴직금 없는 육체노동자이자 설움 많은 외국인 노동자인 다이빙 강사로 살고 있지만, 내 삶의 질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에서 살지 않는 한국 사람으로서 어차피 장식용으로 대통령을 뽑는 거라면, 해외 순방할 때 다른 나라 정상들과 나란히 서서 카메라에 잡힐 때 부끄럽거나 치욕스럽지만 않으면 좋겠다. 문재인이 잘했건 못했건 국제사회에서 세계 정상과 함께 했다는 영문 뉴스를 보면 적어도 박근혜 때처럼 부끄럽진 않다. 윤석열이 구부정한 거북목을 하고 ‘어- 어-’를 단어 단어마다 넣어가며 말인지 떡인지 모를 말을 미국 대통령이나 유럽 정상들 앞에서 한다고 생각하면 나도 같이 거북목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상처를 포용으로 드러내든 칼부림으로 드러내든 여전히 내 삶은 크게 나아지거나 크게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 ‘국민 통합’ 같은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가식적이지 않고 자기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세 식구도 통합이 안 되는데 국민을 어떻게 통합하나. 정치 자체가 사회 분열을 먹고 사는 생물이며 각 이익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인데 그와 하나부터 열까지 열렬하게 반대되는 개념인 ‘통합’을 왜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통합’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정치인은 일 순위로 제외다.


차라리 이번엔 그냥 시원하게 눈치 보지 말고 통쾌한 복수극 한 번 해줬으면 좋겠다. 한 번은 하고 끝내야 할 살풀이를 지금껏 여러 번 눈치 보며 시도만 하다 말아 버리니 다들 뭔가 속이 꽉 막힌 눈치다. 내 생에 한 번쯤은 무모한 용기를 객기로 끝내지 않고, 시작을 제대로 해서 끝도 제대로 보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그래야 이다음에 박근혜보다 더 어이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추억이라도 먹고살지. 다만 역시 고졸에 소년공에 집안 문제에, 우리 사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 때문에 좋다고 투표를 해놓고선, 또다시 노무현처럼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등에 칼을 꽂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대통령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서, 절대 권력과 부를 가진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인간의 노예근성을 저버린다고 해서, 또다시 노무현처럼 그렇게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줬으면 좋겠다.


‘오징어 게임’이 싫어 게임에서 도망치고 다시 합류하길 거부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밖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분명 한국은 최빈국에서 부국으로 최단기간 발전한 나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울증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여전히 태국에 놀러와 태국, 미얀마 사람들 깔보고 무시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중국 사람들이 세계여행을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현재 중국 관광객들이 가지고 있는 주홍글씨 ‘진상’ 자리엔 언제나 한국인이 있었다. K 팝과 K 드라마가 뜬다지만, 내가 기억하는 90년대엔 한국에서 일본 음악을 듣고 일본 영화를 보는 것도 불법이었다. 김대중이 일본 문화 전면 개방을 선언했고, 한국 같은 작고 힘없는 나라는 문화로 승부해야 한다며 마이클 잭슨도 만났다. 스크린 쿼터제로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한국 영화를 지켜야 한다며 한국 영화인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게 그리 먼 일이 아니다. 정부에 반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감독, 배우, 뮤지션의 이름이 적힌 블랙리스트가 돌던 게 불과 몇 년 전, 박근혜 정부였다. 나는 BTS가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에도 외국 친구들에게 대한민국이 꽤 괜찮은 나라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 박근혜를 뽑은 건 바로 우리였으니까. 그를 우리 힘으로 탄핵했다고 해서 그 어리석은 선택이 합리화되지 않으니까.


K 팝과 K 드라마, 영화, 공연 같은 콘텐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욕망을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지 가까이 지켜봐 온 전직 잡지사 에디터로서, 이 외딴 작은 섬까지 울려 퍼지는 블랙핑크 리사와 BTS 노래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무겁다. 다음 대통령은 K 팝이 국위 선양했다며 좋아만 할 게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탐욕스러운 산업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아이들을 찾아낼 줄 아는, 그리고 당장 해결할 수 없다 해도 공감만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 때 가뜩이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더 큰 대못을 박은 건 박근혜의 공감 능력 없는 사이코패스 같은 말 한마디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면서요?”였다.


대통령은 상징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프고 시린 인생의 경험들이 쌓여 한 인간의 공감 능력을 키운다. 다음 대통령은, 수십 년간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묵은 때와 대대로 이어져온 좀비 같은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을 숨기지 않고, 교양 떨며 고상한 척하는 대신, 이젠 좀 과감하게 한 방 날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치는 각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이들의 싸움판이다. 그 판에서 이겨 대통령이 되었으면 ‘통합’ 같은 가식적인 말은 집어치우고, 해야 할 일은 과감하게 했으면 좋겠다. 저항이 있어도 말이다. 거기에 공감 능력을 발휘해 말이라도 한마디 따뜻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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